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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4)

1. 성경 (엡4:7~ 14)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7)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8)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9)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1)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2)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3)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7. 우리 각 사람에게~~~~”: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상호 연합을 유지시키시고 보존하시는 방법과 또 다른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만족함과 충만함을 누릴 수 없는 그러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만족을 아무에게도 모두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만족은 각 사람에게 일정하게 주어진다는 것이 분명하다. 충만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오직 각 사랍이 서로 교통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 4절에서 은사의 다양성을 말하는데, 다양한 은사들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을 가르침에 있어 그것은 신자들 조화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의 조화를 강화하고 촉진시켜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귀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은사를 다 허락해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각기 일정한 은사의 분량을 받았으므로 우리에게는 서로서로 돕는 것이 필요하며 각기 개인에게 주신 것을 서로 나누어 갖고 도와주어야 한다'은혜 와 '은사 라는 말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슨 은사가 되었든지간에 그 은사로 인해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이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깊은 책임을 가지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들을 주시는 자라고 하였다. 바울은 앞 절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와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모아서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종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여 준.

 

"8. 그러므로 이르기를" ;  바울은 자기의 논조()에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이 귀절을 인용하였는데,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악한 자들은 성경의 참뜻을 거부하기 위하여 바울을 공격한다. 더우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과를 보다 합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정당화하기 위해서 고의적인 악한 의도를 가지고 이 커절의 본래 의미를 왜곡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을 다윗 혹은 백성들이 말한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윗이나 혹은 백성들이 왕위에 오를 때 많은 승리가 일어났고 자기 원수들의 정복자가 되었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편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 말씀이 엄밀하게 하나님께만 적용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전체에는 다윗이 자기에게 주어진 승리를 하나님께 돌리는 위임(epinicion)의 성격이 들어 있다. 다윗은 자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의 경우에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놀라우신 사건이 자신을 거쳐서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다윗이 말하고자 한 점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권세와 인자하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다른 곳에서 언급하기를 '주께서 위로 오르셨다 고 표현했다. 육적인 사랍들은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심판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게으른 잠이나 주무시고 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 육신의 생각으로 판단한다면 하나님이 어느 정도 묵묵하신 것 같지만, 그가 구원의 손길을 펴시고 원수를 갚으실 날에는 급기야 일어나셔서 그의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매우 일반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에서 교회의 구원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윗이 자기의 승리를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승리로 알고 찬송했는데, 그가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 오르신 것을 그리스도의 위격에 연관시켜서 매우 적절하게 이 귀절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거두신 승리 중에 가장 위대한 승리로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시고 사단과 죽음을 정복하신 후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절정의 순간을 맞이한 것은 그가 하늘에 오르셔서 영광스러운 통치를 시작하신 때였다. 바울은 이 인용 귀절에서 다윗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고 의미를 파악해 냈다고 하는 데든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실재로 계속됨을 바라보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할 만한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자기에게 복종시키고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수호자가 되겼다는 것이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로잡힌 자 란 사로잡힌 원수들을 가리키는 집합명사이다따라서 바울은(이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원수들을 끌어내려 복종시키는 것을 단순히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사로잡힌 바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과 죄와 죽음과 모든 음부를 굴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 육신의 오만불손함을 을 쳐서 복종케 하시려고 매일매일 순종하는 백성이 되도록 직접 역사하고 계신다. 반면 그리스도의 원수들(즉 모든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분노를 자신이 허락한 한도 내에서 억제시키고 그들을 쇠사슬로 잡아맨다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는 좀더 어려운 문제가 따르고 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선물들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바울은 그것들을 '주셨다 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정반대 의미로 번역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금도 애매한 점이 없다. 바울은 성경 귀절들을 정확하게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그 귀절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귀절이 바로 그 실례이다. 지금 다윗이 말하고 있는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이 받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시편에서는 조금 성급하게 전쟁에서 대앗은 물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분열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목적은 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말을 많이 반꾸었으나 그 의미는 하나도 멸쳐버리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바울은 위도적으로 말을 바꾼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시편에서 단어를 취해 온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형편에 맞는 자기 자신의 표현 방법을 사용했다. 바울은 예수님의 숭천에 대한 몇 가지 말씀을 시편에서 인용하면서 자기 자신의 말인 '선물을 주셨다' 는 말을 첨가하여 작은 것과 큰 것의 관계를 이끌어내고 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승천하신 하나님이 이전까지의 교회의 승리들보다 훨씬 더 큰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정복자가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선물을 값없이 나누어 주는 것은 패전한 사람들에게서 전리품()을 약탈해다가 나누어 갖는 것보다는 월씬 훌륭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이다. 바울은 시편에 나오는 이 귀절을 간략하게 지적함으로써 시편에 없는 것을 첨가시키는 자유를 스스로 허용하고 있다고 보는데, 내 판단으로는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인 것 같다. 이것은 실로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다윗이 옛날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열거했던 것 보다도 더 뛰어나고 놀라운 것이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 여기서도 바울을 비방하는 무리들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쓸모없고 유치한 것이라고 비평하면서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승천이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 그 무리들은 말하기를 '올라간다 는 말이 비유적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바울희 결론은 '그가

먼저 내려오셨다는 것 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한다나는 바울이 여기서 선지자의 말씀에 필수적으로 나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논리척인 방법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고 답변한다. 바울은 다윗이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로 말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가 이제 올라가셨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잠시동안 겸손해

지셨음을 암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바울은 정당하게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비우셨을 때보다 더 하나님께서 낮아지진 때가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낮아지사 멸시를 당하신 것처럼 보이신 후에 자기 자신을 지극히 높이 올리신 때가 있었다면 그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연약함 가운데서 일어나사 하늘의 영광을 받으신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잠시라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로마서 10 6절에서 모세의 글을 빌어 차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려고 단지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부당하고 격에 어울리지 않게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위격에 적용시켰다고 해서는 안된다. 시편의 마지막 부분은 그가 말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여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른 것을 말하치는 않았더라도 이 말씀 속에는 이방인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 들어 있.

 

"땅 아랫 곳으로~~~~~" ; 어면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 말씀이 림보나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현재의 생활 상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증은 너무나 빈약하다. 이 귀절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 땅의 어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이 아니라 이 땅 전체와 하늘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높으신 처소로부터 우리의 깊은 심연으로 내려오셨다. 는 것이다.

 

"10. 모든 하늘 위에" ;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의미는 들이 피조된 세계 위에 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말할 때 그가 우주 공간이나 별들의 세계에 계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늘이란 모든 우주 공간보다 더 높은 곳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신 후에 계시는 곳이. 엄격하게 말해서 이곳은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 우리들의 방법을 자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하늘 위에',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라는 표현은 같은 의미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위에 혹은 하늘에 계신다고 할 때, 해와 별들 아래 있는 모든 경계선, 그리고 모든 가시적 세계()의 형태 아래 있는 것들이 제외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 . '충만케 한다. 는 말은 종종 '완전케 한다. 는 의미를 가지는데, 여기서도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물을 통치하며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결코 완전하게 일치되지 않는 이 두 현저한 모순점을 연결시키려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매우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셨다는 말을 들을 때 순간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뗘나가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의 살체를 인간적인 상황에서 본다면 그가 멀리 뗘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인 모습에서 볼 때는 우리에게서 뗘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영적인 능력을 통해서 만물을 충만케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역사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속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3 :21) 속박됨이 없으신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계신다는 것이다우리는 이 귀절 속에 모순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분명히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러나 작은 공간 속에 형식적으로 임재하신 그가 하늘과 땅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전에는 하늘과 땅을 충만케 하지 없으셨는가? 그의 신성()으로 볼 때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이전에도 모든 것을 충만케 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나라를 소유한 후와 같이 자기의 영적 권능을 행사하지 않으셨고 자기의 임재를 나타내시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 : 39).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16.7). 이은말씀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기 시작하실 때부터 또한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를 시작하셨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언급했던 은혜 시대에로 돌이켜 앞에서 간략하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게 말하기를, 마치 여러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이루둣이 이러한 다양성 등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되게 함을 성취시킨 다고 하였다. 바울은 말씀의 외적인 사역의 유용함을 말한다. 복음이란 이러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파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주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서 세우신 실리적인 원칙이며,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완전하게 전파될 때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라 고 하였다바울이 성령의 은사들을 말하면서 은사 대신에 직분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는 언제든지 그 직분에 연결되어 있는 은사들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도나 목회자를 세우질 때 고 사람들에게 외면적으로만 자격을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사들을 주어서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세로 말미암아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자는 공연하고 무익한 칭호만을 가지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사명과 직분을 동시에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이제 다음의 말씀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1.  그가....주셨으니" ; . 바울은 먼처 교회는 말씀의 선포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사람의 창설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 +. 사도들은 자기 시스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택함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참된 목회자들은 자기 자신을 과신GB를 하여 자기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한다. 요컨대 바울은 교

회의 통치가 말씀의 사역에 의해 이루어지며, 사람의 계획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우리가 침범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섭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이 사역을 대적하고 멸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이 사 역의 창설자가 되심을 대적하는 자요,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이 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직분을 주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세우 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직분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시지 않으면 매우 다른, 성별된 * 직분에 아무도 적합하거나 비숫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 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사역들은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있어야 할 은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은사이다. 자기들에게 맡겨 진 의무를 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무를 행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 다. 온를리하지

 

"혹은 사도로" ;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이름과 직분을, 또 다른 사랍들에게는 또 다른 이름과 직분을 주어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항상 () 지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지체들의 다양성을 말함으로써 경쟁 의식이나 부러움이나 야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주어진 은사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은사들을 사용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만족케 하는 데 사용하게 되며, 보다어 큰 은사를 부러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는 어떤 것이 되었든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직분에 대해서는 이미 고린도 전서 12 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 귀절의 해설에 필요한 것만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다섯 가지의 직분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면 사람들은 마지막 두 가지 직분은 한 가지 직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밝히지 않더라도 이 해석은 내게 있어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나는 '사도 라는 말에는 일반적 의미나 어원에 따르는 의미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셔서 높은 영광을 받는 지위에 올려 놓으셨기 때문이다. 사도는 열두 명이 있었고 바울이 후에 추가되었다. 이들은 온 세상에 복음의 교리를 선포하고, 회들을 세우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직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맡겨진 교회는 그들 자신의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는 공통적인 명령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사도와 비숫한 직분을 가진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 인데, 도보다는 그 지위가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디모데와 그와 비숫한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문안에서 디모데와 같이 동역()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면서도 자기와 동급()에 있는 사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도라는 이름이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것

으로 보았다. 주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사도를 돕는 자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사도들보다는 좀 못한 다음가는 지위로 본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류()에 바울은 '선지자 를 덧붙이고 있다. 이 이름은 아가보의 경우와 같이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가리킨다고 어떤 사랍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커절은 가르치는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전서 14 장의 경우와 같이 자기들의 손에 쥐어지 것들, 즉 주어진 예언들을 계시의 독특한 은사로 두드러지게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예언하는 은사가 가르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한, 예언하는 은사를 제외할 수는 없다대개의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 는 하나의 직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왜냐하면 여기에는 다른 귀절처럼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이접 접속분사()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는 바울 사도가 목사와 교사를 하나로, 그리고 같은 순서로 차등이 없이 말했다면 이 해석에 부분적으로 찬동한다. 나는 또 교사라는 이름이 다른 어면 귀절에서는 모든 목사에게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직분이 하나라고는 보고 싶지 않으며, 서로 다르다고 본다. 가르치는 것은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데는 성경을 해석하는 특별한 은사가 있기 때문에 바른 교리가 유지될 수 있는데, 교사 중에는 복음 전파에 부적합한 교사가 있을 수도 있.

 

내가 보기에는 목사란 특별히 양 무리를 돌보는 일이 맡겨진 사랍이라고 생각된다. 목사를 교육하고 온 교회를 교훈하는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관장하는 또 다른 교사가 있다는 것을 인한다면, 나는 목사들이 교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반대할 의사가 없다. 때로는 목사가 교사일 수도 있지만 그 직책(facultates)은 서로 다르다.

또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직책들 중에 마지막 두 직책은 영구적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산도들이나, 복음 전파자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신앙이 무너진 교회의 외적 질서(extra ordinem)를 바로 잡기 위하여 그들이 잃어버렸던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잠시적으로 사용하신 직책들이다. 사와 교사가 없으면 교회를 다스려 나아갈 수가 없다.

 

교황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자랑하고 있는 대감독직이 여기에서 논박을 받고 모욕을 당하는 데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의 초점인 것이다. 바울은 이 직책을 우리 가운데 세운 이유뿐만 아니라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까지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의 통치에 대해서 길게 말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대감독직을 하나의 자리로 알고 있었다면, 마당히 모든 지체들을 주관하는 한 목회자의 지위를 밝혀줌으로써 우리들을 기꺼이 그 직책 아

래서 하나가 되도록 불러모으지 않을 수 없잖은가? 분명히 바울의 통찰력이 가장 타당성이 있고 힘았는 논증에 벗어난 것이 있든지, 아니면 우리가 대감독직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이 아닌 것으로 알든지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위에 계시는 분이요. 모든 사도들과 목사가 오직 그리스도께만 예속되어 있다고 말 할 때 사실상 이 가상적인 대감독직을 분명하게 타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직분들은 서로서로 동료요, 친구 관계에 있는 것이. 이 땅에서 하나의 머리를 주장하고 있는 포악한 전체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성경귀절이 여기서보다 더 강력하게 배척하고 있는 곳은 없다. 키프리(Cyprian)은 바울을 본받아 교회의 합법적인 군주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고 명확하게 정의했다. 그는 개개인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것을 총괄(in so-

lidum)한 하나의 감독직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감독직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 직책을 개개인들에게 분담시켰고 다른 사랍보다 자기를 더 높이지 못하도록 천거하도록 했다.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 나는 이 귀절의 번역에서 에라스무스를 따른다. 그 이유는 그의 견해를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독자들이 그의 번역과 벌게이트 역본이나 나의 번역을 비교할 때 1좋게 여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벌게이트 역본은 'consummationnem (온전함)이라고 번역했다. 이 말이 헬라어로는 cataptionos(카타르티스모스)인데,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균형이나 조화를 가져야 할 것의 상호 적용(coaptationem)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마치 사람의 몸과 같이 적합하고 규칙적인 지체들의 연합이 있어서, 이 말은 '완전 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정확하고 순서 있는 배열을 나타내고자 의도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구성 (constitutio)이라는 말로 사용한다왜냐하면 라틴 사람들은 혼란한 곳이 질서 있고 합법적인 상태가 되어질 때 조직체로서의 국가나 나라 또는 왕국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하나님께서는 만일 하시려고만 한다면 자신이 직접 이 일을 하실 수가 있음에도 이 일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면 '사람의 역사가 없이는 교회가 조직될 수도 없고 잘 다스려질 수도 없는? 라는 반론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바울은 봉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바울은 이제 '성도들의 조직체 라고 말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고 말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우리의 참된 완성과 완전은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어지는 데에 있다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명하실 때 그 사역의 결과를 말씀하심으로써 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올바르고) 완전한 기초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고귀한 하나님의 일이기에 말씀의 외적인 봉사에 의해서 성취되어진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 커절을 보게 될 때 이러한 방법을 게을리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기를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자들은 미친 사람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해진다. 광신자들은 자신을 위한 성령의 은밀한 계시를 추구하 교만한 자들은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교회의 일반적인 봉사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있다.으 을들(이 오남시대사이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세워진다고 한다면 교회는 역시 그가 예언하는 방법대로 제워질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명력에 따라 우리가 사도들에게 다스림을 받고 가르침을 받을 때 외부적인 복음 전파가 없이는 전혀 하나가 되어지거나 완전해질 수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높거나 낮거나 어떤 사람에게든지 미치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교회는 왕이든 평민이든 주님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다스리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공통된 신앙의 모체이다. 이 질서를 게을리하거나 멸시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보다도 더 현명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그들의 교만함이여서 꺾어질지어다 : 우리는 인간의 도움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완전하게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시는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영광이다. 그리고 하나 되 하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반적인 교훈대로 우리를 불러모아 한 지도자의 표준을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13.. 우리가 다." ; 바울은 이제 처음에 말했던 봉사의 칭찬으로 되돌아간다. 바울은 이미 사람들의 봉사로 인해서 교회가 다스려지며 질서가 유지되고, 따라서 모든 면에서 완전해지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것이 그 시대에만 필요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것이 끝날까지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바울은 봉사의

밀요성이 마치 예비 교육(pacdagogia)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영구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광신자들은 봉사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는 그 즉시로 무익하게 되어진다고 꿈꾸고 있다. 교만한 사람들은 우리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적당한 수준을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멸시하면서 그 이상의 것을 알려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다 채워질 배까지는 이 봉사하는 과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만 주로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부고러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봉사의 책임을 교회에 맡기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그러면 믿음에 하나가 되는 것이 마땅히 우리의 모든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하나가 되게 할 정도까지 완전하지는 못하다. 우리의 본성()은 연약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서로 가까와지도록 함써야 하고, 또 모든 사람은 함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해야만 된다. '하나가 되어 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도 바라고 있으나, 이 육신을 가지고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의 가장 밀접한 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들의 이 육신 속에는 항상 무지와 불신앙이 수없이 포함되어 있어서 완전에 도달할 수가 없다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  이 말씀은 믿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무엇이 참된 신앙의 본질이며, 참된 신앙은 어느 때 존재하는가 할 때, 하나님의 아들을 깨달아 알 때가 참된 신앙이 존재하는 때임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만을 의지해야 하며, 그에게서만 온전한 안식과 쉽을 얻는 것이다. 만약 이 이상의 것을 바라게 되면 믿음은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은 벌써 믿음이 아니고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알거나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이 ~~~~" ; 말씀은 앞의 말씀과 동격으로 보아야 한다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완전함인가? 그리고 왜 그렇게 완전해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충만함이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땅히 찾아야 :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든것이 해로운 것이며 멸망케 하는 것들이라는 사상이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가 되어져야 할 것이다. 어면 사람이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이다.  * '장성한 분량 이란 충만한 혹은 성숙한 나이를 의미한다. 이 말 속에는 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장성에는 늙음이 없기 때문이다. 장성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늙어지고 쇠잔해 간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의 활력은 계속해서 장성해 감을 의미한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 ; 바울은 우리들이 우리의 생활 전 과정의 일관된 목표를 온전히 장성한 세대까지 삼아야 한다. 고 언급함으로써 지금부터 우리가 이 진보 과정 가운데 있으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린아이와 성숙한 어른과의 사이에 시대적인 간격을 두고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아직도 주의 길에 발결음을 내딛지 못하고 여전히 주처앉아서 자기들이 어뗘한 길을 택해야 할는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요, 한때는 어면 방향을 택했다가도 해매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항상 의심이 가득차 있어 요동하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들은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다 할 지라도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등력을 가지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가장 좋은 분으로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에 철저하게 기초를 잡고 계속해서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 항상 자기들에게 맡겨진 상태를 기대하고 있는 신자들의 생활은 청년과 같이 왕성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결

코 사람(어른)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어린아이의 상태를 넘어서 자라나지 아니하고서는 다른 한쪽 끝에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난 후에는 장성하여야 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이해력을 가져서는 안된다. 따라서 사제들이 평신도들을 완전히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볼 때 이 교권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기독교가 어뗘한 류의 것인지 밝히 드러나게 된다.

 

"모든 교훈의 풍조" ;  바울은 멋진 비유를 사용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의 단순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인간들의 모든 교훈들을 '풍조 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 뿌리를 굳게 내리면 요동치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고안해 낸 모든 교훈의 풍조로 우리를 곁길로 가게 하려 하고 있다바울은 '사람의 궤술 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때,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불의한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을 하게 되면 결코 그들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이단이나 불의한 무리들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은 경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의 거짓으로 그리스도의 순전한

교훈과 이러한 싸움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해야 할 바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훼방하여 어둡게 하기를 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모든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손쉬운 치료약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서 배운 바 그 교훈으로 전진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결코 아무에게나 주는 위로가 아니다. 합계 이 귀절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에서 모든 확실성을 제거해 버리고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믿음의 확고함을 부정하게 만드는 교황주의자들의 사악함이 얼마나 큰 것이고 잘못된 것인가는 분명해진다. 그들은 어면 사랍이 의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상의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자기들의 정한 규범만을 따라야 한다.

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과 선지자와 복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바울이 선포한 바, 즉 사람의 모든 케술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실로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 오지만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에서 건전한 교훈을 구해야 한다는 점을 나는 시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건전한 교훈을 지키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교회라는 구실 아래 참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매장서키려 한다면 이것은 그들이 마귀와 같은 회당(습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수는 내가 '케술 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kupeia(큐베이아)란 말은 많은 속임수와 함정을 사용하는 악한 운동 선수를 가리키는 말에서 나왔다. Taxuoupria(파누르기아)란 말은 사단의 사역자들이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술에 익숙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멎에 결리게 하기 위해서 망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고또 더욱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얻는 유익을 부지런히 따르게 하려는 것이고 우리의 게으름에 대한 준엄한 형벌을 면케 해주며, 우리의 원수들의 덫에 빠져들지 않게 하려 함에 있다.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두 가지 두드러진 비유로 주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서기를 주저하는 사람을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는 망망대해에서 파도에 휩쓸려 제 갈 길을 지키지 못하고, 기술이나 모형에도 불구하고 폭풍우에 밀려다니는 작은 쪽배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바랍이 불어올 때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때로는 바람과 마주칠 때 검부저기나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다른 물건에다. 비교하고 있다. 래서 나는 이렇게 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에 그 기초를 둘 수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마땅한 심판의 선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믿음은 사단의 모든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이 서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