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살후 3:6 ~ 9)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1)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2)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3)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4)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6)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7)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8)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형제들아~~~~~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 주님께서 그를 강력하 게 지원하셨으며 자기 자신도 누구 못지 않게 기도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지 만 그는 아직도 신자들의 기도를 바라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우 리를 도와 주시고자 하신다. 우리도 그의 본을 따라 이러한 도움을 구하며 형제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권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는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라는 말로씨 그는 자기가 개인적인 유익이나 관심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 더 관심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왜 데살로니가인들의 기도를 요구하고 있는가?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이 제 길을 달려 가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적 이익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전반적인 안녕보다 더 중시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길(course)이란 유포()를, 그 리고 '영광'은 더 많게 되는 것을 뜻한다. 곧 그의 복음전파에 사람들을 하 나님의 형상에 따라 재형성하는 능력과 효력이 수반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 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생활과 정직성은 복음의 영광이듯이 그것을 입으 로만 이야기하면서 악하고 씩어 빠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음을 수치스 럽게 만드는 자들이다.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라는 말은 경건한 자들로 하 여금 나머지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과 같이 되도록 보살피라는 뜻에서 이야기 된 자극제이다. 따라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은 날마다 그것이 오기를 기도하라는 당부를 받고 있는 셈이다(마 6 : 10).
"2. 우리를~~~~~건지옵소서 하라" ; . 벌게이트역은 &tбπous(아토푸우스)를 무리한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아주 잘된 번역이다. 이 말은 다음에 나오는 τν πovnp@ν(악한)이라는 말과 함께 그리스도인이라는 미명 아래 교회 안 에 잠복하고 있는 무원칙하고 반역적인 사람들을 지칭한다. 아니면 바울은 이 말로 최소한 율법에 대한 광적인 열성 때문에 부음을 맹렬하게 공격하던 유 대인들을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 원천에서 위협하는 위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바울이 여기서 물리 적 힘(알렉산더, 히메네우스 및 기타 사람들의 (견해)이 아니라 거짓 가르침 을 가지고 복음에 반기를 드는 자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 만 나로서는 그것을 어떤 종류의 위기에든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는 쇠고랑과 고통이 거기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이미 신의 경고를 통 해 듣고 있었다(행 20: 23). 그러므로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가 죽거나 살 거나 승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도록 하는 구출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 (모든 사람에게 .신앙이 있는 것은 아 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이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하 는 식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애매하고 이해가 어디다. 그려므로 우리는 신앙이란 너무 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바울의 의미를 그대로 고수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지만 이들이 신앙을 통해서. 그에게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에게 오는 척 하는 사람들이야 많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분에게서 너무 거리가 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떤 일개인을 두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권속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데살로니 가인들은 숱한 사람들이 신앙에서 움츠리는 것을, 곧 신자의 숫자가 얼마나 극소수인가 하는 점을 눈으로 본 사람들이다. 따라서 보바깥 사람들에 대해서 굳이 이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비바울은 신앙 고백하는 사람 모 두가 사실 신자라는 점은 부정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유대인들을 여기에 포함시킨다면,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아 차렸으므로 그들 역시 그리스도와 가까운 흉내를 낸 사람들로 볼볼 수 있다. 확실히 바 울은 여기서 그가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 추측컨대 이 사람들은 특별히 겉 모양과 명목상으로는 경건의 흉내를 내면서도 실제 는 그것과 거리가 먼 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악하고 천박한 사람들과의 대면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이 무근거 하거나 현실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는 뜻에서 그는 신앙이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사실 잡초가 알곡식 과 섞여 있듯이(마 13 악하고 타락한 사람들은 언제나 선한 사람들과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받으려 하는 악인들이 소동을 피울때마다 우리는 모두에게 신 양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는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렇다, 불명예스러 운 편파적 집단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게 될 경우 이것으로 그런 오류를 막 아내는 방패로 삼도록 하자. 교회 내부의 원수들이 경건한 교사들에게 해를 끼칠 때마다 우리가 이 교사들을 의심할 경우 우리는 그들에게 크나큰 상처 를 입히는 셈이요, 그뿐 아니라 우리 신앙이 없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내세우는 자들이 많다는 점을 명심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신앙은 계속 동요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주는 미쁘사(주께서는 신실하시므로'; 새번역)~~~~~" ; 그들은 불리한 보고를 통해서 바울의 사역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우 리가 항상 사람들에게서 신앙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경고하고 나서 그들을 하나님에게 소환시켜 그는 신실하시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그 는 인간들이 신자들에게 소란을 피우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모든 계략으로부 터 보호해 주시는 분이다. '그들은 사실 신앙이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너희 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는 충분한 힘이 있다 는 말이다. 그가 주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그의 백성의 안녕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끝까 지 일관성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요, '그는 제 때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지 위 험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 니하시고" 하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이 바울이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보 여 ,주고 있다. 악한 의도를 품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동의 독을 그에 게 던졌으며 그는 여러가지 폭력의 형태로 그것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시험때문에 데살로니가인들이 추호라도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바울이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보 여 ,주고 있다. 악한 의도를 품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동의 독을 그에 게 던졌으며 그는 여러가지 폭력의 형태로 그것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시험때문에 데살로니가인들이 추호라도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악한'이라는 말은 그들의 사악과 악한 사람들을 모두 지칭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모든 악인들의 우두머리격인 사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든 영적 피해로부터 구출해 주시지 않을경우 사람들의 속임수나 압박에서 구출받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
"4. 우리가~~~~~학신하노니." ; 그는 이 '서언을 통해서 그가 곧 덧붙일 교 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굽뜨고 불신적인 그들로부터 순종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신뢰한다는 말은 그들에게 더 순종하려는 마음을 불러 일 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그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기대가 주님 에게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순종하게 돌려놓고 계속 순종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와 동시에 바울은 이 표현으로 주의 명령에 의거하지 않는 규례를 정하는 것 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다. 내게는 이것이 더 이 전혀 자신의 의도일 가능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이 귀절에서 자신의 요청과 그들의 순종의 한계점을, 곧 그것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제시하는 자는 있다.
그러므로 이 제약을 준수하지 않으면서 바울의 무모하게 교회를 속박하고 자신들의 법에 예속시킬 뿐이다. 그와 동시에 그 는 제 아무리 악인들이 그에게서 자신의 존귀한 명칭을 앗아가려 한다 해도 데살로니가인들 사회에서는 자신의 사도직이 파괴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곧 이어서 덧붙이는 기도의 의도는 바 점을 로 이것이다. 곧 인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형통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보다 더 따라서 형성될 경우 만사 바랄 것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되는 점은 그가 얼 자기만을 위한 일방적인 권력을 멀리하는 사람인가 하는 사실이다. 마나 수 모범을 1 그 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지지 켜 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만족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확신 뒤에 덧붙여지 는 그의 기도는 우리에게 좋은 소망이 있다해서 헌신을 포기하는 19일이 없어 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그의 생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임무를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는 이 두 가지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전진을 보 며 더 나아가 완전을 향해 줄달음 치려는 욕망까지 품도록 해야겠다. 물론 형제로서의 사랑이 우리 사회에 성행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를 다스릴 수 없다. 한편 '그리스도의 인내'(patience)는 우리에게 세상을 멸시하고, '육신을 죽이며, 십자가를 견디어 낼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물 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의에 의해서 우리 속에 생기는 '그리스도의 인내' (endurance)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최종적 속량에 대한 소망을 두고 이야기된 것으로 보고 싶다. 오늘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전투 생 활에 있어서 우리를 부추겨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속량자 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뿐이요, 이 기다림은 한결같이 십자가를 메는 일에 있어서 인내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이어서 한 가지 오해를 교정하고 있다. 그 당시 이집 저집 돌아다니 며 남에게 폐를 끼치고 살아가는 수다스럽고 게을려빠진 인간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것을 [눈감아 죽으로써 저들의 나태를 조장하는 것을 금하며 그들 역시 거룩한 ,생활에 어울리는 떳떳하고 유익한 일을 통해서 스스로의 필수품을 조달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여기서 말하는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 이란 악명 높은 비행이나 방탕한 생활을 하 는 사람들이 아니라 떳떳하거나 유익한 직업이 없는 게으름뱅이들과 무위도 1 구 식자들을 지칭한다. 우리가 만들어진 의의를 '생각지 않으며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생활의 질서를 바로 잡지 않는 것은 정말 무진서(&ταξiα)가 아 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한 생활을 할때만 우 리의 생활은 질서를 잡기 마련이다. 이러한 질서를 떠나서는 인간 생활에는 혼란이 있을 뿐이다. 누구든 하나님으로부터의 적합한 요청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살지 않으려면 이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자기 이웃에게 봉사하는 방향에서 인간생활을 놓으셨기 대문 이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고 혼자만을 위해 사는 자, 아니, 남에게 골칫거리, 노릇만하지 아무런 도움이되지 못하는 자를 &castos (아탁토스 무질서한 자)로 취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신자들과의 교제를 단절시켜 교회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 에라스므스는 이것을 *******이름을 걸고' (by thehername)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하나 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식이다. '나는 히 번역을 완전히 배척하지 는 않지만 '으로'(in)로 보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으며 이것은 여러 다른 귀 절에서도 통용되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히브리 어법상 일치하는 것이기 도 하다. 그러므로 이 문맥의 의미는'이 명령은 한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만큼 정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 도 이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언급하는 '떠남'은 공적 추방 이 아니라 개인적인 교우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단지 신자들이 일 정한 직업이 없이 건전치 못하게 살아가는 부류의 게으름뱅이들과 친분을 맺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가 모든 형제에게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비록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한다 해도 사실은 종교의 오점이요 파렴치 한 자들인만큼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 그는 곧 이어서 그가 의미하는 유전(institut ionem)이 무엇인가를 덧붙이고 있는데, 다시 말해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에 게는 음식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 에 자기 자신이 보여준 모범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남에게 아 무런 부담을 끼치는 일이 없이 우리 스스로 그 짐을 담당하게 될 때 가르침 에는 더 많은 신뢰성과 권위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는 자기가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자기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아무에게도 경제적 페를 끼치지 :않았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이것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이야기 하 고 있는데 거기에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는 '누구에게서든 양식을 값없이 먹지-않고'라는라는 말을 위하고 있는데 설 령 그가 손으로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의 정당한 보수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 아니요, 교사들이 교회를 위해 하는 일의 가치는 그들이 거기서 받는 음식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 서 생각없는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가 말씀의 일 꾼들에게 마땅히 어떠한 보수가 따라야 하는가를 깨달을 정도의 공정성과 분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주먹을 꼭 움켜린 채 자 신들의 것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면서 교사들이 마치 할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듯이 그들의 생계비를 아까와하는 자들도 더러 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도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는데 하물며 아 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남의 식객노릇 하는 것을 허용해서야 되겠느냐 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자기를 본받아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모 범을 하나의 법칙으로 삼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의미는 그들이 그에게 서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곧 그가 말하고 있는 문제가 이미 그들의 본보기로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을 그들이 능히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 바울은 게으른 사람들로 하여금 식객으로서 남의 음식을 먹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행위를 본으 로 내세웠듯이 이 동일한 원리가 말씀의 일꾼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 교회가 그들의 합법적인 보조를 그들에게서 사취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 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탁월한 자제력과 공손함을, 그리고 그가 형제들의 권리에 기존해를 끼칠 정도로 자신들의 권리를 남용하는 사람들의 야심과 거 리가 먼 사람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인들은 바울에게서 복 음을 전파 받고도 아무런 보수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인간이란 천 성적으로 욕심꾸려기이므로-앞으로도 이것을 다른 일꾼들에 하나의 규정으 로 적용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위험을 예상하고서 그에게는 실제 그가 사용한 권리 이상의 것이 있었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써 다른 사람 들에게 여전히 자신들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고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그의 의도는 이 말로 비활동적인 자들에게 더 창피를 주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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