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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행 22:1)

1. 성경 (행22:1 ~ 16)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1)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2)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3)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4)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5)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6)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7)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8)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9)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0)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1)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2)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3)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4)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5)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6)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절”  ; 만일 사람이 바울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가를 그 연설의 시작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방해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고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적절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왔었기 때문에, 그는 세인(世人)의 눈에는 충성 스럽고 양심적인 하나님의 경외자였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적대자였다. 그래서 그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율법의 가장 뚜렷한 수호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세째로 그가 새로운 종교로 돌아선 것은 일시적이거 나 우연한 일이 아니었고, 그가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친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by a heavenly oracle) 정복되고 죄인으로 판명 되었을 때 였다. 네째로 그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믿을 만한 선생을 허락해 주셨고, 그로부터 그는 많은 것을 정확하게 배웠다. 마지막으로 그가 예루살렘에 되돌아 왔을 때, 그리고 그 자신의 지방 사람들을 섬기기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것은 우여히 된 것은 아니며 또는 그 자신의 민족에 대한 중오에서부터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에게 구원의 교리를 이방까지 멀리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부형 들아~~~~”  ;  바울은 그들에 의해서 죽게된 것으로 단념하게 되었던 복음의 적들에게 아직도 경의를 표하고 있음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형제애의 연관성있는 유대관계를 깨뜨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함으로써 모든 상당한 동급 (等級; every dignified description)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백성들의 한 사람으로 여기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그 모인 사람들을 그토록 애착하면서, 그리고 주요한 사람들로 존경하면서 연설하고 있을 때 그는 신실하다. 그리고 확설히 그들이 모든 존경을 받기에 가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들이 노골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존경심으로 인정했던 하나님의 양자(養子) 삼으시는 은혜는 가치가 있었다.  따라서 ‘부형들아' 하고 부를 때, 그는 그들이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그토록 많았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으켜 주신 그 세우심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연설은 그토록 질서가 있었다. 그는 애써 그들을 만족시키고, 아낌없이 솔직하게그분에게 아직도 감소되지 않고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교황의 자만심이 어째서 미움을 받고 있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가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없이. 그리고 교회의 어떤 동의의 투표도 없이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모든 영예의 칭호들을 탈취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둔 폭군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높여주시고 자신의 권리를 그들에게 물려주시며 당신 자신을 땅에 굴복시킨 듯이 그들은 생각 한다.

 

“2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  각기 다론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우리의 모국어로 이야기하는것을 들을 때가 기쁘다는 것은 혼한 일이다. 유대인들은 또 다른 특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자기 민족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 감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가 본래의 언어를 싫어했으며, 바울 자신이 그 나라 태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 나라의 언어조차 배워보지 못한 유랑자였다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 모국어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보다 상태가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이 히브리어로 말했는지 아니면 시리아어로 말했는지는 확 실하지가 않다. 포로기 후에 유대인들은 부패하고 변질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대아어 (Cha}daea.ns)와· 시리아어 (Syrians)로부터 많은 말들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장로들에게는 물론 대중에게도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도처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언어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측한다.  

 

“3 나는 유대인으로,” ;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혼잡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기꾼들과 게으름뱅이들(社2)은 자기들의 범죄를 감추어야 할 때는 유대인으로 행세하곤 했다. 따라서 스스로 그와 같은 의심을、제거하기 위해 바울온 자신의 출생으로부터 이야기롤 시작한다. 그는 거기서 자기가 잘 알려져 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어린 때부터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전술은, 단지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훌륭하게 교육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하는 것은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행해진 것처럼 보인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보다 분쟁을 잘 일으키게 되는 것은 없다. 사실 당시에 교회 당국은 그토록 붕괴되었기에, 종교는 종파로 단지 나뉘어진 정도가 아니라, 비참할 정도로 갈기 갈기 찢겼다.

 따라서 바울은 그 자신의 선생이름을 들어 그가 자기들의 조상들의 숭배를 그쳤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에 의해서 성품이 계발(啓發)되지 않아 그들 자신의 본래의 성질을 상실하고 타락하계 된 많은 사람들을 바울 또한 어떤 훈련이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특별히 자기가 율법을 잘 교육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소란을 일으키고 그둘을 잔인한 사람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지의 소산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 사람이 이전에 언급된(5:34) 가마리엘인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제자들은 ‘발 아래 앉도록' 이야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강력한 판단권을 부여받지 못해서 그들의 태도는 점잖고 겸손하계 해야 하기 때문이 다.

 그들온 그들의 스승에게 마음으로 복종하고 그 말씀들을 잘 들어야 한다.  따라서 마리아는 그녀가 그분의 교훈을 귀 기울여 들을 때, 예수님의 발 끝에 앉도록 이야기되고 있다(눅 10 : 39). 만일 이 존경이 지상의 선생들에게 돌려 진다면, 그리스도가 그의 하늘의 보좌로부터 말씀하실 때 그분께 우리 자신을 겸손히 보여 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발 아래 앉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적절한가? 이 이야기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 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선생들보다 더 높고 더 능력있다는 거짓 확신으로 차 있지 않게 하고, 오히려 조용하고 온화한 태도로 스스로를 그 선생들에 의해 인도되도록 경고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  벌게이트역 (Vulgate)은 이것을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진리에 따라 교육받았고 ... ,라고 문자적으로 번역해 놓았다. 그러나  '아크리베이아' 는 ‘진리 ’ 라기 보다는 ‘엄격한 방법’을 뜻한다(駐3).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한 가지로 똑같은 형태의 율법을 갖고 있었다면 이 훌륭한 방법 (exquisita ratio ; 莊4)이란 무엇을 뜻하는 가?"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가 영향을 받았던 지식의 보다 순수한 형태를 일반적인 가르침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내게 보인다. 그 일반적인 가르침이란 율법의 본래적인 뜻보다 오히려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주님의 율법이 당시에 많은· 불순물에 의해 부패했었고 심지어 가장 훌륭한 선생들에게서조차 그러했고, 종교가 철저히 대중 가운데서 타락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그들 조상의 율법을 훈련받았다는 사실 속에서 정당한 자존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가 그 군중들 중 어떤 사람처럼 수박 걷핥기식으로 배웠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적절하고 부지런하게 그리고 결코 같은 말이지만 엄격하게 말한다. 그러나 적절한 교육을 받은 많온 사람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향락적으로 (epicurean) 멸시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 열성적이었음을 중명하고 있다. 마치 그가 경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배운 것(doctrina)에 연유되었으며, 자기는 세상 사람들처럼, 곧 모든 것을 한꺼번에 고의적으로 섞어버리는 자들처럼 거룩한 것을 제쳐버릴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고 말한 바와 같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시의 유대인 중 남은 사람과 같이 스스로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열심은 경솔한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이 과거 자기가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 그의 명예가 될 수 있다.

 

“4,5절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  둘째는 그가 그라스도의 가르침에 적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되돌아 왔을 때까지, 그 도를 공격하고 자기의 길을 강요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이 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행동의 중인들로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인 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갑작스런 변화에 관해서 어떤 의심도 남아 있 을 수 없었다.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았다는 그의 전술은 유대인들, 곧 그가 ‘지방 동료들'이타 불렀던 자들에게 언급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보다 명예로운 명칭으로 그들을 달래려고 의도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순수 하고 합법적인 그 나라 대생을 확인시키려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우정(con iunctionis)을 위 한 그의 갈망이 있 었 기 때 문이다.

 

“6 가는데 다메섹에~~~~” ;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9장에 서 했기 때문에, 내가 거기서 말했던 것을 단지 간단하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회심하계 되었음을 중거하기 위해 그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한 이 귀절에는 독특한 차이점이 있다. 이것은 그의 연설 중 세번째 부분이다. 다른 면에서 볼 때, 그 변화는 일관성이 없는 표시라든가 성급하다든가 혹은 다른 불명예의 낙인이라든가 하는 표시에 벗어나서 생겨날 수가 없었다. 한번 들어갔던 의무의 길(pi€tatis)에서 후퇴하고 .그 다음에 명령들을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더 용서 못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사 사람들이 자기 말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바울은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을 주목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 지상의 뜨거운 중기에서부터 나온 불빛이 한밤에 비칠 때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정상적인 경우와는 거리가 멀다. 한낮에 불빛이 홀연히 비쳤을 뿐 아니라 빛의 광채같은 것이 그를 둘러쌌다. 그래서 그는 공포로 말에서 떨어쳐 땅에 엎드러쳤다‘ 하늘 로부타 들려온 음성 속에 또 다론 기적이 있다.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처럼 그의 동료들은' 들을 수 없다는 사실 속에 아직도 또.다론 기적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마지막 기적이 뒤따른다. 그가 다메섹으로 보내진 후의 그 걷 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아나니아(Ananias)가 그 름 만나러 오고 있기 때문이며, 다시 그의 시력이 순간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 바울이 바리새적인 자만심으로 ’으시댔기 때문에 그가 땅에 엎드러진다는 것은 적합한 일이다. 마치 공기가 빠져 나간 것처럼 수축돼서 그가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을 마음대로 거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신탁도 무시하 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계속 더듬거리기만 했다면, 그러나 그의 마 음은결코신앙의 복종으로 기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맹렬한 힘으로엎드러졌다. 그가자전해서 스스로를 겸손하계 배워나가도록 하기 위함이 다. 더구나 이 사람의 격정과 분노를 억제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 가 운데 짧은 질책이 둘어 있다. 동시에 비범한 우]로가 여기에서부터 우리에게 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들의 편(persona)이 되셔서 신자들이 상해(傷害)를 입은 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상해를 입으신 것이타고 말씀하 고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을 뿐 아니타, 또 우리 속 에 계셔서 복음의 박해하는 데 굶주린 원수들을 물리치신다는 아야기를 듣는 것보다 박해의 쓰타림을 부드럽계 해주는 데 더 좋은 것은 없다. 지금 어리 석은 자만십으로써 가련한 교회를 조롱하는 피에 굶주린 복음의 적들은 그 돌이 누구를 상처입히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 누가의 이 야기 (9 : 7)에 나오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나는 이미 보여주었다. 거기서 누가는 바울의 동료들이 깝짝 놀라서 있었을 때 그들은 그 소리는 둘을 수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여기서는 바울은 그들이 광채를 보았다 해도, 바울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그분의 음성을 그들이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모호한 소리를 알아 차렸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비록 그들이 바울 자신처럼 그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억제시키고 질책으로 그만을 전압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 다. 따라서 그들은 한 음성을 듣고 있다. 왜냐하면 한 소리가 그들의 귀를 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람이 하늘로부터 말하고 있다 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 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물론 바울을 감싸고 있는 빛의 광채를 보고 있으나, 그들은 하늘로부터 그 음성을 보내고 있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 한다. ~

 

“10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 이것은 길들여전 사람의 소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 대한 참된 회심(回心)이다. 우리 모두의 격정을 뒤로 밀쳐 놓온채, 우리는 그의 멍에에 우리 목을 자유롭게 내걸고 그가 무엇을 명하든지 움직일 준비를 할 때 그러하다. 부가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묻는 것은 올바른 행위의 과정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없이 회개를 생각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큰 혼잡만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바울의 선생으로 지명하시면서, 바울을 가르치실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기 때문이거나 바울을 면전에서 모욕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법으로써 주님께서는 교회의 외적인 목사의 직분을 칭찬하시고 명예롭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마지못해 듣지 않도록 보편적인 경고를 주었다. 곧 잇달아 오는 것들은 대체로 똑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곧 바울은 장님이 되었고, 자신을 하나의 배우는 자로 보이면서, 그가 그의 신앙의 겸손을 입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분이 비추시기를 원 하는 자들은 그렇다. 그러나 일반적인 법칙, 곧 하나님에 대해 현명해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는 바보가 되는것을 보리라는 사실은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다.

 

”12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  바울은 이제 네번째 주장을 하고 있다. 곧 그가 기적에 의해 충격을 받은 다음,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했을 뿐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에 의해 적절하고 건전하게 교훈받게 되었음을 주장한다. 아나니아(Ananias)가 바울을 만난 것은·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도에 의한 것이었음을 나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서'라고 묘사하고 그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그들이 품을 수 있었던 비우호적인 견해를 미리 선수를 써서 막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나온 어떤 선생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철처하게 율법의 배반자를 혐오했다.

 따라서 바울은 아나니아가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했을 뿐 아니라, 그의 경건이 널리 알려졌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의심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율법에 의하면'이라는 귀절은 "그가 율법에 따라 인정받았다"는 다음 귀절 의 어떤 부분과 어색하계 연결되고 있다. 오히려 아나니아의 종교는 이런 성격을 봉해서 이방인들의 미신으로부터는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와 대조가 되도록 하려는 행위의 공적을 세우기 위한입장에 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가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도 모 는 좋지 않은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임을 보이기 위해 언급되고 있다는 사 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갈이 그가 한 마디 말로 바울의 시력을 회복시켰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 는 것이 명백히 드러 난다.

 

“14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멸의 생으로부터 건져주시고, 그의 은혜로운 선하심으로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보다 우리를 하나님께 열심히 돌아서게 하키에 더 저철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아나니아는 그렇게 말을 시작한다. 곧 그는 ‘‘하나님이 너를'택하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그가 겉킬로가 서 방항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눈길을 바울에게서부터 자신 에게로 돌리시고, 그의 구원에 대해서 완전히 적대했었음을 바울에게 경고 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은 그 자신의 자유 의지를 몽해 하나님의 은혜를 예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궤변론자들(sophists)이 상상하 는 모든 가능성을 파괴한다. 그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 이 라고 무름으로써 그는 그 약속들에 대 한 기억을 새롭게 한다. 바울의 최근의 부르심(call)이 그 약속들과 관련되어 있고 그리스도에게 전향하는 자들도 율법을 포기하고 있지 않음을 유대인들 루' 알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런 말들을 통해 바울은 그가 이건에 자기 스스로 단언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고, 과거 유대인들에 의해 이미 예배를 받으셨던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으 며, 오히려 그가 율법으로부터 배웠던 조상들로부터 전래되어 온 예배를 계 속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 문제에 걸릴 때, 바울의 모범을 따라, 교황이나 마호멧 교 도들이 행한 것처럼 또는 모든 이단들이 늘 그러는 것처럼 새로운 어떤 하 나님 을 상상하지 않도록 하자. 오히 려 조상들에 게 오래 전에 자신을 보여 주 셨던 하나님, 곧 율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말씀을 통해서 보여 주셨던 하나님을 고수하도록 하자. 이것이 우리가 계속 이어야 할 참 유물 (遺物)이다. 교황들이 공허하게 자만하는 그런 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떤 교 황들은, 그들이 보다 항법 적 인 조상들 (a legitimis patribus) 로부터 떨 어 쳐 나간 이후로, 스스로가 어떤 새로운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이 오늘의 유대인에게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는 율법서와 예언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의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허 구가 되었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열조 들의 하나님'이라 기꺼이 불리어졌던 그분께서 결국 그의 아들의 인격 속에 서 (in the Person of His Son) 나타나셨기 때 문이 다. 따라서 그분은 이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보다 적절한 칭호로 불리어지고 있다. 결국 아들 을 거분하는 자는 아들과 분리될 수 없는 아버지를 가질 수 없다 . . 그러나 아나니아는 복음의 전리가 이제 바울에게 비치고 있는 것은 하 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덱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으로부터 그 사실이 그 자신의 행위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고, 그 사건의 겅 험 자체가 그것을 분명히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복종시키셨을 때까 겨, 바울보다 더 완고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산인과 기원을 찾으려 한다면, 아니나아는 우리로 하여금 바울을 선택하셨덥 하나님의 견 정울 상기케 해 준다. 그리고 확실히 인간이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얻으려 고 하키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다. 그리고 바움에 관한 아나니아의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신앙적 보 화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선택된 자들 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다음`귀절에서 보 다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들을 동해 여러 곳에서, 그 아 들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해 오셨는데, 이제는 그 아들 안에서 자신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셨고 그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셨기 때문이다(히 1:1).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 거의 모든 헬라어 사본들이 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나는 어째서 에라스므스(Erasmus)가 그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충성으로 애써 번역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독자들온 그 뜻이 그렇게 되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억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의인은 그리스도께 대하여 사용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방법이라야 그 연결이 부드럽다. 왜냐하면 곧 이어서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다는 이야기가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거룩한 사항들 이 갖고 있었던 가장 위대한 갈망은 그리스도를 보는 기쁨을 허락받는 것입 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시몬의 고백에서도 역력히 볼 수 있다. "주재여 이제논.; ••.•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 았사오니……"(눅 2 : 29). 그리스도 자신이 많은 임금과 선지자들이 주님을 영심히 보고자 했음을 증거하고 있다(눅 10 : 24).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아주 정당하계 격찬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일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눈으로 본다는 것이 거 의 가치가 없고,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 음성을 듣게 하신다’는 것 을 덧붙인다. 아나니아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그분의 아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중인이 되시는 위대한 영예를 바울이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셨던 그 목적을 부가 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해서 바울을 준비시키고 있다. 곧 바울은 제 힘으로 개인적으로 배우도록 할 뿐 아니타, 그가 온 교회의 선생이 되리타는 사실 때문에 보다 열심히 전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  아나니아가 신앙(pietatis)의 기초로 바울을 성실히 훈육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참 신앙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를 세례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많은 일들을 제외하고 오직 간략히 요약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바울이 약속된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되었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그의 세례를 지연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매우 올바르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왜 주처하고 있느냐?" 라고 말할 때, 그는 바울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책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세례를 덧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더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0장 47절에서 유사한 문장을 발견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그리고 아나니아가 "너의 죄를 씻으라”고 덧붙일 때, 그는 마치 그가 "세례를 통해 너의 죄를 씻으라”고 말한 것처럼 이런 말들로써 세례의 힘과 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당한 선을 넘어서서 보다 많은 것들이 외적이고 부패될 수 있는 요소들로 돌려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과연 세례가 우리의 죄 사함의 원인이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간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피가 단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죄의 보상이기 때문에, 또 그 피는 이 목적을 위해서 단 한번 흘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신앙을 통해 그것을 일깨워 주면서 계속해서 우리를 씻기고 계시기 때문에, 이 큰 능력은 물의 상징으로 전환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모독이 된다. 그리고 얼마나 사람들이 이런 미신에 잘 빠지는가를 경험을·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신자들은 외적인 표시에 자기들의 신뢰를 두는 것이 두려워서 세례의 힘을 너무 많이 약화시켰으나 보다 적당한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 성례전들이 만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희미하게 할는지도 모른다면 보다 적절한 위치에서 지켜지도록 하기 위함이며, 아직도 그것 자체의 효능이나 가치를 결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만이 그의 아들의 보혈로 우리를 죄에서 씻겨 주시고, 이런 씻김이 우리 속에서 효과가 있게 하시려고 성령의 비밀스러운 힘으로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고수해야 한다. 따라서 죄의 속죄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 외에 어떤 다른 구속주(originator)릅 바라서도 아니 된다. 그리스도의 피보다 다론 어떤 물질적인 원인을 상상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이 외형적인 원인이 될 때, 성령께서 실제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담당하시나, 그러나 그보다 낮은 방법, 곧 복음의 가르침이나 세례 자체가 부가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하나님만이 성령의 내적인 힘에 의해 행동하시나 그러나 그것온 그분이 즐겨하시는 것처럼 적당하다고 여기시는 그 수단과 방법 (media)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그분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분께서 성령이나 혹은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취한 어떤 요소를 무시하시기 때문이 아니라도 그 표시 자체가 우리의 약함을 위한 버팀목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만을 동해 죄의 용서를 받게 하기 위해 우리의 신앙을 도와 주기 때문에 영혼의 물두멍(lavaorum)이라 불리어진다. 따라서 그가 씻음을 언급할 때, 누가는 그 원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 면 그 상징을 동해서 그가 자기의 죄들이 용서되었음을 보다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허한 형태(figuram)가 세례 속에서 우리에게 주 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제공(rei exhibitionem)이 동시에 그것과 연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어로 우리를 속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형태아래 담겨있는 의의를 참으로 성취시키시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전에 매어있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의 외적인 처리는, 그것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면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일어날 수 있는 다른 질문도 이점에서 대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하나님의 은해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죄가 이미 사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단지 세례에 의해서 씻검을 받았을 뿐 아니타, 그가 받았던 은혜를 새로이 확인도 하게 되었다.

 

“주의 이름을 불러(注7)~~~~~~” ;  여기서 주님이란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음 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례받을 때 불리어지기 때문이 아니타, I 하나님께서 세례를 동해 우리에게 표시해 준 모든 것을 고리스도(ab ipso; 駐8)로부터 찾도록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그리 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세례에서 현처하게 드러나신 분으로 지시되고 있는데 그 리스도께서는 성부에 의해서 우리에게 보내어지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봉해서 자신의 은혜를 퍼부어 주신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론다는 것은 성부와 성령을 그자체에 포함한 것이 된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단지 그라스도의 이 름이 언급되 어 야 한다고 의 미 하지 않고, 신자들은 기 도로써 외적인 표시의 효과가 오직 그리스도의 권능 안에서만이 성취된다고 증명한 다는 것을 기 술(記述)하고 있다. 왜 냐하면 성 례전은 그 자체에 는 구원의 어떤 권능도 갖고 있지 않고, 혹은 스스로는 어떤 효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 따라서 말하자면 이 절은 이전에 했던 말의 정정 (訂正)이다• 왜냐하면 아나니아는 외적인 요소를 신뢰하는 데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바울을 분명히 돌려서 방향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돋이 이런 예와는 얼마나 다 론가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은혜의 원인을 그들 자신의 축사(逐邪)의 주문(呪文)에 잡아 멘다. 그 많은 불쌍한 그리스도의 백성들 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는커녕, 그들은 차라리 세례로 그리스도를 익 사시키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그들의 축사의 주문으로 더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