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데살로니가전서1:1 ~ 10)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2)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3)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4)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5)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6)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7)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8)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9)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바울과 실루아노와~~~~" ;이 제명이 간략한데서 우리는 데살로니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존경했으며 아무런의 이의없이 만장일치로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경의를 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른 서신에서 바울이 자신을 사도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에게 권위를 확보하려는 뜻에서이다..따라서 :여기서 명예로운 직위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자기 이름만 사용하는 것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의 신분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사단의 일꾼들이 이 교회에 소란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책동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을 우리는 명백히 알 수 있다. 바울 이외에 이 서신의 저자로 두 사람의 이름이 덧붙여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 교회 "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른 서신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이 말로, 내가 틀리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가 참으로 데살로니가 인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확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특징은 참되고 합법적인 교회의 한 증거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말은 하나님께서 머리되시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그러한 교회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에게 기초하며 그리스도의 보호 밑에 함께 모이고 그의 이름으로 연합하지 않는 곳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 '바울이 여기서 여느 때처럼 그들의 믿음과 다른 덕을 칭찬하는 것은 단지 그들을 칭찬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격려하는 뜻에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은 일단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려는 목적에서요, 우리가 그의 지도와 안내를 통해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발전 추구에 대한 강력한 자극제이다. 인간들이 어리석게 주장하는 여러 덕에 대한 근 거없는 확신이 그들에게 교만심을 가득 채워 넣으며 장래 문제에 대해서 경솔하고 게으르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인정은 경건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리한 관심을 갖도록 자극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에게 잘했다고 축하하는 대신 '감사를 드리노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소유하는 것으로 그가 지적하는 모든 칭찬할 만한 은사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혜택이라는 점을 지적하려는 뜻에서이다. '기도'를 언급하면서 그는 곧 장차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그들의 이전 생활을 칭찬하는 그의 의도를 알게 된다. ,
"3: 쉬지 않고 기억힘이니" ; 쉬지 '않고라는 부사는 앞에 나온 말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가 더 이해를 돕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도, '너희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기억하며로 번역할 수 있다. 관사가 대명사 '휘모온'과 명사 '에르구우' 사이에 오지만 이것은 결코 반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글에 흔히.나오는 것이다. 내가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벌게이트 역이 이 번역을 따르는 것을 보고 무식하게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느 번역을 택하든 핵심 문제와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에라스므스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바울은 왜 그가 그들에 대해서 `그처럼 관심이 지대하며 그들을 위해서 끈질기게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률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그가 깨달았으며 여기서 그들을 더, 다정하고 주의깊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경건과 다른 덕에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그에게 관심과 정성을 보여야 마땅하다. 하나님보다 우리의 사랑을 더 독차지할 만한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인간들의 우정을 추구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의 은사률 통해서 인간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manifestation)보다 더 귀한 것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경건한 사람들이 받는 칭찬 가운데 최상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 더 밀접하게 묶는 가장 신성한 신분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너희들의 믿음을 기억하며'로 보거나 너희 믿음 때문에 '너회를 기억하며'로 보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믿음의 역사를 나는 믿음의 '효력'(effect)으로 본다. 이 효력은 소극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곧 신앙이 그 자체로서 성령의 능력과 효험 (efficacy)에 대한 뛰어난 본보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성령이 신앙을 강력하게 불러 일으키는 작용을 했거나 아니면 신앙이 다음에 그 결과를 외형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효력이 신앙의 결과보다는 그 뿌리에 작용하고 있다는 견해에 찬성한다. 바울의 이야기는 비상한 신앙이 너회들 가운데 강력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 라는 말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괴로움이나 아픔도 사양하지 않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체험을 통해서 다들 아다시피 사랑이란 얼마나 짐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특별히 그 시대에는 신자들이 사랑의 책임을 확대하고자 할 경우, '수고'의 기회가 많았다. 교회는 숱한 압박을 통해 무서운 정도로 '괴로와하고 있었다.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도 많았고 집에서 유배를 받은 사람도 많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리둥절한 사람도 많았고 '연약하고 무방비 상태'인 사람도 많았다. 저의 모두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수많은 불행을 보고 사랑이 무기력하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인내'는 언제나 소망과 연관지어서 언급되고 있다.우리는 우리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롬 88 : 24). 바울의 눈은 그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소망하는 그들의 인내를 기억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 는 것이 옳다. 여기서 우리는 참 기독교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얻는 셈이다. 곧 기독교란 능력으로 충만한 진지한 신앙이요, 따라서 우리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 어떠한 임무도 기피하지 않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사랑의 여러 임무에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하며 인내로 무장한 가운데 지루한 지연과 세상의 모든 유혹을 능히 딛고 올라서야 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귀절은 바울이 기억이나 방금 이야기한 세 가지에 관련될 수 있다. 그는 그의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의 신앙, 소망 그리고 인내를 기억한다는 점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설 때는 모든 가면을 벗어버려야 하므로 그는 이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확언이 더 무게를 지니도록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선의를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에 그들이 더욱 더 자발적으로 정성껏 기울이게 하고 있다.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의 택하심을 아노라" ; '아노라' 하는 분사는 바울과 데살로니가인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에라스므스는 그것이 데살로니가인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바울과 그의 동료에게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크리소스톰을 따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의 앞의 주장을 강력하게 확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를 택하심." ; 크리소스톰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인들을 높이심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입증하셨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는 더 깊은 것을 표현하는데 있었다. 그들의 부르심을 언급하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탁월한 표적이 드러났던 만큼 그는 여기서부터 그들이 확실한 선택의 증거와 함께 특별히 부름받았다는 점을 추론하고 있다. 그 이유가 곧 이어서 나오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단지 복음 전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관련된 복음 전파가 있어서 그 결과 그 복음 전파가 그들 가운데서 완전히 신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능력과 성령'이란 말은 내 생각에 성령의 능력 안에서'라는 뜻이요, 후자는 전자의 설명 형식으로 덧붙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세번째로 덧붙이고 있는 확신은 그들의 확신의 대상이나 데살로니가인들의 태도 중에 하나를 뜻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마치 하늘에서부터 그들의 소명을 비준하신 것이나 다름없이 여러가지 본질적인 증거를 통해서 바울의 복음이 확증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 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의, 부르심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를 그가 들은 대로 열거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사역을 천거함으로써 그들 역시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능력'을 기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가르침의 영적 능력으로 확대 해석한다. 고린도전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여기서 이것을 말(speech)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헛되고 생명 없는 웅변에 비할 때 하나님의 산 음성이요, 여기에는 필연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 자체로서는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잃어진 양들을 자신에게 모아 자신의 양무리에 가담시키시고 그에게서 떠나 배회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일 손길을 앨치실 때}]그 표적이 드 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에 대한 지식은 이러한 근원에서부터 찾지 않 으면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이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듯이 신앙과 부르심을 핑계삼아 신앙의 원 천인 이 첫 단계 은혜를 흐리게 하는 자들 역시 자신들의 실수를 오만하게 고 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신앙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그러므 로 우리와 버림받은 자들을 구별하는 영원한 예정이란 있을 수 없다' 하는 식 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은, '구원은 신앙으로부터 같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 앙을 비춰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따로 있을 수없다 하는 이야기나 마찬 가지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거저 베푸시는 선택이-------마치 그 결과 와 같은----꼭 부르심과 연관지어져야 마땅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것의 우위성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휘포'를 '사랑하심을 받는' 이라는 분사와 연관시키건, '선택'이라는 명사와 연관시키 건 그 의미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5.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바울의 당시 의도는 데살로니가인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는 동일한 변론을 허용하기를 바라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역을 높이 평가하시는 의도는 그들에게 그들의 입양을 드러내 보여 주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바울과 그의 전 동료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하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다음에 그는 곧 이어서 자신이 그들을 위한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선택에 대한 사회 실상을 충분히 확신하도록 모든 대책이 다 강구되었다는 이야기이다.
"6. 또 너희는~~~~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열성적으로 나오도록 하는 뜻에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와 그들의 신앙 사이에는 일치점과 조화가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응답하지 않을 경우 그들에게 제공된 은혜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줌으로써 시작한 우리의 구원을 우리 마음이 그를 순종하게 하는 가운데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을 말하자면 바울의 사역에 성령의 능력이 부여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거기에 신의 선택의 중거가 엿보일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인들의 이 순종은 신앙에 대한 강력한 확중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 그들의 신앙에서도 그것이 엿보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너희는~~~~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하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다 하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출 14 31).
이것은 바울과 모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달랐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그의 종과 도구인 그들을 통해서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는 말이다. '도를 받아' 그들이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가리켜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의 관용을 베푸시사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헌신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성령의 기쁨으로' 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발적이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는 것은 육신의 강제력이나 자신들의 본성의 격려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뜻에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다. 그들이 비록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평소에는 복음에 적대적이 아니지만 십자가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것을 기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자신들을 위협하는 환난'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자들에게서 우리는 훌륭한 본보기가 되는 높은 의지를 대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이 방면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명백히 깨닫게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참되거나 순수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환난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보다 우리 성미에 맞지 않는 일"도 세상에 없다.
"7. 너희가 ~~~~본이 되었는지라." ; 바울은 그들의 모습을 더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본을 통해서 또한 신자들을 감동시킨 점이다. 우리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그들의 진로를 마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 그들 사이에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큰 일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튀포스', 라틴어로는 xeemp lar, 프랑스어로는 patron이다. 그려므로 데살로니가인들이 환난을 받아들이는 용기는 어찌나 탁월 했던지 다른 신자들이 그들에게서 이 불변의 원칙을 원용할 정도였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모범들로 번역하는 편을 택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를 불필요하게 변경시킬 필요가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복수형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모범의 대상이었다"하는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별적으로 나타난 본이 많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들릴 뿐 아니라~~~" ; 이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이다. 바울의 의미는 그들의 신앙이 어찌나 생동적이었든지 그 울려 퍼지는 소리(sound)로 다른 민족들을 일깨웠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로부터 '울려 퍼졌다' (들렸다)는 이야기는 그들의 신앙이 고함을 치며 인간들로 하여금 복음을 신뢰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도 들렸을 뿐 아니라 저 먼곳까지 퍼져 그곳에서도 또렷 또렷하게 들렸으므로 바울은 이 문제를 널리 공포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들의 회심 사건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그들에게 들어 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복음을 돋보이게 하는데 있어서 사용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이 두 가지 내용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바람직한 것으로 서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에 그는 먼저 주님께서 인간들을 당신의 복음의 가르침으로 일깨워 주시기 이전의 인류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주님께서 우리가 배워 알기를 바라는 목적을 보여주며 복음의 열매를 설명하고 있다. 비록 모든 인간이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모두 우상숭배의 속박 아래 있으며 눈 먼 상태와 정신 이상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술책과 온갖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친절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일찍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보다 늦게 회개하지만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만큼 우리가 그를 섬기기 전에 그에게 돌아설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참 신앙의 의미와 성격을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무가치한 자신들의 본능을 포기하고 순수한 하나님 예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참으로 그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9. 너희가 어떻게~~~~~하나님께로 돌아와서~~~~" ; 이것이 참 회개의 목표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미신을 포기하는 이 첫 걸음을 떼어 놓았지만 경건에 발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더 악독한 상태에 떨어지고 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모든 하나님 의식을 내팽개쳐 버리고 잔인하고 불경한 조소에 몰두하게 되고 만다. 그래서 옛날 에피큐로스, 견 유학파의 대가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의 미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예배를 그들의 천박한 이야기로 더럽히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을 타파한 다음에 신앙을 세우는 일이 따르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 이라는 말로써 사도는 생명이 없는 무가치한 조작이요 잘못 신으로 불리우는 우상들을 여기서 암암리에 대조하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바울은 회개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다는 점을 밝히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의 의도이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 남아 있는 한 의에 대해서는 자유로운"것은(롬 620) 우리가 그 어떠한 속박도 받지않고 우리 정욕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바친 사람만이 그에게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크게 타락한 본성을 입은 그대로 이런 일을 해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 경외를 계속할 수 있으며 그를 순종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영생에 대한 소상으로 일깨워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당장 우리를 자기 편으로 끌어 당기고 말 것이다. 신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자극제이듯이 우리로 하여금 지치지 않게 하는 것은 최종 구속에 대한 대망 뿐이다. 그러므로 계속 경건한 생활을 끈질기게 이어 나가고 싶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소망에 온 마음을 걸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는데 바울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을 경우 우리는 잃어진 사람이요 소망이 없는 사람이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경우 생명과 행운은 우리에게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이 말은 어디까지나 신자들에게 해당할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악인들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심판관으로 오실 그것이요, 그들은 그를 기다리면서 벌벌 떨 수밖에 다른 재간이 없다.
다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신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 화해되어 있으며 마음에 화평을 누리는 자 들만이 이 구원을 깨닫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이름은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출 하셨지만 이 구출의 의미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말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모두가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롬 33 : 23)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파멸이 인류의 머리 위에 걸려 있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돌파구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바울이 이 직무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잘한 일이다. 심판이 언급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구속주로서 오실 것이라는 점을 경건한 자들이 깨닫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은사이다.
바울은 다가오는 진노에 대해서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일깨워 주고 그들이 현재의 생활을 생각할 경우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환상인 만큼 (히 11: 1)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를 측량하는 것은 마치 우리들이 누리는 순간적인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를 가늠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일이다.그러므로 악인들은 편하게 지내고 우리는 고난 때문에 몸둘 바를 모른다 해도 우리는 육신의 눈에 가리워져 있는 하나님의 재앙을 두려워하며 영적 생활의 은밀한 기쁨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10.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 ; 바울이 여기서 부활의 소망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은 사망이 현재 사방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 는 습관을 기르지 않을 경우 우리의 마음은 순간순간 넘어지고 말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으로 알고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낙심케 하는 시련이 수두룩할 뿐 우리의 마음을 북돋아 주는 것은 전무하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하나 더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우리를 자신과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삼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 시 구속주로 나타나셔서 전체 교회에게 그가 자신 안에서 제시하셨던 능력의 열매와 효력을 확대하시지 않을 경우 그의 부활은 무효가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여기서 암암리에 이야기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