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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데살로니가전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5:22)

1. 성경 (살전 5:16 ~ 22)
 항상 기뻐하라 (16)쉬지 말고 기도하라 (17)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8)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19)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0)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1)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2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6. 항상 기뻐하라."나는 이것을 영혼이 역경에 ,처할 때 마냥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침착을 유지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영혼의 중용(moderation) 으로 본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세 귀절을 하나로 묶지 않는다. 바울이 우리에게 쉬지말고 기도 할 것을 권하면서 계속 기뻐하도록 하는 것은 이렇게 되어야 우리들이 우리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을 청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말라"는 ,말을 한 뒤에 이것의 실천 방안으로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것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기뻐할 이유로서 상처나 역경때문에 무리하게 당황하지 않는 침착하고 평온한 정신을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통이나 슬픔, 불안이나 공포 때문에 너무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 존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더우기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보살피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자주 찾아들기 마련이므로 그는 또한 처방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안을 하나님의 품에 풀어: 놓는 것이다; 이것을 .다윗이 시편 37편 5절, 55 편 22절에서 우리에게 명하고 있으며 베드로도 그의 본을 따라 명하고 있는 그대로이다(벤전 5 :7).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너무 안절부절 하기 마련이므로 그는 중간 노선을 정함으로써 설령 우리들이 우리에게 없는 것을 구한다해도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일을 멈추는 일이 없게 하고 있다. 그는, 비록 단어는 더 적지만, 여기서도 거의 동일한 분류를 그대로 따르 고 있다. 먼저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높이 평가하게 함으로써 것을 인정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슬픔을 이겨내게 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 한다면 제 아무리 큰 슬픔이라도 영적 기쁨보다 앞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우리에게서 떠나거 나 우리가 거기서 떠나기 마련이다. 슬픔에 처해 있을지라도 기뻐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의와 영생의 소망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극히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쉽사리 슬픔에 빠지며 초조해 하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그가 곧 이어서 덧붙이는 처방책에 유의해야겠다. 우리가 낙심하고 쓰러져 있을 때라도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짓누르는 짐을 하나님께 맡길 경우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다시 일으 켜 세움을 받는다.
 
그러나 매일, 아니 매 순간, 우리의 평안을 어지럽히고 기쁨을 앗아가는 사건들이 너무도 많이 발생하므로 그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결같은 기도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바울은 조건으로서 감사를 덧붙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장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을 경우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며 투덜대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받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가운데 항상 우리의 청원에 감사를 섞도록 하는 뜻에서 우리의 소원이 억제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사실 우리는 애걸 복걸하며 끙끙대며 불평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우리에게 용납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18. 이는 하나님의 뜻이니라." ;  다시 말해서, 크리소스톰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여기에 더 자세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찌나 우리에게 자비롭던지 우리는 우리의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본다. 우리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의 유익과 안녕으로 바꾸실 정도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적절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를 괴롭히는 현재의 불행한 사건에서 우리의 눈을 돌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 하는 것만이 우리의 조바심을 교정하는 유일한 처방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 이 비유는 성령의 능력과 특성에서 취한 것이다. 마음을 조명하는 것이 성령의 본분이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를 가리켜 우리의 빚으로 말하듯이 우리는 그의 은혜를 무효화함으로써 그를 소멸 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당부가 따르고 있다. ,주석가들 중에는 이 귀절과 앞 귀절을 동일한 내용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 생각에는 성령을 소멸하는 것과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을 소멸하는 방법은 다양하므로 나는 이 두 귀절을, 하나는 일반적인 것으로 다른 하나는 특수한 것으로 구별한다. 예언에 대한 모독이 성령을 소멸하는 한 사건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 속에 지펴 놓으신 불빛을 더욱 더 열심히 날마다 발전시켜가야 마땅한데도 게으른 나머지 하나님의 은총을 무효화하는 자들 역시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명령 소멸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이 권고는 뒤에 나오는 예언 모독에 대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로 적용할 수 있다. 전자의 의미는, 너화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배은망덕하게 이 빚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 권고는 아주 유익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번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그처럼 귀한 은총을 제쳐 놓거나 눈을 감고 세상의 허영에 질질 끌려다니는 것은 남에게 본을 보여주는 뜻에서 그들이 무시 무시한 실명의 저주를 받은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꺼버리는 무 감각을 조심해야겠다. 하지만 여기 자신에게 제공된 빛을 꺼버리거나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가운데 은총의 효력에 훼손을 가하고 자유 의지의 능력을 극찬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논거는 거짓이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택 받은 백성들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일하시며 그들 가까이 빛을 가져 올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보게하고 마음의 눈을 열어 제쳐 놓아주시며 그 상태를 계속하게 하시지만 육신은 언제고 태만에 빠지기 쉬우므로 계속 격려를 통해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음성을 통해서 내리시는 명령을 내면적으로 성취하신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단 켜 주신 등불에 기름을 계속 공급해 주실 것과 심지를 깨끗하게 해주시며 그 불이 더 밝게 빛나게 해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이 우리의 입 무이다.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  이것이 다른 것과 함께 덧붙여지고 있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은 무엇보다도 교의를 통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므로 이 교의를 극구 부정하는 사람은 성령을 소멸하는 자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과 수단을 통해서 우리와 교통하고자 하시는가 하는 점을 항상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도 아래서 발전을 보려는 자들은 모두 선지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겠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장래 일을 점치는 은사가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 있듯이 성경해석학을 지칭하는 것이요, 선지자란 신의 뜻을 해석하는 자이다. 따라서 지금 인용한 귀절에서 바울은 덕육(edification), 격려 및 위로를 위한 가르침을 선지자들의 일로 돌리면서 이 기능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언을 현재의 요구에 적용되는 성경해석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멋대로 어둠 속에서 배회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무시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외적인 복음 전파를 추천하는 좋은 말이다. 광신자들은 성경을 계속 읽거나 말씀을 계속 듣는 자들이 자녀라는 망상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도 가르침을 무시하기 전에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교만 때문에 성령을 얻는답시고 사람을 통한 사역, 아니 더 나아가서 성경 자체까지도 멸시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사단이 자신들에게 성령의 은밀한 계시라면서 제시하는 모든 허황한 이야기를 뻔뻔스럽게 팔아 먹으려 덤빈다. 자유 사상가들과 그와 같은 미친 사람들이 다 그 부류에 속한다. 사람이 무식하면 무식할수록 그를 감싸서 높이 뜨게하는 교만 역시 더욱 더 커지기 마련이다. 성령과 그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를 연관시키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21. 범사에 헤아려~~~~~~" ;  잘못된 개인과 협잡꾼들은 예언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들의 엉터리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때문에 예언이 의심을 받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수가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복음전파라는 말만 들어도 메스꺼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강단에서  쓸데없는 자신들의 명언을 퍼붓는 무식한 사람들과 징그러운 모독을 일삼는 또 다른 부류의 불경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예언이 멸시를 받거나 아예 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모든 것을 확인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설령 사람들이 모두 절대적인 원칙 밑에서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가르침을 저주하거나 배척하기 전에 먼저 판단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면에 있어서 흔히들 범하는 오류가 두 가지 있다.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미명 아래 속은 일이 있거나 아니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무조건 모든 가르침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시되는 것은 구별없이 무작정 받아들이는 경신들이 있다. 이 두 방법은 모두 나쁘다. 곧 오만한 편견에 잡힌 '전자는 스스로 발전을 볼 기회를 박탈하며, 후자는 주책없이 온갖 오류의 바람에 자신들을 내어 맡기는 셈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무엇이든 먼저 검토해 보기 전에는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함으로써 그들이 이 양 극단에서 벗어나 중도를 택하게 하고 있다. 반면에 그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되는 것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보면서 자신들의 판단력을 행사할 것을 권하고 있다. 최소한 이런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가운데 그가 장본인인 것으로 이야기 되는 그것에 대한 예언을 멸시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어떠한 가르침을 배척하기 전에 검토나 판별이 앞서야 하듯이, 참되고 건전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그것이 앞서야 한다. 경건한 자들이 무경건하게 참된 것을 거짓 된 것과 마찬가지 입장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귀절에서 우리는 판단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데살로니가인들에게 허용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인간들의 속임수에 넘어갈 염려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들에게 이런 분별력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을 확인하고 '좋은 것을 굳게 붙잡으라' 는 바울의 권면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옳게 분별하는 능력이 상실되고 있는 것으로 느낄 경우 우리는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동일한 성령에게 이것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귀절에서 바 울의 입을 통해 가르침의 진로가 그 어떠한 인간적인 오류, 그 어떠한 무분 별한 견해나 무지, 아니 그 어떠한 남용 때문에 교회 동안에서 계속 전반하는데 있어서 지장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다.
 
예언의 철폐란 곧 교회의 파멸을 뜻하므로 우리는 ,예언이 폐지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늘과 땅이 뒤범벅이 되는 편을 .택하도록 하자. 하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확인하라는 말로서 가르침에 있어서 너무 자유 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확인하려면, 모두 들어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협잡꾼들이, 그들의 비진리를 유포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그는 여기서 다른데서 입을 막을 것"(딛 1:11)으로 말하면서 엄격히 배제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다른 곳에서 그가 그처럼 칭찬하는 교사들 을 선발하는데 있어서(님전 3-: 22) 마땅히 따라야 하는 순서를 무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신경을 쓴다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 람들이 예언하는 경우가 있고 선하코 경건한 교사들이 표적을 맞추지 못하 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참 율성을 발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올바른 것을 확증하려는 마음도 없으면 서 아는 체 하는 가운데 모든 가르침을 전부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위험스러 운 것도 없다
 
"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  이것을 일반적인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곧 악의 모양을 갖춘 것은 모조리 삼가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의미는, 만약에 우리가 우리 형제들에게 관심을 표하지 않을 경우 내적인 양심의 증거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악해 보이는 모든 것을 피함으로써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모양' (form)을 논리적인 용어로 보는 나머지 유 개념에 반대되는 종 개념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 바울은 통상적으로 말하는 모양(appearance)을 지칭하는 뜻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악한 모양으로 보든 악의 모양으로 보든 그 의미는 동일하다. 나는 이 문장을 앞 문장과 연관시키는 크리소스톰과 암브로스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바울의 사고방식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입장을 간략하게 피력해 보겠다.
 
먼저 나는 '악의 모양' 또는 '악한 모양'을 어떤 가르침의 오류가 아직 밝혀지지 않아서 그것을 배척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거기에 독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공포심이 작용하는 그러한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가 이런 명령을 하는 것은 그것을 전부 배척하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신빙성을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왜 , '선한 것을 길게 붙잡을 것을 요청하고 여기서는 그저 악이 아니라  "악의 모든 모양"을 삼가 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는가? 그것을 세심히 구별한 결과 그것의 진실성이 분명하게 드러날 경우 거기에 신빙성을 두는 것이 옮기 때문이다. ,반면에 속임수에 대한 공포심이 있거나 마음에 자꾸 의심이 들 경우,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모든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으려면, 물러서거나 발끝으로 조심 조심 걷는 것이 옳다. 한 마디로 그는 만약에 우리가 세밀하게 모든 것을 확인하고 또 일관성이 없거나 충동적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예언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