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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5:7)

1. 성경 (요한복음5:1 ~ 9)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1)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2)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3)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4)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5)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6)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8)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9)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 여기에 기록된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 들어오신 직후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명절은 오순절일 가능성이 높다. 유월절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그 후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 동안 주님은 추수할 때까지 넉 달이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이에 논쟁하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명절 때에 예루살렘에 큰 무리의 사람들이 운집할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 기회라 생각하시고 명절을 기해 들어오셨다. 우리 모두를 율법의 굴레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율법에 순종하실 필요가 있었다.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타라 하는 못이 있는데 ~~~” ; 베데스타 대신 베데더 라고 보는 Jerome의 억측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이 집을 양무리의 집이라고 번역한다. 또 이 장소를 벧세다 (Bethesda), 즉 ‘물고기의 못’이라고 읽는 사람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부음, 즉 Pouring의 장소라고 이곳을 설명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더 큰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어 ‘에세드’는 흘러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Esada라는 아람어 발음을 쓰고 있다. 나는 물이 제사장들이 길을 수 있도록 도관을 통하여 물이 그곳에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Pipe를 통하여 물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 병자들은 예배하러 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 구걸하기 위하여 행각 안에 누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물로 드릴 짐승을 대개 이곳에서 사게 되어 있었다. 각 명절 때마다 하나님께서 몇 사람씩 고쳐 주심으로, 율법에 명시한 예배와 성전의 거룩함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종교가 전성기에 있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읽을 수 없고 선지자의 시대까지 기사가 보통 행해지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부패하고 거의 황폐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기사와 표적을 통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조금은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시대에는 표적에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유대인들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알게 하여 그들로 율법을 순종하는 가운데 서게 하려 함이요, 둘째는, 그들로 새롭고 비상한 관심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는 천사가 ~~” ; 병자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들의 손을 쓰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천사를 명하여 이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가끔~~”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꺼번에 그리고 단번에 모두 고쳐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적에는 목적이 있었던 만큼 거기에는 또한 한계가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상기시켜 말씀하시기를 엘리사 시대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오직 한 아이가 살림을 받았고(왕하4:32), 그리고 가물었을 때에 많은 과부가 기근으로 고생했지만 오직 한 과부만이 엘리야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왕상17:9, 눅4:25). 그래서 주님께서는 몇 사람의 병자에 관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증거해 주면 족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치유방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물이 동한다 해도 거기서 무슨 치료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을 쓰심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바로잡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기를 원하셨다.(나아만 장군의 예).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사도 요한은 이 이적이 확실함을 입증할 만한 여러 가지 내용을 수집했다.

 

“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주님은 병자가 참으로 낫기를 원하는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그에게 내릴 은혜에 대한 욕망을 불 붙일 목적으로 그리고 다른 데 마음을 두고 있어 표적을 보지 못했을 환자들의 시선을 끌 목적으로 이 질문을 던졌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 이 병자는 우리가 거의 다 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자기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제한하고 있으며 자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의 기대를 자신 스스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구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 준다. 38년은 주님께서 그의 축복을 지연시킨 기간으로서는 긴 기간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리 오랫동안 우리로 기다리게 하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고통과 신음하는 중에도 그 시간의 지루함에 지쳐 기진맥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끝없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모든 장애물을 쉽게 부셔버리는 놀라운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 ;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그 병자가 짐을 지고 활보하는 것을 볼 때에 큰 죄목을 들고 나설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율법은 안식일에 어떠한 짐도 지지 못하도록 엄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렘17: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위험을 무시하고 두 가지 이유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셨다. 첫째는, 그 표적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그가 곧이어 행하셨던 놀라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려 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적에 대하여 아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는 것은 대담하게 간과해야 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