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로마서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3:2)

1. 성경 (롬 3: 1 ~ 8)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1)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2)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3)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4)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5)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6)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7)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 ;  할례 그것만으로는 유대인 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것을 바울온 훌륭하게 잘 주 장했다. 그러나 구별하는 표시로서 그 표적(할례)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유대인들과 아무런 표적도 받은 바 없는·이방인들 간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는 부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구별 을 부인하고 무효화시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반대, 즉, 할례가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대를 또한 제거하는 문재가 남아 있었다.

 

할례에 근거한 유대인의 자랑이 그릇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례을 제정 하셨던 목적에 관하여서는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말미암은 어떤 유익에 대해 생각하시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을 그는 제정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반대에 응답할 목적으로 유대인을 이방인보다 더 낫게 해 준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는 또한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질문을 묻는데 대한 그의 이유를 덧붙여 말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의식(儀式)을 일컬어 사람들을 서로 나눠 놓은 중간에 막힌 담( 옙 2 : 14 )이라고 한 것 처럼 할례가 유대인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해 주었기 때문이다.

 

"2 범사에 많으니"  ; . 즉, 대단히 많다. 그는 여기서 성례(할례 )에 그 본래의 영예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것 때문에 자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할례의 표---- 그들은 이 할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되었다-----를 받았었다고 바울이 말할 때,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나 훌륭한 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택을 롱해서 그들이 이처럽 이방인들보다 더 낫게 되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람으로 간주된 때에는 바울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고려하는 경우에는,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대로· 이 점에서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어야 했던 것이다.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았음이니라." ;  어떤 주석가들온 여기에 그릇된 결론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가 뒤에 가서 상술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숫자를 표기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먼저" 또는 "특별히" 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도 그들의 품위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함에 틀림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할례의 유익이 단순한 표적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가치가 말씀에서 얻어진다는 것은 유의할 만하다.  바울은 여기서 무슨 유익을 그 성례(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주는가를 묻고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천국 지혜의 보화를  맡겼었다고 대답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을 제쳐 놓으면 유대인들에제· 아무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말씀" 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계시하시고, 후에는 율법과 선자자들로 말미암아 증명하고 해석하신 언약을 가리켜 사용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의 영광을 유대인들 가운데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을 기뻐 하신만큼 오래도록 그들에게 말씀을 안전하게 보촌하도록 맡기셨다.

 

그 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분배하고자 하신 때에 , 그들은 그 말씀들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려야 했다. 유대인들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었고,  둘째로는 그 말씀들을 따라 나눠주는 청지기들이었다. 주께서 한 민족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의 말씀을 맡겨 주신 것이 그처럽 큰 유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하면, 말씀을 경멸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말씀을 아주 소홀하게 또는 조심성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멸시하여도 결코 충분치 않을 것이다.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 앞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알맹이 없는 표적을 자랑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그들에게 추호도 자랑을 못하게 하려 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표적의 성격을 고려하면서,  그는 그것의 미점(美点)이 그들의 헛된 교만에 의해서 일지라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바울이 할례의 표적에 어떠한 은 혜가 있을 수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유대인들의 배은망덕의 탓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했었기 때문에, 이제 그는 반대에 응답 할 묵적으로 그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묻고 있다. 바울이 그가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만큼 충분하게 의사 표현을 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일종의 과묵(纂默)이.있다. 유대 민족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연약을 파기했었다고 말해서 틀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온 매우 모욕적인 것이 되었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가 가혹한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다만 어떤 자들만을 언급하였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카타르 게인'은 본래 '헛되고 효과 없게 만들다' 를 의미한다. 이 의미가 본문의 귀 절에 가장 적합하다,  바울의 질문의 요지는, 사람들의 불신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본질적으로 확실하고 견고하게 남아 있지 못하게 되는가의 여부에 있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 진리의 효과와 성취가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저해될 가능성이 있겠는가의 여부에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갈은 것이다.  즉,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언약을 파기한 자들인 까닭에,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 가운데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불신에 의하여 페지되는가?  이에 대해서 바울은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그것의 불변성을 상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록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고 그것을 유린했다고 할지라도· 그렇지만 그 언약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 민족에게서는 그것의 효력을 보존하였고 그리고 그것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본 문장의 의미는 주님의 은혜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의 축복이 그들 가운데 넘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은 그 약속이 믿음으로 받아 들여질 때에만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상호 언약은 쌍방에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 민족 가운대 그 약속을 계속하여 믿음으로 해서, 그 언약의 특권들을 상실하지 않았던 소수의 남은 자들이 항상 있었다는 것을 바울은 뜻하고 있는 것이다. 

 

"4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 다른 사람들이야 본 절을 어떻게 해석하든지간에, 나는 본 절을 그것의 반대의 필연적 결과에서 나온 논증으로 생각한다. 바울은 이 결과에 의하여 앞서 있었던 반대를 무효화시키고 있다. 만일 하나님은 참 되시고 인간은 거짓 되다는 두 명제가 양립하고 또한 참으로 일치한다고 하는 경우.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거짓됨에 의하여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바울이 이 두 원리들을 여기서 대조시키지 않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에 의하여 자기의 공의를 드러나게 하는 경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겠는가 하는 모순을 나중에 가서 논박하려 한 그의 시도가 전혀 헛될 뻔하였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는 더욱 분명하니, 즉 하나님의 미쁘십(faithfulness)은 인간들의 불신과 배교에 의하여 폐해지기는커녕 그것들로 말미암아 머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 되시다”고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들을 신실하게 기꺼이 지켜주시기 때문 뿐만 아니라, 그는 그가 말씀으로 선언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실제로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대저 내 능력이 어떠한 즉, 내 행사도 그러하리라”고 하신 까닭이다. 그러 나 한편, 사람은 거짓되다. 이는 사람이 그의 약조(約條)를 혼히 파기하기 때문만 아니라, 본성적으로 거짓을 좇고 진리를 피하기 때문이다.

 

첫째번 명제는 모든 기독교 철학의 제 1의 원리이다.

 

둘째번 것은 시116 : 11에서 취한 것인데, 거기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되고 모두 거짓 말장이라고 한 것 이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귀절로서. 대단히 팔요한 위로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멸시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사악하였다.

 

그래서 바울의 경우 만일 그가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진리에 좌우 되지 않는다는 것을 회상하지 않았다고 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확실성을· 자주 의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바로 앞서 말했던 것, 즉 하나님의 약속을 유효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그 약속을 받는 믿음이 그 약속을 유효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서 요구된다는 것과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가?  믿음은 거짓에 반대된다.

 

 이 질문은 확실히 어려운 듯하다. 그러나 그 대답은 어렵지 않다. 즉, 주님은 그의 진리에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는 인간들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길이 없는 곳에서 그의 진리를 위한 길을 그래도 발견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택하신 자(His elect)에게서 우리의 본성의 타고난 불신양을 바로잡아 주고, 결코 굴복할 것 갈지 않아 보인 사람들을 그에게 굴복시켜 순종케 합으로써 승리자로 나타나시게 되리라는 것이다. 덧붙여 말해 둘 것은, 바울이 지금 인간의 부패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패를 위한 치료약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   본문의 의미는 이렇다. 우리의 거짓됨과 믿음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기는 커녕, 그것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분명하고 두드러지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다윗온 이를 증거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든지간에, 자기는 죄인인 까닭에, 그분은 언제나 의로우신 심판주이시며, 그의 의를 거스려 불평하는 불경건한 자들의 모든 비방들을· 물리치실 것이라고 하였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우리에게 선언 하시는 심판을 뜻한다. 혼히 해석하는 대로· 이것을 하나님의 `약속' 으로 이해 하는 것은 억지 해석이다. 그러므로 접속사(Particle) that는 목적을나타 내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갖다 붙인 결과를 가리키지도 않으며, 결론을 암시하는 것으로, “내가 당신께만 죄를 범하였사오니, 그러므로 나를 공정하게 벌하시리이다”를 뜻한다. 즉각적으로 첨부된, “그러나 우리의 부정 (不淨)이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완전할 것인가” 라는 반대의 말씀은 바울이 다윗의 이 귀철을. 그것의 본래의 참된 의미로 인용하였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내가 방금 말한 바와 같이, 다윗이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기이한 섭리로 심지어 사람의 죄까지도 그 자신의 의를 빛나게 하도록 역사하셨다는 뜻으로 말하지 아니 했다면, 바울은 이 어려운 난제를 가지고 자기의 독자들을 쓸데 없이 부당하게 불들어 둔 것 이 되었다.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 히브리어로는 이 둘째 구문이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로 되어 있다. 이 말씀의 뜻은 단순히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든 심판을 행하실 때에, 불경건한 자들 이 제아무리 항의 소동을 벌이고, 증오심에 불타 불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지워버리려고 제 아무리 애써도, 찬양을 받으실 만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히브리어 본문 대신 헬라어 역본을 취하여 따랐다. 이는 그 역본이 여기서는 그의 목적에 더 잘 적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들은 성경을 인용함에 있어서 혼히 원문보다는 더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들이 인용한 것이 그들의 주재에 적합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고, 그래서 그들이 자구(字句) 사용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조심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귀절을 다음과 갈이 응용하여 의역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의 죄들중에 아무 것이라도 주의 영광을 선포하는데 필요하고, 그리고 특별히 그의 진리로 말미암아 그가 영광을 받으신다고 한다면, 인간의 거짓마저도  그의 진리를 뒤엎기보다는 오히려 확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 비록 '크리네스다이'라는 단어가 수동태뿐 아니라 능동태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헬라어 성경 번역자들은 선지자 다윗의 의미와는 반대로· 그것을 수동의 의미로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5 그러나 우리 블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 ; 본문의 이 사상온 비록 중심 주제에서 빗나간 지엽적인 것이기는 해도, 사도는 악의를 품은 사람들에게 악하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같이 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그가 이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사도는 그들이 손쉽게 그러한 기회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복음을 비방할 온갖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의 증거에서 그들의 비방을 날조할 수 있는 수단을 얻어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를 영화롭게 해 주는 것만을 기대한다고 한다면. 그들의 법죄로 말미암아 그들이그 를 영화롭게 해수는 데도 그들이 법죄할 때 왜 그는 그들을 벌하시는가? 만일 그가 불쾌하시게 된 원인이 그를 영화롭게 해 주는 바 그 수단으로 말 미암은 것이라고 하면, 그에게는 기분 상하실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 틀림 없다"

 

이것은 바울이 지금 곧 반복하려고 하는 대로' 혼해 빠전 비방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까닭에 그는 그것을 설명없이 지나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그는 그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불경건한 자들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진술함으로써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미리 일러 주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인간의 이성을 예리하게 공격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의 특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반대하는 데 있다고 바울은 넌지시 말한다. 그는 그가 '불 경건한 자로서’가 아니 라,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로 사실이 이렇다. 하나님의 비밀들에 반항하여 봉기를 들고 자기네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무례하게 공격하는것을주처하지 않을 만큼 대담무쌍한 인간들에게는 모든 하나님의 비밀들이 역설(paradoxes) 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닫는 것은, 만일 우리가 이들 비밀들을 터득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한다고 하면; 우리가 특별히 우리 자신의 이성에서 풀려나기를 힘쓰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전심전력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진노라는 단어는 여기서 심판 대신에 사용된 까닭에, 형벌을 가리킨다.' 이는·마치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드러낸 죄악들을 벌하신다고 해서, 그가 불의하시냐?"고 말한 것과도 같다. 

 

"6. 결코그렇지 아니하나라 .. …·" ; 이 신성을 모독하는 언사를 힐책할 때 에, 그는 그 반대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고, 먼저 그것을 그가 지극히 혐오한다는 말로 사작한다. 이는 기독교 종교가 그처럼 엄청난 모순들을 동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의 이 혐오의 말은 그가 택하여 사용할 수 있는 어떠한 부정적인 표현보다 훨씬 강 력하다. 이는 이 불경건한 모독적 언사를 경청할 것이 아니라, 몸서리치 는 혐오감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含意)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곧장 간접적인 반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을 첨가하며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비방을 전적으로 제거하지 않고 그들의 반대가 불합리하였다고 단지 대답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는 그들의 반대가 불가(不可) 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의 직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논증을 끌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의 하실리가 없다. 본 논증온,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식적인(mere) 능력으로부터가 아니고, 그의 실제적인(actual) 능력으로부터 끌어낸 것이다. 이 능력은 그의 창조물의 전과정과 질서에 나타나 있다.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직책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라는 데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시고,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모든 흔란을 최상의 질서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부당하게 결정하실 리가 없다. 바울은 모세의 글(창 18 : 2..5 )을 인용하여 언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소돔을 전적으로 멸망시키지 마실 것을 기도하는 중에,  그가 말하기를 "주께서 이갈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라고 전술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을 욥기(34:17)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불의한 재판관들이 사람들 가운데서는 흔히 발견된다. 이는 그들이 법과 정의에 반(反)하여 그들의 권세를 찬탈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권좌(權座)에 오르게 된 때문이든지, 아니면 그들의 표준들이 되게한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결코 그러한 실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본래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의당 의로우실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그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자기의 특성이요 근본 성질이신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비난을 받는 것은 그릇되다는 것을 추론해 낸다. 비록 바울의 이 교훈은 하나님의 계속된 통치에까지 확대되지만, 특별히 마지막 심판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런데 그 때에는 마참내 바론 질서의 참된 회복이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류의 신성 모독적인 언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직접 논박을 독자가 하고 싶다고 한다면, 다음과 갈은 의미로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불의한 본성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사악한 본성을 이기어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이 끌어 준다.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십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 ; 이 반론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제출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본 절은 앞 절의 설명이며, 만일 사도가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인하여 마음이 동(動)하지 않았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중간에서 중단되지 않았었다고 한다면, 본 질은 앞 절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본 절의 의미는, 만일 하나님의 참되심이 우리의 허위로 말미암아 더욱 두드러지게 되고, 그리고 다소나마 확실해전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또한 보다 많은 영광이 하나님께 들려전다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자가 죄인처럼 처벌받는다는 것이 전혀 부당하다는 것이다.

 

"8 그러면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And why not , Let us do evil )" ; . 본 문장은 생략형이다. 그러기에 이 문장온 다음과 갈은 완성된 문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 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 고 하니)”  그러나 사도는 비록 이 잘못된 반론을 아주 당연히 일소(一笑) 에 불여 무시해버릴 수도 있지만,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경건한 자들의 구실이란 단지,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 외에는 금생(今生)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다른 더 어울리는 것이 없다고 하면, 그의 영광을 도모하기 위해서 우리가 죄를 짓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온 간단하다. 즉, 악은 자연히: 악의에는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게 된다고 하면, 이것은 사람의 역사(役事)에 의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기묘한 명장(名匠)으로서, 우리의 사악함을 압도하시어 그것을 다른 목적에로 전환시키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의도한 계획과는 반대로그 자신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는방법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는 방법으로 경건을 처방해 주셨다. 그 경건은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처방의 한계들을 범하는 인간온 하나님을 존귀케 하기보다는 그를 욕되게 하는 데 힘쓴다. 그러나 맺어진 결과는 인간의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만다. 이러한 사실온 인간의 사악함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 것으로 돌려야 한다. 인간의 사악온 하나님의 존엄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존엄을 뒤엎으 려고까지 한다.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 바울이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에 대해 그처럽 경외심을 가지고 말하는데도, 그의 원수들이 그를 비방하기 위해서 그처럼 길게 악담을 퍼붓는 것온 놀라운 일이다. 사람들의 추잡하고 독살스런 언사를 억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진지한 경외심이 세상에는 결코 있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으로 알고 있는(그리고 신자들 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증거하는) 우리의 교훈이 현재 무수한 비난으로 훼방을 받으며, 그리고 우리의 대적들에 의해서 미운 물건이 되는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읽어볼 수 있는 비난이, 무식한 자들 가운데서 바울의 가르침을 경멸하여 논할 목적으로 그를 겨냥 하여 퍼부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터무니 없고 악독한 것을 우리는 상상힐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파하는 진리에 대하여 불경건한 자들이 퍼붓는 비방조의 악담을 감내 Ctiit) 하자.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 진리에 대한 꾸밈없는 신양고백을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지키는 것을 중단하지 말자. 왜냐하면 진리는 불경건한 자들의 거짓을 분쇄하고 파(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의 힘이 닿는 데까지,그들의 악독한 간계를 반박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비열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이 벌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악담하지 못하게 하자.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 어떤 사람들은 이 문구를 능동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그들의 반론이 어리석은 것이었다는데 대하여 바울이 그들과 의견을 갈이 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아무도 복음의 교훈이 이와 갈은 역설들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려 한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나는 수동의 개념을 취한다. 가혹한 정죄를 받아 마땅한 그러한 사악을 그저 시인하여 준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바울이 분명히 정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사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정죄되어야 했다. 첫째는, 이 불경(不敬)은 그들이 마음으로 동의해 주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복음을 비방할 때, 그들이 감히 그들의 비방의 근거를 복음에서 끌어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