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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데살로니가전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4:16)

1. 성경 (살전 4:9~18)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9)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10)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1)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2)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3)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4)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5)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6)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7)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  그는 앞에서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격찬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는 말로써 반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이유로서 :그는,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 르치심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은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새 겨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종이에 글자를 써 넣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 다. 그의 의미는 단지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를 가르친다"는(요일 2 27)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사랑을 위해 형성되어 있어서 성령께 서 내면적으로, 효과적으로 그들의 임무를 (그들에게 지시하고 있다는 뜻이 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보다 큰 것에 마게도냐 전 지역 서 보다 작은 것으로 논리를 펴가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에 확대되고 있으므로 그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과연'이라는 단어는 같은이야기이다.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 '아니' (nay even or nay rather)와 는 의미에서 덧붙이고 있다.
 
"10. 권하노니~~~~~" ;  그는 그들이 사랑의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진보하도록 하라는 권 충분히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도 고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들 사회에 완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 다. 우리에게 있어서 제 아무리 최선의 것으로 보이는 것일망정 우리는 이것 을 더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그가 그들에게 애써 잠 잠할 것을 당부했다는 식으로 Bilotipetobac(필로 티메이스싸이)를 뒷문장 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낫다. 그는 그들의 사랑이 더욱 더 증대할 것을 당 부하면서 그들에게 거룩한 경쟁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그들이 서로 사랑 하는 면에 있어서 서로 겨루도록 하고 있다. 아니면 최소한 그는 그들 각자 에게 스스로 자아 정복을 위해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해석을 취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이 완전을 기하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오직 승리만을 노리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있는 경쟁심을 그들 에게서 기대하고 있다. 선을 행하는 면에 있어서 특출하게 뛰어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는 경쟁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을 평화를 유 지하도록 힘쓰라'는 뜻으로 보는 자들의 견해에 따르지 않는데는 그만한 이 유가 충분히 있다. 바울은 보다 어렵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 그처럼 가혹한 투쟁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숱한 장애물이 제기되는 사랑의 진보와 아주 잘 일치한다. 나 역시 이 말의 다른 의미, 곧 그들이 자발적으 로 공동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택한다.
 
"11. 종용하여~~~~~~~" ; 이것은 새 문장인만큼 나는 이것을 앞 귀절과 분리시 켜야 한다는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 귀절에서 말하는 평화롭게 지내 는 것이란 한가롭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프랑스어의 sans bruit와 같은 의미이다. 한 마디로 그는 그들이 소란을 피하고 평화롭게 지 낼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과 직접 연관되는 문장은 자기 일을 하고이 다. 남의 일에 무례하게 개입하는 자들은 큰 말썽을 일으키기 .마련이요, 자신들과 타인에게 있어서 골치거리이다. 그러므로 평화롭게 지내는 최선 의 방법은 각자가 자신의 소명의 여러 임무에 집착한 나머지 주님께서 맡 겨 주신 명령을 수행하며 이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부는 경 작하는 일에 분주하고 기술자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각자 본래의 한 계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이탈하는 순간 만사는 혼란과 무질서로 뒤바뀌 고 만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는 모두가 서로와 무관하게 떨어져 살 정도로 자기 일에만 신경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자가 자기 집에서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할 때 남들의 평안을 깨는 자들의 빈둥거림을 교정하는 데 있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  손으로 일하는 것을 권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각자가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요, 따른 하나는 그들이 불신자들 앞에서도 존경받는 행동을 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아 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오직 퍼 마시는 일만을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보 이는 게으름뱅이처럼 수치스러운 존재도 이 세상에 따로 없다. 우리는 이 손'으로 하는 일을 더 넓게 생각해서 인간 생활의 모든 유익한 직업으로 볼 수도 있다.
 
"13.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 ; 고린도에서처럼 모독자 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부활의 소망을 말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고린도 인들을 가혹하게 책하지만 여기서는 부활소망을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 이 확신이 확고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들을 두고 애도하는 데 있어서 자신들의 옛날 미신을 어느 정도 견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핵심을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다시 일어 날 사람들이므로 죽은 자들을 두고 무절제하게 통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의 슬픔에 끝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에게 부활 소망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역활에 대한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너무 과도하게 통곡하는 것은 적합한 일이 아니다. 바울은 다음에 부활 방법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요, 거기서 때에 .대해서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귀절에서는 단지 무절제한 슬픔을 견제하고자 할 뿐이다.^.
 
그들이 부활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겼더라면 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도무지 .슬퍼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는 말 로써 우리의 슬픔에 절제하는 면이 있기를 요청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제 멋대로 울어대는 불신자들처럼 통곡하는 그것을 금하는 것은 이들은 죽음을 최종적인 파멸로 보며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서 집합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그처럼을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부활 지식은 슬픔을 누그러뜨리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는 죽음을 .성경의 일반 용법에 따라 잠자는 것---이것은 죽음의 고통을 완화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면과 파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혼이 아니라 신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죽은 신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때까지 침대와 같은 무덤에 누워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으로 보는 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 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의도를 파악해야겠다. 그는 그들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두고 과도하게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부활을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 죽음에서 파멸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끝없이 울어 대는 불신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이다. 이 말을 오용해서 그리스도인들 사회에 무관심, 곧 강철같은 완악함을 조장하려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은 바울의 말에서 이런 성질의 것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저지하지 않는 뜻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해서는 안된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모든 역경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을 억제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굴복하도록 하는 것과 인간적인 감정을 제쳐두고 목석처럼 완고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경건한 자들의 슬픔은 위로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옳다. 이렇게 될 때 이 위로는 그들에게 인내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인내의 어머니격인 복된 불멸에 대한 소망이 이 일을 성취할 것이다.
 
"14. 우리가~~~~민을진대~~~~"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은 것은 우리가 동일한 부활에 동참자가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그는 우리의 신앙의 자명한 이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여가서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바울이 다른 곳 (고전 15 : 13)에서 밝힌 바 있듯이 이 교의는 다른 원리,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게 큰 누를 끼치는 것이다. 아니, 로마서 10장 6절에 있는 대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끌어 내리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자는 것 "이 란 죽어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지 뜻이다. 말하자면 세 죽음에 참여하는 금 누리는 연합을 견지한다는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게 접붙여진 자들이 그와 함께 것은 그와 함께 생명에 참 여하려는 뜻에서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들에게만 부활이 있을 일어날 것이 질문이 제기된다. 나의 대답은, 이 귀절에서 바 울은 그에게 적합한 것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의도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불신자들도 같이 아닌가, 하는 당면한 의도에 불경건한 자들 을 공포로 후려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자들의 과도한 비통을 교정하고 그 것을 위로의 약으로 치료하는 것이다.
 
"15 우리가~~~~~이것을 말하노니~~~~~~~" ;  그는 여기서_신자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움 받을 방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ρ언급하고 있다. 그는 아 주 중요할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믿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 시에 인간의 능력이나 선택을 능가하는 약속할 보예정이므로 그는 자기가 개인적이거나 인간적인 견해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가 의 말하는 바의 장본인이라는 점을 미리{밝히고[있다. [하지만_그가 언급하 는 주의 말씀'이란 당신 자신의 강론에서 취한 말인 [것 보같다. [바울은 하늘 나라의 모든 비밀에 대해서 계시를 통해서 배워!,알고 있었지만.[그리스도께 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신자들에게 [부활신앙을 확립하 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부활의 .첫 증인은 우우리가 아니라 당신께서 손수(the Master Himself) 그것을 '선언하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 ;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 는 자들만 부활에 참여하고 그 이전에 죽은 자들은 거기에 전혀 참여할-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노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이 '점을 미리 밝히고 그들을 빼놓고 우 있다. 부활의 순서는 그들부터 시작될 그것이다. 그러므로 리만 일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는 식이다. 여기서 짐작컨대 최후 부 활신앙에 대한 신앙을 희미하게 ,알고 있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 나 많은 잘못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던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곧 그들 은 죽은 자들은 그것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상상했던 것이다. 그들 상상에 영 생은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오시는 순간 살아남아 있는 자들에게만 귀속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잘못을 교정하는 뜻에서 바울은 죽은 자들을 먼저 다루며 그 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을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는 1인칭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최후의 날까지 살아 있을 자들 가 운데 한 사람으로 계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경각심을 주 어 그것을 기다리게 하며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방심하거나 스스로 특 수한 시기를 약속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는 특별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좀더 후일에 오실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겠지만 이 공동적인 교의가 교회에 전해짐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어느때나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하는 일에 필요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뒤에서 [그가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듯이- 자신들의 호기심에 너무 탐탁남닉하는'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우라 살 아 남아 있는 자 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법에 따른 것이다.
 
"16. 주께서~~~~~.친히~~~~~" ;  그는 κλеυσματσS (켈류스마토스 호령)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여기에 이 격려의 호령의 성격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천 사장의 소리를 덧붙이고 있다. 천사장은 산자와 죽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소환하는 데 있어서 선구자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물론 이 임무는 모든 천사들 공통의 것이지만 서로 다른 서열에 따른 일반 습관 에 따라서 그는 먼저 목소리를 발하는 자를 제일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나 팔이라는 단어에 대한 더 상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수맡기고 자 한다. 나로서는 고린도전서에서 밝힌 간략한 설명 이외에 더 이상 덧붙 일 말이 없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우리가 심판관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있 는 그대로 뵙기 전에 그것을 살짝 보여 주는 것이 이 귀절에서의 사도의 유 일한 의도라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 동일별(glimpse)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돌" ; . 여기서 다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 들이 먼저 일어날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에 대한 소망이 살아 있는 자들 못지 않게 죽어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하늘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그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 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지금 그가 다루고 있는 경건한 자 들의 위로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그는 남아 있는 자들이 그들과 함께 끌어 올려질 것 으로 이야기하고 있 다 그들의 경우에 대해서 그는 죽음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그 들이 죽음을 면제받을 것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거스틴은 <신국> 20 장과 〈둘시티우스(Dulcitius)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이 문제에 있어서 큰 어 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의 말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 다.

 

그는 다른 곳에서 씨가 죽지 않으면' 자랄 수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 다(고전 15: 36). 그러나 해결책이 간단한 것은 갑작스런 변화가 죽음과 같 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통상적으로 말할 때 죽음이란 영혼과 신체의 분 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에 따라서 이 썩어질 특성을 순식간에 파괴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 는 노릇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식으로 바울이 일어나고야 말 것으로 밀하는 4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다(고후 5 4) 하는 사실이 성취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리 신앙 고백에서 말하는 내용, 곧 그리스 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관이 되실 것이라는 점을 글자 그대로 사 실로 인정한다. 다만 그가 주저하는 점이 있다면 죽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것은 현재 도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이 육신이 파괴될 때 일어나는 것과 같은 죽음이 다. 오직 차이가 있다면 잠들어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 시각을 두고 신체의 본질을 벗지만 갑자기 새롭게 될 자들은 이 특성만을 벗어 버릴 뿐이다.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  그리스도와 일단 연합해 있는 자 들에게 그는 그 분과의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 이 말은 오리겐과 천년왕국설 신봉자들의 오류를 충분히 반박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자들이 일단 나라에 집결되면 그들의 생명에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1천년을 포함당함으로써 그 후로는 더 이상 .통치할 수 없게 하 는 것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말이다. .어쨌든 신자들의 생명을 1천년 기 간으로 한정하는 자들 역시 .터무니없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한 계속 그와 함께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 있으리라"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영생이 우리에게 할당되어 있다는 점을 개인 적으로 소망할 때만이 영생의 소망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는 뜻이다. .
 
"18. 서로 위로하라," ;  그는 여기서 내가 앞에서 지적한 점, 곧 우리는 우우 리가 현재 그리스도의 지체요 그를 우리의 머리로 모시고 그와 함께 연합하 고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부활신앙에서 위로를 받을 근거가 있다는 점을 보 다 더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들어쨌든 사도는 각자에게 자신의 슬픔에 대 한 위로만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도 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