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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주석/여호수아

여호수아서24장

1. 성경 (수 24:1 ~ 33)

 

 

 

 

 

2. 받은은혜

 

 

 

 

3. 묵상 (Calvin주석)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 내가 보기에 그는 앞에서 간략하게 이야기했던 내용을 여기서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을 동일한 목적으로 두번씩이나 생소한 곳에 불러낸다는 것이 적합한 일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복을 통해서 이야기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내가 이미 언급한 내용, 곧 그들 모두가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그 집회의 성격이 더욱 더 성스럽고 엄숙했다는 점을 표현해 주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러므로' 라는 단어를 여기에 삽입해서 이미 시작된 내용이 계속되고 있다는 접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여호수아가 늘 하듯이 엄숙한 방법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마치 그의 면전에서 말하듯이 백성들을 상대로 이야기했으며, 그 결과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일들을 다스려 오셨으며, 자신들이 한 일도 사적인 업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거룩하고 깨뜨릴 수 없는 약속을 확증한 셈이라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뒤에서도 곧 덧붙여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여호와의 성막이 있었다. 여기서 그 언약케가 그 장소로 이동한 것은 위치를 바꾸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처럼 심각한 문제를 두고 그들이 하나님의 지상법정(3) 앞에 앉으려는 뜻에서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사실 법케를 이동하지 말라는 종교적인 금지도 없었으며, 세계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너희 조상물이~~~~~~강 저편에 거하여~~~~~~" ;  그는 먼저 그들의 입양이 거저 베풀어진 것이라는 집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무상의 입양율 통해서 그들이 조급이라도 자신들에게 특수한 공로나 강점이 있는 것으로 자랑하는 일이 없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남들보다 별로 나은 집이 없을 때 오직 그분의 선한 뜻에 따라서 그들을 모아 특수한 백성으로 삼아 자신에게 동여매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자랑할 점이 전혀 없다는 접을 분명히 하는 뜻에서 그는 그들의 기원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조상들이 갈대아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상을 섬겼으며 그
들과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그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건져낸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족보를 장식하는 뜻에서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나 유랑객이 된 것은 그가 갈대아의 불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우스팡스러운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다(4). 그러나 영감받은 저자의 맡을 유심히 들여다. 보자면 그도 데라와 나흘과 마찬가지로 당시 유행하던 우상숭배의 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백성들의 조상이 이방신을 섬겼으며 아브라함이 그런 나라에서 구출받은 점이 기록되고 있는 것은 이 백성들이 처음 시작될 때,하나님의 값 없는 자비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동족들과 같지 않았더라면 그의 신앙은 특별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그 반대의 내용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으므로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약화시킬 무슨 장점을 전혀 갖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그의 후손들도 그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을 때 그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세워졌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아가 아직 살아 있었는데도 온 세상에 우상숭배가 퍼져 있었을 뿐 아니라 최소한 보다 순수한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어야 할 셈 지파에게까지 파고 들었다는 점은 거의 믿율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중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이런 면에 있어서 유혹당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제지 할 수 없게 되는가 하는 점이 신령한 은혜를 특별히 받은 이 거룩한 족부장마지도 자신의 후손을  제지해서 참 하나님을 저버리고 미신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대로 입중되고 있다.

 

"3. 내가~~~~ 아브라밥을~~~~이끌어내어~~~~" ; 이 표현은 내가 앞에서 제시한 내용, 곧 아브라함이 천저한 무지와 오류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것은 자신의 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진 덕분이었다는 집을 다시 한 번 더 확중해주고 있다. 그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아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문 틀어다 다른 곳에 뇌무셨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린 내용이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친진하게 아브라함을 그 긴 여행기간 동안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내용,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번성시키셨다는 표현과 그에게 이삭밖에 주지 않았다는 표현은 좀 의심스러운데 이것은 이삭 이외의 다른 이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조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많았지만 그들의 조상만이 훈로 합법적인 상속자의 위치문 차지했다는 점에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한 은혜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에서와 야곱이 쌍동이 형제였지만 그중에 한 사람만 기억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냥 자 지나치게 되었다는 점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그의 형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에서의 경우에 있어서도 야급에 대한 신령한 자비와 선하심이 극찬되고 있는 것은 그의 족속을 하나님께서 특빈하게 선택해 주셨다는 점 이외에는 번로 칭찬할 접이 없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 그는 에서의 배척을 언급한 다음에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표현은 짤막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호의가 풍부하고 명백하게 담겨 있다. 거룩한 역사가는 여러 기적을 과장해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여호수아는 자신들의 구원을 그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음에 틀림없다. 먼저 그는 애굽에서 일어났던 기척들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홍해도강을 통해서 무한한 능력을 보여주신 점을 찬송하고, 또 그들이 광야에서 방랑하던 시절을 지적하고 있다.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  마침내 그는 그들이 자신들의 정착지를 차지하기 전에 있었던 여러가지 승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고 있다. 곧 요단강 건너편은 그들의 기업의 일부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너그럽게 여기셔서 그 지역을 가나안 땅에 합병시켜 주셨으므로 여호수아가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칭송하면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공연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신뢰하면서 무력과 힘에 있어서 월등한 것으로 입중되었을 뿐 아니라 발락이 그들을 잡으려고 놓은 율무에서 보호를 받은 것으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이다.

물론 반역자 발람이 저주를 퍼부었다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의 악의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통해서 패배당하고 만 것을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의 장애물을
치워주신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안내뿐 아니라 오직 그의 능력에 의해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는 뜻에서 모세 오경에서 언급된 내용, 곧 ,적군 을 패주시키는 데  인간의 힘이 아니라 왕벌들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반복하고 있다(신7:20).  이것은 적군이 다른 방법으로 일망타진되고 패주하며 흩어진 것에 비해  훨신 더 두드러진 기적이었다.   사실 예상 밖으로 어려움 없이 승리를 차지하는 자들의 경우 말로는 전쟁의 성과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 처럼 이야기 하면서도 당장 교만한 마음에 눈이 어둡게 된 나머지 자신들의 지혜, 활동 및 용기를 자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경우 성과를 가져 온것은 왕벌들이었으므로 신령한 업적 밖에 드러날 것이 따로 없다. 따라서 결론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칼이나 활로 그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시편 44편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내용인데 어쩌면 이 문맥에서 빌려 온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남들이 수고한 열매를 따 먹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답게 그분을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 ;  여기서 여호수아는 언뜻 정직하고 올바른 지도자로서의 자세를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좇아간다면 그들의 불신앙적이고 가중스런 반역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면서 흉악한 죄악에 빠지도록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이어서 그는 그들에게서 멍에를 벗겨버리기로 작정했다는듯이 그들은 여호와를 섬길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더욱더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허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털어놓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즉시 약해지기는 해도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경우에만 신앙에 대한 열성을 고백할 정도로 자발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기초가 없는 집을 짓는 셈이다.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허약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들을 전적으로 여호
와께 동여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연히 성급한 일로 들뜨거나 민 처음부터 실패 하는 일이 없으려면(8) 깊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이 점을 염무에 두고서 유대인들에게 시험삼아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을 섭기는 문제를 결정하는 자유를 허락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참된 신앙에서 매우 자주 이단한 적이 있는 그들을 충동질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게 무슨 약속율 했다가 당장 파기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호수아의 진의는 이미 하나님을 상대로 맺어진 계약을 새롭게 하고 확중하는 메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한 후에 억지로 동의한 것처럼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인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수치심을 불러인으키기 위해 자신과 자기 가족은 하나님을 계속 섬기겠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16절.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 여기서 우리는 백성들이 남의 말을 듣고 맹세하거나 아부하면서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못된 짓이라는 점을 스스로 밝히고 있으므로 여호수아의 결정에 후회할 점이 전혀 없다는 점을 엿보게 된다. 따라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기로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 계약을 확증하는 일과 큰 관련이 있었다. 이 도답변의 본질은 이렇다. 곧 여호와께서 놀라운 구속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에게 특수한 백성으로 사셨으며, 한결같이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으며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셨으므로 이제와서 그를 배척하고 다른 신들에게 돌아선다는 것은 흉측한 배은망덕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 여기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놀라게 함으로써 그들의 즉각적인 열성을 박살내는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철저한 무기력을 의식하고서 완전히 자포자기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메서 멀어져가게 하려는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하지만 안일한 생각에서 더욱 굽떠 있는 이 백성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이처럼 매정한 방식으로 항의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이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성공을 거두었다는 접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낙망하거나 게으름을 피우기보다는 장애물을 딛고서 자신들이 한견같이 임무륜 수행할 것이라는 점을 용감하게 답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여호수아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제공하도록 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고집세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인가를 설명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기질을 바꾸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도 신명기32장에서, 언뜻 보기에는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을 꼬집고 채찍질합으로써 그들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서두르고 있다. 여호수아는 물론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가 특별히 노리는 것은 그 백성들의 사악한 운행동과 길들여지지 않은 고집이다. 그는 여호와께서 거룩하고 질투하는 하나님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이 없이 불결하고 사악하며, 속된 멸시자들은 하나님께서 화해할 수 없는 분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에 그의 분노만 일으키고 그와 교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악함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
반적인 말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반역적인 기질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다음 절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일반적인 잘못이나 특수한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흉측하게 부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라는 점을 재빨리(9) 대답하고 있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 여기서 여호수아가 지금까지 지향했던 내용이 밝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결코 그 백성들의 마음을 두렵게 해저 참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그의 안내에 자신들을 내맡김으로써 그의 보호 아래 살게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약에 자신들이 불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날 경우 바로 자신들의 양심이 자기들을 고소하며 위증된 자들로 정죄할 것이라는 점(10)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정죄하는 일에 있어서 중인이 될 것으로 말한 것에는 불성실한 점이 조금도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약속율 쉽게 잊어버리고 맡았다는 검은 사사기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곧 그들 가운데 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죽자 그들은 재탈리 갖가지의 미신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오류가 얼마나 다양하며(11) 자신들을 헛된 확신으로 속이면서 자신들의 위선과 우매를 감취무는 속 마음이 얼마나 비물어졌나를 알 수 있다.

"23. 그러면 이제~~~~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  최근까지만 해도 그렇게 미신을 싫어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우상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이방신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여기서 그들의 집에 아직도 우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들 대다수가 남에 대해서는 그처럼 가차없이 처단하는 일들을 스스로 너무 안이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을 뚜렷하게 보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간이 처형된 뒤로 그들이 감히 그런 신성모독으로 자신들의 집을 더럽히려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그들의 실제 습관이 아니라 의향을 꼬집어 하는 말로 보고 싶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거짓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을 내버려야 한다는 당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는 바로 이 장에서 그의 조상들이 강 건너편과 애굽에서 섬긴 우상들을 멀리하라는 점을 권면한 바 있다. 그러나 아무도 갈대아의 우상들이 아직 그들의 보물 상자에 숨겨져 있으며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우상 때문에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적대관계가 생겼던 것으로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 한 분만을 순수하게 섬기려면 모든 우상을 배척하고 자신들에게서 모든 불경건을 제거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12). 이것이 바로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 같다. 곧 이 말씀은 '그분만으로 즐거워하고 만족할 정도로 그분 안에서 푹 쉬며 그분율 사랑하는 데 온 마음을 바쳐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25절. 그 날에 여호수아가~~~~언약을 세우고~~~~" ;  이 문맥은 이 모임의 소집 의도가 계약 갱신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더욱 더 완벽하고 엄숙하게 하나님께동여매는 데 있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이 계약에서 마치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이 백성들이 약속한 충성과 순종을 받도록 임명받은 사람과 같이 행동했다. 그러기에 그가  그들 앞에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다는 점이 설명형식으로 덧붙여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가들 가운데는 이것이 여호수아의 새로운 연설과 관련되는 것으로 곡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율법으로 이해해야 옳다. 곧 여호수아는 그들이 그 율법을 꾸준히 지켜야 한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계약 조항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이미 자신들이 과거부터 받아들이고 고백한 가르침을 확인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말라기도 그들이 하나님의 멍에를 계속 짊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모세의 율법을 명심해야 한다는 접 이외에 다른 요구사항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만4:4).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기록하고~~~~~" ;  이것은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공적인 기록사항을 번째 곁에 있는 책에 기록했다는 말이다. 율법이 낭독된 때마다 이 계약도 같이 선포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단 기록된 것은 마냥 단혀진 책으로 남아 있는(15)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항상 사람의 눈에 보이는 무엇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소 겸 법케 아래 있는 물이었다. 물론 이것은 법케가 항상 그 위에 얹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앞에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날 때마다 이미 그들이 맺은 계약에 대한 중거나 기념이 그들 눈앞에 나타남으로써 그들의 신앙율 더 잘 고수할 수 있었다.  

 

여호수아는 돌이 말을 들은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물론 이것은 과장법이지만 신령한 말씀의 효력과 능력을 표현함에 있어서 부적절한 표현만은 아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이 무생물인 바위와 돌들까지도 꿰뚫기때문에 만약에 사람들의 귀가 먼다면 그들에 대한 정죄 내용이 삼라만상을 통해서 울려퍼질 것이라는 말이다. '배반하다'는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환하고 기만적으로 행동하며, 일단 맺어진 약속을 묵살하고 파괴하는 행동을 뜻한다. 어느 누가 그처럼 확고하게 맺어진 계약이 수백 년에 걸쳐서 후손들에게 확고부동하고 거룩한 것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처럼 노심초사하게 얻어낸 모든 내용은 겨우 몇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29. 이 일 후에~~~~~~" ; 동굴 무덤을 쌓는 것은 존경한다는 표시였으며 백성들의 애정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존경이나 애정은 결코 그 뿌리가 깊지 못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 그룹 여호와의 종으로 부르고 있지만 곧이어서 그들은 비참하게도 그들 가운데에서 기적을 행하신 여호와를 곧 멀리하고 맡았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그의 동년배 장로들이 죽기까지 그들이 여호와를 섭겼다는 말에는 그들이 지조가 없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말없는 대조가 답겨 있으니 그들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믿어져 갔다는 말이다. 그리므로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의 종률에게 타십하고 뚜렷한  배무실 동안에는 그들의 권위를 통해서 교피의 질시와 상태가 보조받고 유지녀지만 그들이 죽고 나면 갑자기 비참한 파괴가 시작되며 눈에 보이지 않던 모국행위가 제멋대로 난무하는 것은 긴코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16),


"32. 이스라엘 자손이~~~~~~요셉의 뼈를~~~" ; 야곱의 유골이 강사된 시기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률이 이 임무를 수행한 것은 그들이 세겜성에서 평화롭게 삼기 시작한 이후였을 것이라는 접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인은 특면한 동균을 지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의 유관을 야급이 산 땅에 매장하는 것을 존경의 표로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요셉이 아직 적기에 묻혀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묻힐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 백성들의 궁품을 비난하는 말이기도 하다. 스데반은(행7) 일 두 학부장들의 유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다른 부족들도 경쟁심에 이끌리 조상률의 유래를 긁어 모았
을 것으로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거기서 그 땅이 아브라함을 동태서 구입된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 실수로 이름이 바뀐 것 같다. 동굴 무덤이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강차 부환에 대한 타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