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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행23:3)

1. 성경 (행23:1 ~ 1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1)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2)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3)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4)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5)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6)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7)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8)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9)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0)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 …" ; ·바울은 자기의 ‘선한 양심'을 증거함으로씨 시작하고 있다. 그런 국악한범죄를 자기에게 결머 지우려 하는것은 모든 무리가 부당함을 이해하게 하기 위함이다. 마치 그들은· 그가 하나님 예배를 모두 내던져 버렸다는 식으로 그를 몰아 세웠다. 다론 때에 하나님이나 종교를 경멸하는 사람이 되지 않다가도 무지 때문에 잘못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된다는 것온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에 이런 고소로 자극된 그들의 마음을, 자기의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달래기를 원했을 따름이다. 그가 불경건한 배반자였다는 여론이 그 제사장들의 마음을 급격히 찔렀던 일에 있어서 그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허락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그의 방어를 하기 전에, 그는 그 논쟁을 제거시키려 한다. 경건에 대한 그의 헌신을 내세워 자신에 대한 호의를 얻기 위함이었을 뿐 아니라, 비방을 미리 막고, 혹은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부당한 편견들을 거절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부당한 편견들을 볼 때 그는모든 무리가 홍분했고 부패했음을 알았다. 그밖에 그가 말하려고 한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서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지배하고 우선되지 않는 한, 아무도 경건에 대한 가르침을 스스로 적절히 조정할 수 없음을 교훈해 주고 있다. 이제 실제로, 그가 성 안에서 초기에 주었던 것 보다는 좀 덜 존경스러운 칭호를 그 제사장들에게 주었다 함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라는 이름의 영예를 그들에게 아직도 부여하고 있다. 그들이 그것을 받을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타 그들의 비난의 이유가 자신의 찰 못에 기인된 것이 아님울 증거하키 위함이었다.

 

"2 대제사장" ;. 누가의 이야기는 공인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 대제사장에 관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기 때 문이다. 시리아의 총독인 과드타무스 (Quadratus) 가 유대지방 행정장관 (Procuratorship) 으로 있었던 큐마너스 (Cumanus) 를면직 시키고 가이사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라고 그에게 명했을 때, 그는 대제사장 아나니아 (Ananias)를 함께 보냈다. 요세푸스는 아나니아의 자리에 누가 임명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명예가 요나단(Jonathan)에게 주어졌으리라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요나단은 큐마너스의 뒤를 계승한 통치자 벨릭스(Felix)의 기만과 배신에 의하여 후에 살해됐다. 왜냐하면 벨릭스는 자주 그에게 훈계를 받아왔었고, 그가 그 사람의 항거를 나쁘게 받아들였을 때, 그는 도라 (Doras) 라 하는 사람과 함께 자객들을 선동해서 그를 몰래 죽일 계획을 하였다. 그래서, 같은 요세푸 스의 자료에 따르면, 아그립바(Agrippa)왕은 그 제사장직을 파비(Phabi)의 아들 이스마엘(Ishmael)에게 수여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문제로 백성들을 조정하기 위해 (deprecationis cuiusdam causa) 로마로 갔을 때 ,  거기서 네로의 왕후인 포페 (Poppaea)에게 붙잡혀서, 아그립바는 그의 자리를 시본의 아들 요세푸스 샤브스 (Josephus Chabus) 로 대치 시켰다. 그러나 이 사람 역시 병이 들자, 그는 아나누스의 아들,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으 임명했다. 더구나 요세푸스는 이 마지막 사건은, 베스도(Festus)가 죽온 후, 알바너스(Albinus)가 그의 자리를 계승하려던 그 때에 일어났다고`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들이 어찌해서 이 아나누스(Ananus)에게 아나니아란 이름을 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확실히 이것에 관한 그럴듯한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두개인이었고, 어떤 합법적인 근거가 없이 주의 형제 야고보를 돌에 맞게 내놓았으므로 과감하고 거만했던 것으 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요세푸스를 믿어도 좋다면, 그는 누가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아나니아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나누스는 벨릭스가 그 지방을 떠난 후 몇년이 경과되었을 때 대재사장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었다. 또 다론 추측이 내 머리에 떠오른다. 그 당시 전체를 통해서, 공식적인 칭호와는 상관없이 지위에 있어서 의견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담당했던 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세푸스가 처음 아나니아와 이스마엘 사이에 몇년 동안을 공백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이 지도적인 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 시기 몇년 동안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경우는 아니라 해도, 그 도시가 점령당해서 죽은 아나니아가 글라우디우스 가이사와 네로의 통치 기간 중 임무를 수행했던 대제사장과 그 위엄성에 있어서 동등했 다는 것은 요세푸스에 의해 입증할 수 있다. 그렇다. 더군다나 비록 다론 사람들은 직위의 휘장이나 차고 있었지만 그는 마치 최고 통제력이 자기 손에 쥐고 있듯이 그의 권위는 존경받았다. 다시 그는, 마치 제사장직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맡게 된 사람처럼, 구별없이 lxpxcepeus>(아르키에류-스) 곧 대 제사장' (chief priest) 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제 독자들은 apxcepeus> (아르키에류-스)가 다른 귀절에서도 그러하듯, 이 귀철에서도 ‘가장 높은· 분' (summ_um)을 뜻하는 것일 뿐, ‘첫번째 지위' (primarium)를 뜻하는 것 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지 결정하시라. 왜냐하면 모든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들의 책을 통해서, 제사장들을 아론(Aron)의 서열에 따라, 제사장직 중에서 조금 열등한 서열에 속해 있던 레위인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그들을 lxpxcepecs> (아르키 에 레 이 스 ; 대 제 사장들) 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열적이고 현명한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 던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의 유고시 그의 임무를 대리로 수행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요세푸스에서 볼 수 있는 일들은 부분적으로는 〈고대사〉 (Antiquities), 제 20권, 3장에서 8장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유대인들 의 전쟁사〉(The Wars of the Jews) 제 2권에서 발견된다.

 

"그 입을 치라 명하니" ; . 우리는 보통을 넘는 광란이 이 무리에게 넘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격한 충동으로 사로 잡혀서 바울올 이유없이 매맞게 했을 때, 그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그렇게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미친 사람들의 호의를 얻으려고 그렇게 행하였다. 주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사단에 의해서 불경건한· 자들이 선동되도록 허락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온화함과 자기 통제의 .모든 모습을 잃어버린다. 반대로 위선자들온 절제의 어떤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 대제사장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엄숙함을 애써 보여주려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로부터 이 가면을 벗기셨다. 그래서 그는 거리의 일상적인 평범한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절제조차도 유지하지 못했고, 야수처럼 맹렬하고 격렬한 노(怒)를 발했다. 동시에 우리는 그 당시 교회가 얼마나 은혜스럽지 못하고 끔찍하게 방종했던가를 보게 된다. 공회(Council)의 대표인 아나니아는 그의 엄숙한 태도로써 다른 사람을자제케 하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어야 했을 때, 그는 모든 건제를 잃어버렸고, 그들을 자극해서 폭동과 찬0,1항으로 이꿀어 갔다. 따라서 기율(紀律)에 대한 존경심이 우세하게 되지 못했고, 무질서하고 야만스러운 행위가 지배했다. 그리고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최고의 조롱거리로 버려 두었다. 그들 종교 전체는 타산적이었고 부패했다 (venalis). 따라서 그들은 맹렬한 광란으로 돌진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세속인들 사이에서도 현오룔 일으킬 것이다. 자기들의 불경건함 에 대하여 망신을 당하계 하기 위해서이다. ` Irl

 

"3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 ; 바울은 적어도 엄숙한 말로 대제사장을 타이르거나 또 그를 하나님의 벌로 위협하지 않고 잠자코 그 모독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것은 헬라어 문맥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하나의 저주가 아니라, 벌의 선포와 연결된 비난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왼 뺨을 맞거든 오른 뺨울 돌려 대라" (마 5 : 39)고 그들에게 명하시면서 그분 스스로에게 부과하신 그 겸허를 바울이 간직하지 못했다고 혹 자는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 곧 그런 말씀들을 동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대중으로부터 침묵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사악한 자들의 뻔뻔스러움과 몰염치함을 조장시킬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받온 모욕을 견디는 일에 조급하지 않도록 마음을 제어 (制取)시키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자기 백성들이 이미 받았던 것 뿐만 아니라 두번째 해(害)를 겪도록 준비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그분께서는 모든 복수심을 꺾으신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에게 드러나고 있는 인내의 참되고 간단한 정의인 것이다. 그들이 분노로 끓어 넘치지 않고, 또 해 (害)를 해 (害)로 (ne certent mr.zleficiis) 갚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애써 극복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에게 가해진 해에 관해서 불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불경건한 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확인시켜 주고,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에 그들을 소환하는 것 을 금하는 것 도 아니 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온화해지도록 하고, 둘째로 나쁜 의지나 증오심 없이,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줌으로써, 그 대제사장이 자기의 폭정 속에서 스스로 자만심을 갖지 않도록 해준다. 따라서 바울은 대제사장이 율법을 어기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그 방법을 통해 그는 자기의 권능을 갖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는 대제사장이 마땅히 정죄 받으리라고 결론 짓는 다. 어느 누가 참을성을 갖지 못하고 오직 투덜대기만 한다면, 그는 비난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분명하고 신중한 고발이 하나의 침착한 마음에 서부터 나온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놓으신 한계를 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욕설이 거기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반대 의 견을 내놓는다면, 어떤 종류의 마음의 태도가 그런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가를 우리가 늘 주목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형제에게 ‘라가(Raca)'라고 하는 자는 공회의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미련한 놈' 이라 하는 자는 보다 심한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마 5 : 22). 그러나 비난을 해야 할 기회임이 분명할 때, 우리는 보다 엄격한 말로 이야기 해야만 한다.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도가 오직 첫째로 모든 분개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욕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추론한다. 따라서 욕할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 형제들의 어리석음을 주목할 뿐 아니라, 필요할 때는, 그들 형제들을 위해서 그들의 범죄를 서술해 주는 일은 합당하다. 바울은 대제사장의 모함을 욕설로 앙갚음 하기 위해,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였기 때문에, 심각하고 진지한 비난을 받아 마땅한 그 격노한 행동을 침묵으로 지나쳐 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특히 아나니아의 큰 위선을 그 감추어진 장소에서 대낮의 빛 가운데로 끄집어 내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따라서 우리가 뻔뻔스러운 사람들을 대할 때, 만일 우리가 좋은 점을 잘 제시하려고 갈망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분노의 감정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어떤 복수의 욕망도 우리를 비난으로 자극하지 않음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온화한 영이 우리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그들의 공격에 따라, 마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처럼, 불경건한 자들올 자유롭게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통제되지 않은 열정으로 어느 것이나 사려없이 내뱉는 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언자들 입이 분명하다.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 ;  그들 모두가 그와 똑같은 격정을 겪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아나니아가 모든 절제를 망각하고, 그런 졸렬한 방법으로 말해대고, 격정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을 때, 어째서 그들은 왜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그들의 공통된 치욕 때문이었다. 

또한그것은 위선의 실천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준열(峻烈)히 비난하는 반면, 자기들의 잘못들은 너그러운 태도로 눈감아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런 자만심은 폭정 (暴政)과 보조를 같이 한다. 통치권을 가전 자들은 어떤 자유도 철처히 주지 않는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그들 스스로에게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어떤 것도 허락하고 있다. 오늘날 교황권에는 더욱 심하다. 그들, 곧 순수치 못한 성직자들은 더욱 방종에 탐닉하면 할수록 또한 태평하게 더욱 방탕한 생을 살며 그리고 그들의 범죄 행위로 온 세상을 더욱 더럽히면 더럽힐수록 더욱 더 엄격하게 그들은 백성들을 마구 억압하고 그들을 침묵 시킨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감히 투덜멘다면, 그 자유의 작은 표현을 굉장 한 외침으로 간주된다. 마치 그것이 지독스러운 신성모독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5 형제들아, 나는……알지 못하였노라 ..• …" ;바울의 변명을 꾸밈없는 (figura carere) 것으로 생각한 자들은 자기들의 실수를 논박하고 있는 그 반대 의견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다. 그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실 바울이 그회의를 통괄한 그 사람이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상의 권위로 권력을 행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확실히 아나니아가 바울이 그의 서열(序列)을 모를 정도로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를 비난할 때 바울의 말은 논쟁을 이미 떠난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심판석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변명하기 위해 율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온순함도 갖지 않고, 계속해서 율법에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대제사장이 자기의 권력을 잘못 사용했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 바울은 그가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다론 사람들은 보다 미묘한 조작을 생각하고 있다. 곧 여기서 바울은 그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직책과 공적인 임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첫째로 바울이 그 제사장직을 존경했다면 그는 그것을 지닌 그 사람에게 보다 더 큰 존경을 드려야 했기 때문에, 이 설명은 억지로 붙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제사장직의 위엄성온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파괴되었고, 대단히 어울리지 않게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실권도 없이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만 가진 채, 그것을 최독하고있었던 그들에게 마치 그들의 완전하고 합법저인 권력이 아직도 영향력이 있다는 듯이, 예절바론 존경을 바울이 드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 자신은 어거스턴(Augustine)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 변명이 냉소적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평범한 말이 진리의 사역자(事役者)들에게 잘 어 울린다는 사실온 그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다. 풍자적인 말(irony) 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만의 술책으로 감추어진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토론하고 있는 주제를 보다 날카롭게 찌르기 위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종류는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도 무가치하지 않다. 따라서 그의 말은 형제들아,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성직자다운 모습을 볼 수 없노라'하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역시 바울은 출애굽기 22장 28 절의 말씀을 증거로 언급한다. 비록 모세가 사사(士師)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긴 해도, 그 의미는 어떤 법적인 지위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물론 시민의 질서(politiae)의 보존을 위해 조직된 위엄성이 있는 모든 공직은 신중하게 존중되어야 하고 영예롭게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통치자에께 또는 권위나 공적인 대표의 책임을 부여받은 자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누구나 결국 무정부를 추구하는 셈이 된다. 그와 갈은 종류의 욕구는 질서의 파멸을 초래한다. 그리고 심하면 인간성 자체를 파멸시킨다(humanitatem ipsam concutit).

 따라서 바울은 이런 비난을 제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전체 질서를 부패시키고, 파멸시킨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부인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통치자에게, 비록 그가 폭정(暴政)을 행사할 때라도 해도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지의 문재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의 직무를 잘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그 영예를 내어 버리려 하지 않을 때,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이 영예를 그대로 메어 내버림으로써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의 정치와 세속적인 주권이 무질서하고부패되었다 해도. 나는 세속적인 통치자와 교회의 지도자(praesules)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남기기 위해 그것에 복종을 원하신다. 그러나 영적인 지배가 신자둘의 양심을 타락시킨다면, 그 부당한 주권에 대해서는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거룩한 것에 대한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원수들이 구원의 교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제사장직의 칭호를 갖고 거짓되게 가식할 때 그렇고, 하나님 스스로가 질서를 만드신 그 주권을 그들이 타락시킬 때 그러하다. 따라서 오늘날 교황의 명에를 신자들이 벗어 던진다는 것은 허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신자들은, 교황의 법에 복종하려면 하나님을 반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6  바울이." ;  누가가 보고하고 있는 바울의 전략(stratagem)은 그리 스도의 종으로서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한 교활한 태도는, 거짓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속임수와 밀접히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사건의 상황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건이 다른 문제들 곧 그가 의식을 무시하고 이방인들을 구원의 언약으로 받아들였다는 문제들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사실이라 해도 아직 그가 거 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이 다른 문제들 때문에 비난받고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그가 그 한 가지 주제로 그 논쟁을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오직 그는 자기가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장함으로 사두개인 (Sadducees) 들이 자기에게 적대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는 자기를 모함했던 자들이 내분을 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양심은 완전히 깨끗했다. 그리고 그가 정당한 판단을 위한 하나의 좋은 모범을 보여 준다는 것온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격노로 차있고, 자기에 반대해서 들꿇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방어를 위해 허락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적들이 스스로 싸우게 하고 있다. 그것을 동해, 그들이 무지와 맹목적인 열심으로 일을 벌이고 있었음이 분명하계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의 전체 정황(情況)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설명하기를 원해서 그렇게 시작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마땅히 해야하는 것처럼, 깨끗하고 정직한 고백을 교묘히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이 막히고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저들의 맹목적인 중오에 휩싸여 있음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서 극단적인 구제책을 그가 사용했다. 그 결과는 상호 불화에 사로잡혀서 제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성이나 판단력으로 조정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요즈음 어떤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의 빛을 모호하게 하거나 바울의 지금 이 예률 자기들의 교묘함을 변명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쉽사리 논박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리를 희생시키고, 한 사람이 개인저인 이익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개된 적들로 하여금 그분을 공격하는 데서 그들 스스 로 싸우게 한 것이 또 다론 이유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신자들이 처희들끼리 불화한다 해도, 그들이 복음에 대항해서 전쟁을 해야 할 때에는 자신들의 싸움을 잊고 있음을 우리가 보게 된다. 사 단, 곧 분쟁의 아비는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경건을 소멸시키는 데 한 마 음과 한 뜻을 갖게 하는 이 한 가지 일에 일치하게 한다. 비슷하게 오늘날도, 교황권을 둘러싸고 불타오르고 있는 당파심이, 그들이 복음을 억누르려 는 열심에는 합일되어 아주 참참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전리 률 사랑하는 데 보다 결정들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연합해서, 그들이 보 다 훌륭히 저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어떤 종 류의 평화률 성서가 우리에게 명하고 있는가를 침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타"(마 5:9)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모든 사람이 주 안에서 한 형제로 연합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행하는 정도까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평 케 하는 일은, 우리가 주님의 동일한 보호아래서 마치 미디안 사람들이 나 팔 소리에 의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해친 것처럼 (삿 7 : 22) 사악한 자들을 격발케 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는다. 정직한 열십과 성령의 지혜가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방향을 잡아 준다면 가능하다.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 ; . 우리는 여기서 다시, 얼마나 유감스러운 무 질서와 파멸의 상태를 그 때 교회가 제시해 주었는가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환히 보게 된다. 신앙은 교회의 영혼이다. 일치보다 신앙을 더 특정지워 주 논 것은 없다. 그리고 분파보다 신앙에 더 반대되는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었을 때 일어나도록 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 은 제자들을 그자신의 생각으로 꿀때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의 단순 하고 순수한 전리 외에 다론 어떤 연합의 거룩한 띠도 있을 수 없다. 거기 서 분리되자마자, 마치 찢겨진 사지처럼 사람들이 각기 다론 방향으로 문려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율법의 부패야말로 유대인들 사 이에서 종파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비슷하계 주님께서는그분의 말씀이 교황 권 속에서 세속화되었을 때, 특히 여러가지 인간적인 조작으로 말씀이 부 패되었을 때, 비슷한 벌로 치셨다. 따라서 우리는 교황권을 갖고 있었던 자 보다도-,' 복음에 흉내만 내는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끔찍하고 무서운 붕괴에 대해 보다 머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표시는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의 배은망디한 태도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전노롤 일으키케 한 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의 얼굴이 많은 정과 홈으로 아무리 더 상한다 해도, 심지어 어떤 종류의 불구가 미래에 생긴다 해도, 이것은 우리를 도와중 수도 있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날에 교회를 말할 수 없이 훌륭한 방법으로 파멸에서부터 건져주실 것처럼 말이다. 이와같이 어떤 씨는 하나님의 은해로써 늘 남게 될 것이다. 사태가 대단히 무질서해 있을 때, 어떤 철망도 이따금씩이라도 신자들의 마음을 몌 앗아 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 방패를 밀고 나가는 법을 빨리 배우도록 하자. 그 실수의 두꺼운 안개 속을 헤매고 있고 미신의 커다란 언덕에서, ‘자유분방한 종파를 만들고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서 교회를 보존하셨던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교회가 결코 철저히 파멸을 겪 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똑같은 일이 교황권 속에서도 일어났다. 왜 냐하면 하나님 예배가 그 속에 참겼고, 구원의 교리가 억압되었고, 하나님의 왕국이 밀려났고, 불경건한 것이 공공연히 휩쓸고 다닐 때에도, 하나님께서 는 그럽 에 도 불구하고, 숨겨 진 남은 자(a hidden remnant)를 구하셨 기 때 문 이고 또 어떤 밀(wheat)은 늘 잡초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예를 비교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우리가 그 교황권에 대해 동 렬히 비난할 때, 그 고용된 대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몇 세기를 거치면 서 완전히 소멸되 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다고 반박해 온다.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경외심을 지속시켜야 하는 자들이 그분을 떠나 고 그분을 버릴 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 남은 자들이 하나도 없다고 우 리가 실제로 상상함과 같다. 사실 우리는 교회가 그와 같은 폭군들에 의 해 부패되었고, 하나님의 성전은 제속화 되어서 교회가 돼지우리와 거의 다 를 바 없게 되었음을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무리들은 훈어졌으며, 그의 웅 온 파괴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지어 그들이 훈어졌다 해도 주님께서 는 자기의 선덱한 자를 아셨고 그들을 자기의 날개 아래 비밀로 감싸주고 계셨으나, 교회는 인간의 눈으로부터는 숨겨져 있었다•· 교황들이 자기들의 명예스러운 칭호에 대해 자만하고 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는 다음의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 죽 유대인 교회를 치명적인 불화로써 .칼라 놓은 자 들은 일반 대중이나 몇몇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타 바로 제사장들이었던 것 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황과 그의 모든 권속들의 무지를 처지하는데 확고해 지기를 주처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교황과 그 모든 권속들에 대해서 우리 는, 과거에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제사장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투쟁을 해 야 한다. 교회에 대한 존경이 거룩한 사람들로 쓸모없는 불경건한 폭군 제 사장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교황들이 거룩한 교리는 이미 버릿으면서도 스스로 기만스럽계 명하고 있는 무가치 한 그 위 장(僞裝)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당시에 사람들이 세 종파로 나뉘어져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누가는 에센파(Essenes)를 생략하고 오직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만을 언급한다. 왜 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키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들에 대 해서 거의 인정된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분리’라는 것에서 그 런 이름이 붙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된 거룩 때문에 그 남은 무리로부 터 스스로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두 개인들은 마치 그들이 O'P.~""~ (zaddukim ; 짜두一킴 -; 町)곧 ‘의 로운 사람들' 인 것 처 럼 ‘의 로움' 으로 부터 그 이름을 취했다. 그러나 내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나는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끄집어 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에게 차라리 동의한다. 왜냐하면 써i~(파루-쉬)는 해설을 뜻하고 있 고, 그것으로부터 ‘해석자’ 곧,¢어.,~ (駐5)이타는 이름이 나오고 있기 때문 이다. 다론 한편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예언서의 순수한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았음을 우리 가 알고 있 다. 그들은 그 순수한 가르침 을 자기 들이 조상들로 부터 물려 받았다고 자랑하는 자기 들의 생 각에 서 조작해 낸 것 으로 혼합시 켜 버렸다.

 

"8  이는 사두개인은 ....." ;. 누가가 그둘 분파들이 불화하도록 세 가지 점을 지적했다 해도 곧 이어 그는 그것을 둘로 제한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천 사들이나 영들의 본성(ratio)은 결국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바리새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과 인간과 천사의 영이 불멸이라는 이 두 가지 률 모두 고백 한다고 말하고 있 다. 그리 고 누가는 바울이 스스로 바리 새 인이 타고 고백했다는 것을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바울은 그들 이 세워놓은 모든 사상에 동의했던 것이 아니타, 죽은 자의 부활에만 동의 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큰 잘못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심에 얼 마나 업격한가를 알고 있다. 따라서 예외가 부가되어야 한다. 바울이 자신 을 바리새인들과 모든 점에서 연결시키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사두개인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곤 했기 때문에 그들이 완전히 에피큐리안(Epicureans)과 같았다고 생각할 이유는없다. 왜 냐하면 세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으며, 각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따라 보상받으리라고 그들은 고백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에피큐리안보다 조금은 건전하다. 그러나 어리석고 정신나간 것이어 서 이생의 최에 대한 상이나 벌을 포함시키지 못했다. 성경을 떠나서 생가 해 보면 선인과 악인은 많은 문제들로 고통을 당하거나, 혹은 그들 간에 구 병이 없이 친절하고 관대하계 취급받는다는 것은 경헝을 동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불신자들이 즐거운 생을 보내는가 하면 시편 73 핀 4절이 보여 주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비참하계 괴로움을 당한다. 따라서 하나님 의 심 판을 인간의 현재 상황이 좋은가 그 반대 인가에 따라서 측정해 보려는 사람은 누구나 결코 자기의 믿음을 하나님께 대한 쾌락주의 자들(Epicurian)의 경멸로 빼앗기고 말 수밖에 없다. 세상의 것을 초월한 것율 맛보지도 못한 채, 변화하고 참정적인 이 생 (生)으로만 만족하는 것은 금수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그런 과오는 마치 그것이 끔찍한 괴물이 타는 식으로 철저히 피해야 한다. 경건이 비목 지상의 삶의 약속까지 하고 있다 해도, 우리의 희망이 이 세상으로만 제한된다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인간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너들은 이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곧 군 대에 막 입대한 신병(新兵)처럼 자기들의 눈을 하늘로 향하고, 끊임없이 최 후의 부활의 영광을 생 각하는 일이다.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 …" ; 8철의 이 부분은 3가지 면으로 섣명된 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성령을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아 주 비적절한 견해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과오들과의 관련 속 에서 생각해 볼 때, 사두개인들이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해도, 성경온 하나님의 성령의 이름을 관심있게 보도록 우리를 주목시키고 있기 때문 에, 나는 바리새인들이 가볍게 그리고 어렵풋이 믿었던 것을 사두개인들이 부정했다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신 념 은 분명 하지 않기 때 문이 다. 그들은 하나님 의 존재 (essentia)에 서 성 령 의 독수한 인 격 (hypostasin) 을 인정 했 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와 영은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마치 똑같은 일이 두 번 언급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모호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반복해서 말할필요는 무엇인가? 확실히 그들온 누가가 아무 구별없이 말한 것처럼 보이 는 그 다음 귀절에 의해서 잘못 인도되었다. 그러나 천사들과 사람들의 영 온 똑같은 본질과 실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갈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注6). 따라서 누가의 참 뜻온 사두개인 이 천사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거부했고 둘째로는 어떤 종류의 영에 대한· 지식도 거부했다는 것임온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바울이 자신이 교리에 있어서는 바리새인이라고 선언할 때, 그는 오 늘날 비슷한 과오를 범하고 있는 모든 열광자들을 공공연히 나무라고 있는 셉 이 다. 천 사와 악마는· 선 한 영 감 (inspiration) 또는 나쁜 영 감 외 에 아무것 도 아니라고 우스광스럽계 상상하는 어떤 세속적이고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변명도 없이, 그 세속적이고 무지한 자들은 성경에서 선한 천사와 악 한 천사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은 이교도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인즉, 제상 사람들이 수궁하고 있는 신념은 그 기원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있는데, 이교도들은 신화와 같은 꾸며낸 이야기들로써 자기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그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들을 부패시켰던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관한 한, 심지어 오늘날 아무 데도 쓸모없이 밥벌레와 갇온 사람들이 영혼은-부활의 날까지는― 죽을때 그냥 소멸된다고 상상하고 있 으나, 그들의 정신나간 태도는 비슷하게 누가의 증언에 의해서 논박되고 있 다.

 

"9. 크게 휩화가 일어날새" ;  누가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불화는 이제 좀더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곧 그들은 상이한 견해들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 라, 소리 지 르며 소란을 피 웠 다. 따라서 a-raacS'(스타시 스)는 ‘불화' 보 다 더 심한 것을 뜻하고 있다. 더구나 이 귀절온 어떤 악한 불화가 그들 에게 있었는가를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기원율 야심에서부터 취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사람들은 쉽게 논쟁으로 뛰어 들게 되고, 곧 이어서 스스로 완고하게 된다. 사태가 그렇게 전전되면, 판 단이나 중용이 개입될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 경우에는 더 이상 결정을 내 럴 수가 없게 된다. 바울을 비난하고 있었던 자들이 갑자기 그를 변호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이 판단력있게 행했다면 그것은 아주 질서있게 처리되 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두개인에게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두개인들에 대한 증오로 불타 있었고, 그들의 눈은 바울의 경우에는`가리 워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가열된 다툼에 반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혼돈과 무질서로 빠뜨리기 때문이다. 혹 영이나 ..•.•• 이것은 확실히 성령에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존경스럽게 혹은 겸손하계 이야기된 것온 거의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가르침이 하늘로부터 기원을 갖고 있다고 주장되자 마자,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불경건하계도 하나님께 대항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와같은 갑작스러운 변화롤 일으키계 했는가? 서기 관둘은 바울울 예 언자로 간주했 다. 그들이 언제 는 자기 들의 손으로 그롤 죽 이려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그를 편견을 갖고 처주하지 않았던가? 사두 개인과의 싸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더구나 그들이 이런 말들을 향 으로써 자기들의 검으로 자기들의 목을 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늘로 부터 주어전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경멸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도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전지하게 귀담아 듣지 않는 자들이 의 신과 의혹의 상태에 있는 자들이고, 잘 알려진 어떤 일에도 가끔 정신이 혼 돈하는 자들이 타는 사실을 보게 된다. 왜 냐하떤 그둘온 어 떤 전리 도 포착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의 영에 의해 우리의 연구롤 하 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 이 배 우도록 하자•

 

"10절" ;. 다시 우리는 악한 논쟁이 얼마나 잔악한가를 보게 된다. 그것이 한 번 발효되면, 가장 현명한 사람들조차도 스스로의 자제력을 잃게되는 그와 같은 격렬한 감정을 일으킨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발단의 조침을 보이떤, 곧 바로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자. 그것이 고조되었을 때 점검함으로써 그 구제책이 너무 늦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떤 그처럼 빠르게 번지는 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부장이 바울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자로 임명되었을 때, 한번 더 그는 바울을 자기의 군대를 통해 죽음의 손아귀에서부터 빼내고 있다. 비록 그 천부장은 바울을 돕기 위해 매우 부 지런히 서두르는 것도 단지 큰 소동과 살해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고하더라도, 주님께서는 하늘에서부터 당신의 종을 도와주시려 하고 있 고 맹인과 같은 천부장의 손을 바울에게로 인도하신다.

 

"11 그날 밤에… ." ;.•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격려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태가 그처럼 심각할 때라도, 그가 그 끔찍스러운· 공격들에 대해 굳건한 정신으로 맞서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여러가지 불안들에도 당황하지 않거나, 동시에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온 확실히 불가능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필요했다. 사실 이전의 사건 들, 곧 그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의 대상이었음을 기억하게 된 그 사 건들은 그의 희망을 확장시켜 주고 지속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지 않도록 했다. 커다란 위험 속에서 사단은 즉시로 새로운 공포들을 계시한다. 그러한 공포로써 사단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둘을 마치 구름이 가리우듯이 온전히 가리려 하거나, 그렇지 못할지라도 희미하계 하려 한다. 그것 때문에 그러한 약속들에 대한 기억은 새 신앙은 신선한 뒷받침으로 도움을 받아서 끊임없이 견고해 로와져야 하고, 져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 자신이 스스로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냉정하고 텅빈 위로인 것같이 보인다. 즉, 그것은 그분이 ‘담대하라. 더 큰 어려운 상황이 너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판단에 따르면, 오랜 기간 동안 쇠사슬에 매여 고 생하느니 단번에 죽어서 재빨리 그 어려운 형편을 끝마치는 것이 낫다고 생 각이 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유롤 약속하지 않았고, 심지어 훌륭 한 결과조차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것 만으로도 그를 압박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비록 그분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즉시 자신의 손을 내뻗치시지 않으실런지 모르나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이러한 확신로 배우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 같은 사랑의 중거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한, 결코 낙담 하지 말자.

 그러나 지금은 그 말씀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주님 자신이 환상으로 나타나시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약속들율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계심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만일 천사가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께서는 심지어 지금도, 이런 종류의 확인을 부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 말씀에만 만족하면서 우리는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그 도움을 참을성있게 예견하는 것이다. 이 외에, 어떤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진 천사들로부터 말을 듣는 것에서도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님께서 자신이 친히 주신 약속들을 성령에 의하여 신자들의 마음에 보증하시는 사실이 헛된 것이 아니다. 한편, 그분께서 아무 목적도 없이 그 약속들을 가르치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성실하게 그 약속들을 마음에 기억하는 계속적인 신앙 훈련을 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바울의 신앙이 새로운 도움으로 격려되는 것이 필요했다떤 그 이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은 인내로 채워져야 한다. 고.동 의 착잡하고 김 회로를 극복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