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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요18:13)

1. 성경 (요18:12 ~ 27)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2)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3)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14)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5)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6)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7)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8)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0)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21)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3)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4)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5)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6)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개역개정 요한복음 18:27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
”12 이에 군대 천부장과~~~~” ; 자신의 음성으로 군인들을 땅에 엎드러지게 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잡혀 가시는 것은 모순같이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마침내 그의 원수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면 무엇때문에 그런 기적을 행하셨던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신령한 능력에 대한 전시는 두 가지 면에서 유익했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연약하기 때문에 굴복하셨다는 식의 우리의 사고방식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며, 둘째,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자발적으로 죽음을 당하셨다는 점을 입증한다. 지금까지는 그가 그의 원수들을 상대로 그의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유효했지만 그러나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자 그는 스스로 자제하고 희생제물이 되려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몸이 묶여진 것은 우리의 영혼이 죄와 사단의 결박에서 풀려나도록 하려는 뜻에 서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것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의 본질에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곳에서는 별로 기억할만한 것이 시행되지 않았다. 아마 장소가 가까왔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회의를 소집할 때까지 그리스도를 안나스의 집에 감금했던 것 같다.

 

”그 해의 대제사장~~~~~~” ;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해석처럼 대제사장의 임기가 1년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요세푸스가 뚜렸하게 말하고 있듯이 그때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 본래 율법에서는 이 직위를 종신적이요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당시 야망과 내적 반란 때문에 로마 총독들은 금전과 총애에 따라서 이 대제사장에서 저 대제사장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을 일삼았다. 그래서 비델리우스는 가야바를 해임하고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을 후계자로 임명했다.

 

”14 ~~~~~~권고하던 자러라” ; 복음서 기자는 얼마전에 한 이야기를 여기서 반복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혀를 붙잡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에 반대해서 발락왕을 위해서 저주하고자 했던 백성들을 상대로 축복을 베풀 수밖에 없었듯이(민24:5) 배역적이요 악한 대제사장의 부정한 입을 사용해서 한 가지 예언을 발설하게 하셨다(요11:50)

 

”15 또 다른 제자 하나가~~~~” ; 요한이 익명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해서 이 제자를 요한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신분이 천한 어부인 요한이 어떻게 고귀한 신분인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권속의 한 사람인 그가 어떻게 대제사장의 집을 자주 드나들 수 있었겠는가? 추측컨대 그는 열둘 중의 한 명은 아니지만 제자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이야기의 순서를 정확하게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간략한 개요로서 만족하고 있다. 요컨대 베드로가 한 번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실과 나머지 두 번 부인한 사실의 다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무관심한 독자들은 이것 때문에 첫 번 부인을 안나스의 집에서 있었던 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 없는 말이요 다만 분명한 것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한쪽은 대제사장의 하녀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앞에 끌려 왔을 때 아무나 들여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와 친분이 있던 제자가 베드로의 입장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 입장하는 것을 허용받고 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값비싼 것이었다. 그는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다. 그가 문지방에서부터 그처럼 창피하게 넘어지는 순간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은 그의 허풍이다. 베드로는 사정권 밖에 있으면서 위험에 대한 허깨비만 보고도 풀이 죽었는데 날마다 쓸데없는 일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가는 우리는 아닌가? 한 마디로 우리의 용기란 눈앞에 원수가 없는데도 저절로 폭삭 주저앉고 마는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난폭한 마음을 허풍으로 가득 찬 인간은 온 세상을 상대로 당장 승리를 거두겠다고 쉽게 약속하지만 엉겅퀴의 그림자만 보아도 덜컹 겁을 집어 먹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안에서 담대한 우리가 되도록 하자.

 

”나는 아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베드로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그의 제자 중에 하나라는 점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문제를 간접적으로 회피해 놓고 그럴싸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18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 복음서 기자는 베드로가 직원들, 하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이 설화의 앞뒤 문맥을 잘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자기 스승을 부인해 놓고 악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생각 없이 불을 쬐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하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 다른 비슷한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대제사장의 집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조바심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물으니” ;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에게 마치 무슨 골치 아픈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 제자들을 따로 모집함으로써 교회를 분열시킨 것처럼 그리고 무슨 신기하고 사악한 가르침을 통해서 순수한 신앙을 더럽히려는 거짓 선지자인 것처럼 심문하고 있다. 그들은 제공된 구속자와 그와 함께 약속된 구원을 배척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 모든 것으로 정죄하고 있다.

 

”20 내가 드러 내어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 대답은 불경건한 자들의 횡포 때문에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없다 해서 그것을 사사로이 자기 골방에서 가르치는 것을 정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 합법적이요 불법적인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가야바의 철면피 근성을 반박하고자 했을 뿐이다.

 

“22 이 말씀을 하시매~~~~” ;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횡포가  어느 정도였고 그들의 규칙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하는 점과 제사장들 사이의 예절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재판관으로서 앉아 있지만 야수와 같이 잔인한 자들이었다. 이 공의회로 말하면 무엇보다도 침착성이 지배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일개 직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재판 도중에 재판관들이 보는 앞에서 아직 어느 면에서나 유죄 판결이 나지 않은 피고인을 주제넘게 후려칠 정도였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와 모든 인격 그리고 모든 예의가 사라지고 없는 그러한 야만적인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23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 ; 이 말씀은 다른 곳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과 모순되어 보일 것이다. 곧 그는 자기 왼편 뺨을 친 자들에게 오른편 뺨을 돌려대지 않고 있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인의 인내에 있어서 얻어맞은 사람은 언제나 말 한마디 없이 부당한 처사를 꿀꺽 삼키라는 법은 없다. 그에게서 요청되고 있는 것은 첫째, 그것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둘째 모든 복수심을 버리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그의 손과 마음이 복수심과 분노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는 한, 그 부당성을 지적해서 충고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24 결박한 그대로 ~~~~~보내니라” ; 우리는 이 문장을 괄호로 묶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안나스의 집에 이끌려 갔다는 말을 하고 나서, 마치 그곳에서 제사장의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 다음에 이제 와서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이끌려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동사의 시제 때문에 속은 사람들이 많으므로 나는 이것을 과거 완료, 곧 “보냈었다”로 해석하는 편을 택하겠다.

 

”25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 얼마나 무서운 베드로의 무감각인가? 그는 자기 스승을 부인하고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하여 죄를 계속 범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맹세하면서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정했다는 점을 기록하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를 여기서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범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27 곧 닭이 울더라” ; 주님께서 손수 자신의 눈길을 우리에게 향하기 전에는 그 어떤 죄악, 그 어떤 징조, 그 어떤 경고도 우리에게 효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