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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요17:23)

1. 성경 (요17:20 ~26)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1)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2)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3)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4)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5)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진들만 위함이 아니요” ; 지금까지 사도들만 포함했던 그의 기도를 이제 세상 끝날까지 있을 복음의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다.이것이야말로 확신에 대한 뛰어난 바탕이다. 곧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을 경우 우리는 저 사도들과 함께 그의 신실한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아무도 멸망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이 기도는 잔잔한 항구요 누구든지 거기에 정박하는 자는 모든 파선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은 그의 관심사라는 점을 엄숙하게 맹세하신 말씀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으로 하나님에게 바쳐지며 파멸로부터 안전하게 되는 것이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인 만큼 우리는 이 축복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다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 점에서 생각할 때 세상의 광기는 극악하기 짝이 없다. 모두들 구원을 바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얻는 확실한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날 경우에는 가망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처럼 친절하게 제공된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려 하는 자는 백에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말을 인하여~~~~믿는” ; 이 말은 신앙이 ‘들음’에서 생긴다는 뜻인데 이것은 인간에 의한 외적인 전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앙으로 이끄시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신앙의 저자요, 인간들은 일꾼들이요 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믿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다.

 

”21 저희로 다 하나가 되어” ; 그는 다시 우리의 행복의 절정을 통일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당연하다. 요컨대 인류의 파멸이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나머지 스스로 깨어지고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류의 회복은 한 몸으로 올바르게 연합하는 데 달려 있다.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서 4장 3절과 16절에서 교회의 완성이 신자들이 한 영안에서 연합하는데 있음을 간파하고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 전도자들 그리고 목사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이 신앙의 통일을 가져 올 때까지 그것을 회복하고 재건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 그리스도는 온 몸의 머리요, 이 온 몸은 각 부분의 주어진 분량의 활동에 따라 하나로 연합되고 모든 것을 공급하는 가운데 성장해 가며 덕을 세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통일성을 두고 말씀하실 때마다 세상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무서운 일인가 하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이 복된 삶의 시작이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본 장에서 그가 아버지와 하나라는 말씀을 자주하고 있는데 그 때마다 그는 단지 그의 신령한 본질을 두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중보자로서의 신분에서 그리고 그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점을 잘 알아야겠다. 많은 선배들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와 하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들이 이 처럼 문맥을 따로 분리해서 생소한 의미로 의곡하는 것은 아리우스파의 논쟁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단지 그의 신성만을 생각하게 하는 것과는 정 반대였다. 곧 그가 우리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목적에서부터 변론하는 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아버지와 함께 가지는 통일성이 무의미하게 되고 결실을 맺을 수 없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하나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서 중보자로서의 그의 신분을 박탈하지 않도록 유의하라. 이렇게 될 때만이 앞 뒤의 문맥이 유지 될 수 있다. 곧 아들과 아버지의 통일성이 무의미하지 않으려면 이 통일성의 능력이 신자들의 전체 몸에 확산되어야 한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추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본질을 우리에게 양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의 능력에 의해서 그의 생명과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믿게 하옵소서” ; 여기서 나오는 ‘세상’을 당시 흩어져 있던 선택자들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본 장에 나오는 모든 ‘세상’의 의미는 버림받은 자들을 뜻하므로 나는 다른 견해를 취한다. 곧 뒤이어서 그는 여기에 언급하고 있는 동일한 세상을 그의 모든 백성과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알다’는 의미의 단어로 ‘믿다’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에 의해 정죄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천상적이요 신령한 영광을 깨닫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신령한 영광의 광채가 버림받은 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재앙인 것은 그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것도 스스로를 위해 가진것이 없고 오히려 신자들을 부요하게 하려고 자신이 부요했다는 점에서 그의 완전한 지복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행복은 죄로 말미암아 지워 버려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회복하게 되고 찾는데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서만 그의 생생한 형상일 뿐 아니라, 그가 우리와 함께 지닌 그의 인상에까지도 아버지의 영광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만큼 그는 그의 지체들을 그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바울도 역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우리 모두가 수건을 벗은 얼골로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게 되자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그 현상으로 변형되었다”하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어느 누구나 인장반지로 찍혀지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새겨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취급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23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여기서 그는 자기에게 모든 축복의 충만함이 있으며 하나님에게 감취어져 있던 것이 이제 그에게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그의 백성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샘에서 흐르는 물이 여러 개울을 통해서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 ;  이것이야말로 경건한 자들 속에 거하는 하늘의 성령께서 의와 성결의 광채를 발할 때 세상이 싫건 좋건 의식 할 수밖에 없는 경건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없이 뛰어나게 상징으로 보여주며 탁월하게 확증한다.

 

”24 아버지께서~~~~~나를 사랑하시므로” ;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순수한 신성보다는 중보자의 신분에 더 일치한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그의 지혜를 사랑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인정 할 수도 있지만 문맥이 우리에게 가리켜 보이는 방향은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앞에서 기도하시면서 사도들이 자기와 하나가 되어 그의 나라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실것을 요청했는데 이 때 그는 교회의 머리로써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그 원인으로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사랑을 받은 것은 세상의 구속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를 그처럼 지극한 사랑으로 받아 주신 것은 그가 아버지로 하여금 그의 선택자들에 대한 사랑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장본인이 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 나는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자들의 완전한 행복을 두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곧 그들이 하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나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원하옵나이다” ; 여기서 ‘to will’은 ‘to desire’(원하다)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곧 이 기도는 지시의 기도가 아니라 간청의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두가지 의미 중 어느 것을 택할 수도 있다. 곧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외형적 임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그를 먼저 가는 하늘나라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침내 데려 가실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 그가 그의 제자들과 세상을 대조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은총과 찬사를 강조하려는 뜻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이 배척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들만을 꼬집어 내는 것은 옳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더하시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의로우신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세상과 그것의 악의를 압도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제 아무리 교만하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려 해도 그에게 전혀 누를 끼칠 수 없으며 그의 존귀한 의가 건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훼방할 수 없다”는 말씀이나 마찬가지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교사의 직무를 수행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를 알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음성 뿐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계시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의미는 그가 사도들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더우기 그들의 그 당시까지의 신앙은 매우 연약하였으므로 그는 그들에게 장차 더 큰 진전이 있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에게 성령의 더 풍성한 은혜를 소망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 곧 당신께서 내 앞에서 그들을 사랑하도록 또는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도 저희 안에 있게”라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에서 그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곧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을 바라보시면서 그의 전체 몸을 보지 않을 수 없듯이 우리로 그 안에서 하나님에게 발견되려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