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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

1. 성경 (엡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17)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8)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19)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0)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1)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2)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정하여 놓으신 조직에 대하여 말한 다음, 이제는 자기가 가르친 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맺혀져야 할 열매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교리의 얽매임으로부터 뛰쳐나와야만 하는 교훈의 성격을 짤막하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먼저 불신자들의 허망함을 들어서 역()으로 그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고 구원의 교훈에 의하여 조명()을 받은 사람을 허망한 것을 좇으며 한 번도 진리의 빛을 받아보지 못한 불신자들이나 소경과 다를 바 없는 이들로 여기는 것이 매우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주고 있는데, 믿는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 된 것은 공연히 된 것이 아님을 그들의 생활로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권면을 보다더 진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만약 이 교훈을 멸시하면 언젠가는 그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방인이 ~~~~행함 같이" ;  바울은 이방인을 아직도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들은 본질상 잃어버린 바 되었던 사랍이나 정죄받은 사람과 같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불가결한 요소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이방인의 비참하고 형편없는 상태가 너희들로 하여금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고 있다.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그 차이점의 요인들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앞에서도 보았둣이 바울은 불신자의 마음을 그 허망한 것 때문에 정죄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가리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이 허망하다고 말한다. 마음은 사람의 생활 가운데 가장 수위()에 있는 것으로서 이성의 거처이며, 의지를 관할하고 사악한 욕망을 억제시켜 주는 기능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르본느 학파(Sorbonne)의 신학자들은 마음을 인간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바울은 마음을 허
망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바울이 그 점을 강조해서 말할 의사가 없었다면 '디아노이아' 란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말은 사상(cogitatio)을 의미하고 있기는 하지만 단수로 사용되면 기능 그 자체를 의미한다. 플라토는 그의 책 <공화국>(Republic) 제 6권 마지막 부분에서 마음이란 '노에=시스 카이피스티스 /이해와 신용' 사이에 있는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나치게 기하학적으로 국한시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 귀절에서 적용할 수는 없다. 바울은 앞에서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지금은 그들이 심지어는 가장 귀중한 문제에 대하여 논증하는 데 있어서도 소경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사람들은 이제 자유 의지에 기울어져서 자기 마음을 자랑하고 있으나, 여
기서는 이것이 치욕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험은 이 견해를 두드러지게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만큼 소경도 아니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허망한 존재도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영적인 생활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해서 언급할 때 마치 하나님의 나라에서와 같이 인간의 이성의 빛
으로 전혀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의 판단방법(3)을 보여주기 이전에는 인간 이성의 통찰력은 소경에 불과하며, 이성이 무르익게 되면 영적인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참된 이성의 원리는 마치 섬광처럼 빛난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르게 사용되기 전에 벌써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예를 들자면, 모든 사람들은 절대자가 계신 것과 그에게 경배해야 할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속에 있는 죄와 무지()로 인해서 이 지식이 혼란을 일으켜 곧 우상에게로 치우치게 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경배하다가도 도중에서 곁길로 나가 제 1계명을 거역하게 된다.두번째로 대립은 우리들의 판단이 외부적인 행위에서 볼 때는 실제로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하고 있는 것 같으나 모든 죄악의 원천이 되는 세상 욕심이 우리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단순히 모태에서부터 소경이 된 자연적인 소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눈이 먼 고질적인 소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성과 이해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면전에서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자기들의 목표와 행위에서 방황하고 넙어지면 미끄러지게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거짓과 허망의 깊은 골짜기와 무지의 미로GK)에서 뛰쳐나올 때 이것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고 어뗘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해준다.


"18.  무지함.....말미암아" ;  우리는 여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혼의 참된 생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영혼의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 무지가 우발적인 죄라고 믿어서는 안된다(철학자들은 실수란 다른 곳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바울은 무지의 근원이 자기들 마음의 눈이 멀었기 때문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또 바울은 이것이 인간들의 본성이라고 한다. 첫째로 사람의 마음의 눈이 먼 것은 원죄에 대한 형벌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한 이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진정한 빛을 배앗기고 말았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진정한 빛이 없는 곳에는 오직 두려움에 찬 암흑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  '하나님의 생명' 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요 12 : 43의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의미) 생명으로 간주되어진 생명이거나 하나님께서 중생의 영으로 말마암아 자기가 택하신 자에게 전해 주신 생명을 가리킨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그 의미는 같고 다른 점이 없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일상 생활은 공허한 생명의 형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쉽게 지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 해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아니하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 가지 단계의 생명이 있다. 고 알고 있다. 첫째는 움직임과 감각적인 의미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보편적인 생명으로 짐승들도 함께 가지고 있는 생명이다. [둘째는 아담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명이다. 세째는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신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들은 어느 것이든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은 사도행전 17 장 28절에 나오는 그의 설교에서, 첫번째 생명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다. 시편 104편 30절은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다. 욥기 10장 12절은 두번째 생명에 대해서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자들의 중생이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불리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완전하게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이 생명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
리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한 어떻게 우리 스스로 우리들의 생명을 쟁취할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이 귀절에서 도덕적 미덕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생명이 어떤 행위에서 오는 것인지, 바울이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고서는 올 수 없다고 확언한 생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  우리는 어뗘한 선을 행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롭게 되어져 야 한다. 이것이 생명을 얻는 진리의 시작이요, 따라서 활력에 차 있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  바울은 자범죄에 대해 모든 악 중에 서 가장 나쁜 것이라고 이르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되고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스스로 모든 불의에 자신을 내어놓고 만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부패하여 악을 행하는 데로 기울어져 있 다. 진실로 우리는 전적으로 죄악을 범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 은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지고 사슬이 느슨해져서 계속 공격을 받으면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양심을 찔러서 열매를 맺도록 해주시지만, 그들은 오히려 모든 훈계들을 듣지 않고 마음이 굳어진다. 이러한 완악함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고야 만다. 그 버림받은 표시는 우리들이 말한 무감각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 할 때에는 어뗘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도 무디어져서 두려움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여 자신에게 아첨을 하는 노예가 된다. 

 

저들은 수치를 느낄 줄 모르고 자기 자신들의 염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돌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범죄한 양심의 고통은 지옥의 현관에 당도한 죄인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에 비교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의 안일함과 게으름은 무시무시한 지옥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데 비교될 수 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잠18 : 3  4)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가 실례를 바로 보여주고 있다. 이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들, 즉 그들의 양심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짐승과 같은 격렬함으로 모든 죄악에 내던진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것이다. 이 형벌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최후의 환난 속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많은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그 형벌을 억제하고 계신다. 

 

그 결과로 공공연한 죄악의 욕망이나 억제할 수 없는 무절제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specu-lum) 현재의 어떤 사람들의 생활에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탕..." ; 나는 하나님의 영으로 통제되지 않을 때 육체의 무절제와 방종으로 생활하는 변덕스러움을 방탕이라고 생각한다. '더러운 것 은 모든 종류의 죄를 전체적으로 가리킨 말이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욕심으로 라고 말한다. 이 말이 헬라어로는 때때로 탐심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방탕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나 매우 부적합한 해석이다. 타락하고 사악한 욕망은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욕심 이라는 말을 절제와 반대가 되는 의미로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반대가 되는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경건한 사랍이 자신을 이방인의 부정과 혼동해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이방인들은 어둠 가운데서 걷고 있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 세상의 감각적인 허망한 것으로 자기 생활의 규범을 삼은 자들이 혼히 어리석은 욕망에 빠져드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은 우리의 자연적인 성품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육신의 절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중 성구
바울은 또 교인들의 진지한 관심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르쳤었다. 고 더욱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자기가 이 교훈을 가볍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말하며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 이 귀절에서 바울은 곧 사라져 버리는 복음에 대한 지식을 꾸짖고 있다. 이러한 지식은 생명이 새롭게 되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득차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장 현명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
지 지식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참되고 순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되고 날조된 지식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만 육체적인 것밖에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 5 :17)고 말한 것과 똑같이 여기서도 육체에 대한 절제가 수반되지 않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참되고 신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22. 너희는 유흑의 욕심을 따라"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회개 또는 삶의 새로움을 요구하고 있다. 바울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옛 사람을 버리라, 혹은 벗어 버리라고 요구한다. 바울은 종종 의복을 비유로 사용하고 있어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비유를 볼 수 있다(5). '옛 사람 이란 로마서 6장과 또 다른 곳(효 6)
에서 배운 것처럼 우리가 모태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자연적인 성품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두 가지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아담과 그리스도에게서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처음 태어날 때 그로부터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것을 옛 사람이라고 부른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죄악된 성품이 고침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새 사람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옛 사람을 벗어버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품을 포기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옛 과 '새 라는 말을 구약과 신약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은 그룻된 철학자들에 불과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 권면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들의 옛 생활을 기억나게 해준다.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의미는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너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전에는 옛 사람이 너희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옛 사람을 몰아내기 원한다면 너회의 이전 생활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썩어져 가는~~~~~" ;  바울은 옛 사람을 그 열매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부패한 욕망을 들어 옛 사람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썩는다 는 말을 '구습'과 연결시키고 있다. 구습(쫍)은 썩어지는 것의 다음 관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대로 교황주의자들이 오직 총체적()이고 가시적()인 것만을 원하는 악
한 욕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던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욕망이나 궤교나 또는 자기애(), 아니면 불신앙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들을 말씀으로 이해하게 될 때에는 때때로 책망 대신에 칭찬을 받기도 한다.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 규범의 부분은 자기 자신의 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으로 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나는 이 말씀을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분명하게 죄가 되는 야비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가장 고상하고 탁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영혼의 욕망에서도 새로와지라는 것이
다. 바울은 또 여기에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칭송하고 있는 마음의 여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의 심령과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마음을 낳게 해주는 하나님의 영 혹은 하늘의 영과의 대조가 함축되어 있다. 이 귀절에서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듯이 건전하고 부패되지 않은 마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을까? 우리의 이성이 새롭게 되어야만 마음이 현저하게 변화될 수가 있고,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

 

"24.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만약 의를 일반적으로 정직과 같은것으로 본다면, 거룩은 이보다 더 우월한 의()일 것이다. 우리는 순결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나는 거룩은 율법의 첫째 부분에 해당되고, 의는 둘째 부분에 해당된다고 구분하고 싶다. 사가랴는 이렇게 노래했다.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그를) 섬기게 하리라"(눅1 74,75-한글 개역 성경에는 75절뿐이다-역자 주). 플라토를 바로 가르치기를batorns(호시오테-스 : 거룩)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속에 들어 있는 의로서인간들에게 관계되어 있다고 했다. '진리의 라는 말을 소유격으로 해서 부우리가 하님과 함께 행하여야만이 하나님을 속이고자 하는 구실을 만들지 못하기 :문이다.

 

"새 사람을 입으라." ; 우리는 이 말씀을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은 단순증영으로 혹은 내적()으로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뗘한 죄,미치지 못하는 부분으로 여겨지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적으로 새롭i되라 고도 해석할 수 있다. 창조에 관해서 말한 것은 사람의 처음 창조공가리킬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회개를 가리킬 수도 있다이 두 견해는 모두 다 옳다. 아담은 처음 창조될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상은 죄로 말미암아 지워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지지 아니하면 안된다. 경건한 사람의 중생이란 실로 고린도 후서 3장 18 1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이 두번째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능력은 첫번째보다 훨씬 능가한다. 성경은 우리들의 최고의 완전함이 오직 하나님께 -종하고 그를 닮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그가 본래 받았었던 형성을 잃어버렸으므로 그 형상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어지사의 위치에다 둔 것은 진리가 의와 거룩에 모두 결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신실하게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나때히도게를+창형지절:재복상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중생 안에 들어 있는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우리가 창조된 본래의 하나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