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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데설로니가후서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살후3:13)

1. 성경 (살후3:10 ~ 15)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0)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1)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2)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3)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4)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1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  시편에는 "내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시 128 2)는 말씀이 있고 잠언에는,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 4)하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기력과 게으른 행동을 저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우기 인간이 활동하도록 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의 증거일 뿐 아니라 자 연법칙이 이방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사도의 명령에는 그가 당사자들에게 이 명령을 내렸다는 뜻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인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음식을 줌으로써 그들의 무기력을 조장하는 것을 금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또한 일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산업국가사를 돌보는 일, 공사간의 업무를 맡는 일, 상담, 가르침, 기타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을 일정한 직업이 없는 것으로 볼 수 는 없다. 여기서 바울이 꾸중하고 있는 사람은 비활동적인 게으름뱅이들, 곧 자기들은 예배당에 앉아서 자신들의 권태감을 감추려고 노래하는 것(chant) 외에는 빈둥거리면서 막대한 대접을 받는 「수도사들과 사제들처럼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공동 선에 대해서는 전혀 기여하지 않으면서 남의 땀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것은 플라우투스(Plautus)의 말대로, '음악적으로 사는 것'이다
 
"11. 우리가 들은즉." ;  이런 종류의 게으름뱅이들이 우리의 현재 게을러 빠진 수도사회의 기원인지도 모른다. 유사 이래로 신앙이라는 구실 아래 남의 식탁에서 배를 채우거나 소박한 사람들의 생계비를 교묘하게 횡령해온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 어거스틴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어찌나 판을치고 있었던지 그는 이 게을러 빠진 수도사들을 비난하는 책을 따로 쓰지 않 올 수 없었다. 그 책에서 그는 이 사도의 경고를 비웃으면서 약하다는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거룩한 것처럼 뻐기던 이들의 거만성을 고발하고 있다. 그는 원로들(senators) 은 일에 분주하지만 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이 게으른 생활을 할 뿐 아니라 그의 무기력을 성결성으로 간주하는 이 보기 사나운 상황을 비난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그의 견해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 악이 얼마나 범람하게 되었는가 하면 세상의 거의-10분의 1이 배만 채울 줄 알았지 일이 가져오는 불편을 기피하는 무위도식자들로 꽉 차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생활 양식을 무슨 무슨 '의식'(Order)이니 무슨무슨 '규칙'(Rule)이니 하는 말로 위장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는 그들이 무슨 직함을 내밀든 모두 비정상적이요 '규모없는' 자들임을 확언 하고 있다. 여기서 수도사들의 게으른 생활이 건전한 판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모양 저모양으로 얼마만한 불만을 야기시켰는가 하는 점은 기술할 필 요가 없는 줄 안다. 소크라테스는 삼부로 된 역사서〈Tripartite History〉 제 8권에서 한 늙은 수도사에 대해 예리한 관찰을 기록하면서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은 사람은 강도와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더 이상의 예를 들지도 않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이런 사람들은 방탕하고 불법적이라는 점을 '선언하는 사도의 말로써 만족하도록 하자,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  이 문장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풀이를 하는 사람 들이 있는데 이것을 나는 '그들은 전혀 일하지 않고 다만 말썽꾼일 뿐이다' 하는 식으로 모방해 보았다. 여기서 그는 대부분 게으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기 마련인 잘못을 지적해 보여 주고 있는데 그들은 되는대로 부산하게 자신들과 타인에게 말썽을 부린다는 이야기이다. 할 일 없는 사람들 일수록 아주 중대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무료하게 지내는 것으로 더 피로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들은 이곳저곳 바삐 쏘다니며 가는곳 마다 몹시 피로한 기색을 보인다. 그들은 온갖 소문을 다 수집해서 아무렇게나 퍼뜨린다. 누가 보기에는 마치 국사를 자기 어깨에 걸머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를 수도자들 사회말고 또 어디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그보다 더 한가한 집단이 또 어디 있는가? 그보다 더 호기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곳이 또 어디 있는가? 이 병폐는 인류 전체에게 치명적인만큼 바울은 그것이 나태를 통해서 조장되어 서는 안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그는 그가 지적한 두 가지, 잘못, 곧 끈질긴 선동과 유익한 일을 않는 것을 교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그들에게 "종용' 하기를 힘쓰도록, 곧 프랑스어에 있듯이, sans faire bruit (소란 피우지 않고) 자신들의 소명의 범위 안에서 평화롭게 지낼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뀌 말하자면 정직한 일에 관여하고 있는 자들이 가장 평화로운 사람들이요, 남들과 자신들에게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는 여기서 다른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들은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에 (집착하며 합법적이요 명예
로운 직업에 종사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인간 생활은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되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또한 그의 세째 명령, 곧 '자기 양식을,먹으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소유로 만족하는 가운데 남에게 짐이나 불편을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는 당부를 솔로몬은 우리에게 해 주 고 있다(잠 55 : 15). 공정거래의 제1조는 아무도 남의 재산을 침해하는 일이 없이 정당하게 자신의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제 2조는 아무도 남이 소유를 소용돌이처럼 꿀꺽 삼켜버리지 않고 자기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며 자신의 풍요로 그들의 궁핍을 가볍게 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전에 '일' 하는데 있어서 게올렀던 사람들에게 생업을 찾을 뿐 아니라 곤경에 처해 있는 자기 형제들을 도와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이다(앱 4 :: 28)
 
"13. 형제들아 너희는~~~~" ;  암브로스는 이것을 바울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음식을 먹으라'는 점을 당부했다 하여 부자들이 그들에게 시기하는 마음에서 도움을 베푸는 일을 중단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 덧붙여진 이야기로 본다. 사실 정도 이상으로 자신들의 몰인정에 대한 핑계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곧, 게을러 빠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만약 그들에게 음식이 부족 할 경우에는 그들은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본다. 내 생각에는 바울은 극소수의 비활동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실족의 계기를 경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다른 면에 있어서는 자발적이요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사 람들이 자신들의 호의 때문에 상대편이 못쓰게 되고 만다는 것을 보게 될 경우 냉담해지는 수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록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이 있고 우리의 관용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편의 배은망덕, 성가심, 고집, 건방짐, 기타 속상한 행동이 제 아무리 우리를 낙심케하고 구역질나게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선을 행하려는 욕망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14. 누가~~~~~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  그는 이미 앞에서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명령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 대한 멸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역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매정하게 처벌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먼저 그는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자기에게 보고해 주어 자 기가 자신의 영향으로 그들의 질서를 잡고자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둘째, 그는 그들을 파문해서 그들이 수치를 당한 다음에 회개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들의 과오가 폭로되기 전에는 교정받지 않으려 하는 자 들의 평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질병을, 그것을 치료하는 임무를 가진 의사에게 보고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귀지 말고," ;  틀림 없이 여기서 바울은 주방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 왜냐 하면 그가 언급하고 있는 무질서(αταξiα)가 가혹한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오만() 역시 용납 못할 잘못이다. 그는 앞에서, 무질서하게 사는 그들 에게서 물러 서라'는 점을 당부하고 여기서는, 나의 경고를 거절하는 그들 과 전혀 교제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두번째 말에서 그는 첫번째 말에 담긴 것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와 친교를 갖지 않는 것과 그와 교제를 완전히 기피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순종 하라는 권고를 받고도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을 신자들의 교제에서 제외시 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파문 이외의 수단으로서는 질서 유지를 거절하는 모든 고집불통의 사람들에게 파문이라는 훈계를 적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강제로 굴복함으로써 순종하게 될 때까지 수치를 당하게 내버려 뒤야 마땅하다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파문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는데 그것은 곧 오염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으며, 한 개인의 비행이 교회를 공적으로 수치 스럽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가혹한 본보기를 통해서 타인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단 한 가지 의도만을 언급하고 있 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들이 수치를 .통해서 억지로라도 회개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 죄를 짓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오만 스러워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죄악은 관용과 핑계를 수단으로 조장되어 간다. 그러므로 최선의 처방책은 죄인을 수치심으로 두들겨서 인구로하여금 자 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을 갖기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심을 갖도록 함으로써 거기서 얻은 이득 자체는 보잘것 없지만 자신의 비행을 인정함으로써 괴로와하는 죄인은 이것을 통해서 온전히 교정되는 경 우가 있다는 점을 바울은 염두에 두고 있다. 수치란 고통과 마찬가지로 죄 그러므 악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있어서 유익한 준비 단계이다. 로 앞에서 지적했듯이 제 멋대로 놀아나는 자는 무조건 이 재갈을 물려 놓 아야 하며, 처벌을 받지 않고 그냥 놔두다가 더 벤뻔스럽게 번지는 일이ι없 도록 해야 한다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  여기서 그는 격한 어조를 바꾸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죄인이 자신의 근심에 삼키운 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고후 2: 7). 이것은 우리의 처벌이 너무 가혹할 경우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징계를 사용하되 교회가 처벌을 부과하는 당사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혹한 처벌이 극에 달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온순성 자제가 필수적이요, 그 결과 징계를 받는 쪽에서 자신들이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파문의 의도는 사람을 주님의 양무리에서 쫓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방황하며 곁 결로 갔을 때 그들을 다시 불러 들이는데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애를 입증하는 수단은 아첨이나 거짓 존경이 아니라 '권고' 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이것을 통해서 도무지 치료를 받지 않으려 하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파문(excommunication)은 저주(anathema)와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가 가혹한 처벌을 통해 요시찰인 명부에 올려 놓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그들이 마치 구원의 소망에서 절연된 사람들인양 전적으로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올바른 마음으로 되돌리는데 노력을 기울일 것을 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