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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로마서1:2)

1. 성경 (롬1:1 ~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2)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3)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4)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5)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6)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 이 귀절은 바울이 그의 교훈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가 자신에게 붙인 칭호들이다. 그는 두가지 방식으로 칭호들 붙인다. 첫째는. 사도직에 대한 그의 소명을 주장하으로써. 둘째는, 이 소명이 로마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선언함으로써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사도가 된자로 여김을 받는 것과 그가 로마 교회를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로 알려지는 것은 바울에게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요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직분을 맡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가 사도가 된 것온 우연하게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천명한다. 그런 다음에 이 말에 이어서 그는 바로 그가 "택정함을 입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합으로써 그는 많온 사도들 중에 단지 하나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특별하게 택하신 사도이었다고 하는 그의 주장을 강화한 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논증을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정한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왜냐하떤 사도직이 특수한 종류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직분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의 축에 드는것 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도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그들을 구별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뒤에 언급되거니와) 바울의 택정은 그의 사도직의 목적과 용도를 둘 다 표현한다. 이는 그 직분에 그가 택하십을 입은 목적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그의 의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칭호는 모든 다른 교사와 그가 합께 가진 칭호이다.   그러나, 사도라는 명칭을 주장함으로 해서, 그는 자신에게 우선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도직을 찬탈하여 사칭하는 자는 아무도 사도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상기시칸다.  이와같이 그 문구의 의미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평범한 종이 아니었고, 그  자신의 주재넘는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임명 된 사도였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의 사도직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맡은 바 직무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이 소명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보고서 '택정'을 해석하여 그의 어머니의 태루부터 구별된 것(갈1 : 15),또 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택 (누가에 의해 언급됨)을 뜻하 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과 나는 견해를 갈이 하지 않는다:  바울의· 유일한 자랑은 그의 소명의 장본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가 이 명예를 스스로 외람되게 사칭하고 있었다고는 전혀 의심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의 말씀의 사역에 적합한 것은: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주목되어야 한다: 말씀의 사역은 특별한 소명을 요구한다. 자신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명없이 직분을 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도들과 감독들의 소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사도의 직분'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은 주교관(主敎冠)과 사교장(司敎杖) 및 이와 유사한 허식(虛飾)이 자기네들을 구별지어 주는 유일한 표식들이되, 그들의 자랑은 그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라고 하는 벙어리 개들의 모순을 입증 해 준다.

 

 '종'이라는 단어는 단지 목사의 뜻만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 단어가 하나의 직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것은, 모세의 직분과 그리스도의 직분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가정하여. 그 단어에 대해 부질없는,억측에 빠지는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을 재거하기 위함이다.

“바울 “ ; 바울이라는 이름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논의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할,필요가 없다. 다른 주석가들에 의해서 자주는 아니지만 반복되어 온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덧붙여 말할 것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피하고 싶다. 다만 별 다른 지겨움이 없이 홍미를 가잘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다소간 말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설명은 간략할 것 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서기오 총독을 성공적으로 회심시킨 것 에 대한 기념으로 그가 이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이론은 누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행 13 : 7. 9). 누가는 바울이 이 이름을.그때 보다 훨씬 앞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바울 자신이 회심하던 그 때에 이 이름이 바울에게 주어졌다는 것도 가당치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컨대, 어거스틴이 이 가설(假說)을 인정한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는 합당치 못했었던 자만심이 강한 사울을 논할 때 그에게 이 이름에 관한 문제가 어떤 난해한 논증의 기회들 주었던 때문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바울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었다고 결론을 내린 오리겐이 훨씬 더 정확한 듯 하다.

 사실상 따지고 보면, 사울이라는 가족명은 그의 종교와 혈통에 대한 표시로서 그의 부모들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졌었고. 한편 바울이라는 별명은 그의 로마 시민권의 증거로서 그에게 덧붙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시민권은 바울 당시에는 아주 중요시 되었던 영예였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그 영예를 숨기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흐리게 할 만큼 대단하게 그 영예를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이름을 그는 일반적으로 서신들에서 사용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이름이 그가 서신들을 써 보낸 교회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었고. 또 더 잘 통하였으며. 로마제국에서는 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바울은 로마와 그 영토 내에서 유대인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해서 생겨났던 불필요한 혐의와 격한 혐오를 피해야 했었고, 그 자신의 일신 상의 안전을 위한 예방 조치를 취할 뿐만 아니라. 그의 동족들의 감정을 돋구는 것을 또한 피해야 했었다.

“2.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 새로 소개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교훈은 크게 그것의 권위들 상실하는 법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신빙성을 그것의 유구한 역사성을 들어 확립시킨다. 그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돌연히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며, 전에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교훈을 소개하지 않은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복음과 함께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약속되었었고 항상 기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것(antiquity)은 자주 신화적인 것으로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의심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그의 증인들 그리고 최상의 완전 무결한 증인들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그들의 증거가 성경에서 적절하게 보증되었다고 덧 붙였다. 우리는 이 문구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들 알아넬 수가 있겠다. 이는 그 것이 선지자들에 의해서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다만 약속된 것이었다고 바 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선지자들이 복음을 약속했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마침내 육체를 입으시고 나타나셨을 때 복음이 계시되었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약속을 복음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된 설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 자체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 이 중요한 귀절에서 바울은 전(全)복음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에게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기는 것은 복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살아 있고 명백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 분만이 우리의 전신앙의 대상이요 중심이 되는 그 한 분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 절의 말씀온 복음을 서술한 것이 되며. 이 말씀으로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다음에 나오는"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라는 단어들을 그와 같은 경우에 "그의 아들"로 나는 번역 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문맥에 더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합당한 진보는 어떠한 것이든지 그 것과 함께 복음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온다는 것이어야 한다 .. 한편, 그리스도를 떠나서 지혜를 찾는 것은 무모하고 완전히 정신나간 짓이다.

“3. 나셨고.”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신성과 인성을 우리가 그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두 가지의 필수조건이 있다.그의 선성은 능력, , 그리고 생명을 포함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그의 인성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요약하는 가운데서 신성과 인성 둘을 분명하게 언급한 것이다. 그는 전술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그리고 육신을 입으신 가운대서 그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사도 요한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 연 후에, 바로 그 육신을 입으신 가운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었다고 덧 붙였다(요'1 : 14). 바울이 그리스도의 혈통과 족보들 그의 조상 다윗으로부터 특별히 기술한 것은 아주 의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특별한 문구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시켜 주며. 그가 전에 약속되었던 바로 그분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모든 의심을 재거해 주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주어졌었던 약속은 아주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육신보다 더 나은 어떤 것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취하여 가지고 오셨고,  다윗에게서 받지 않으신 어떤 것, 즉 바울이 곧 이어서 언급하는 신성의 영광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육신으로는’ 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참 육신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셀베루스(Se rvetus)의 신성 모독적인 헛소리를 반박한 것이다. 셀베두스는 그리스도께서 창조되지 않은 세 가지의 요소들로 구성된 육신을 입었다고 주장했 다.

“4.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  또는 "결정 되셨으니• (defi.nitus) 시편 2편7철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서처럽,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연한 신의(神意)를 부활의 능력이 나타낸 것이라고 바울온 말하고 있 다. "낳았도다" 라는 말은 여기서 알려 진 바 된 것을 가리킨다.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의 귀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세 독립 된 증거들을 찾아낸다.

첫째는. 능력 (그들의 경우 이 말온 이적을 뜻한 다),

둘째로, 성령의 증거,

세째로, 죽은 자의 부활이다.

그러나 이 세 증거들을 합하여 다음과 갈이 요약하고 싶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하늘 의 참 능력 (a truly heavenly power) 곧. 성령의 능력을 공개적으로 행사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던 것 이다. 이 능력은 그것이 동일한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서 인 쳐질 때 이해되는 것이다. 사도 자신의 말이 이 해석을 지지해 주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본래 속하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의심 할 여지 없이 입증한 그 능력이 그 안에서 보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눙력으로 인정되셨다고 했다.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실제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육신의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타났다고 선언한 후에,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찬양한다(고후13:4).그러나 이 영광은·동일한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그것을 명기(銘記)해 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낸 성령의 엄청난 능력을 개개의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심령 속에 체험하는 형적(evidence)을 바울이 또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화를 그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하다.

 이는 마치 성령께서 성결케-하시는 한. 전에 한 번 나타내신 그 능력의 증거를 성령이 확증하시고 . 인준 하신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의 성령에게 여러 칭호들을 붙여준다. 이 칭호들은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 예컨대 우리 주님께서 는 성령을 “전리의 영"(요14 : 17)이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그 귀절에 표현된 대로의 성령에 대한 의미 때문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 : 19). "이를(내 생명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요 10 : 18) 라고 흔히 증거 하신 대로. 그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나셨기 때문에, 신적 능력이 그의 부활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가 굴복하였었던 죽음을 외부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 신의 성령의 천적역사 ( 天的役事; heavenly operation)에 의해 서 이기고 승리하셨다.

“5. 그로 말미알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  바울은 그의 직책을 천거하기 위해서 소개하였던 복음에 대한 정의를 끝마친 후에. 이제는 자기 자신의 소명을 밝힌다. 이는 이 직책이 로마 성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중대한 문제이었기 때문이다. 온혜와 사도직을 구별함에 있어서 변환법(~換法;hypallage)을 사용 하였다. 이는 값없이 주어진 사도직이거나 사도직의 은혜를 의미하기 위함이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그의 고귀한 직분에 임명된 것은 자기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에는 이 직분이 위험과 수고와 증오와 치욕만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의 눈에는 그 직분이 아무런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은총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은혜를 받아 사도가 되었다.( I received grace to be anapostle')는 번역이 더 좋을 것 갈다. 그러나 뜻은 같다.

“그 이를을 위하여.” ;  사도 바울이 고후 5 : 20 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라고 말한 것처럼, 이 문구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들 대신하여 사도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암브로스(Ambrose) 가 해석했다. 그러나 “이름"이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더 나은듯 하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요일3 : 23).  바울 자신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택한 그릇이었다고 한다(행 9 : 15).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는 ‘내가 그리스도의 인품을 알리도록' 과 갈은 의미를 갖는다.

“모든 이방인 중에서.” ; 바울의 사역이 제자 양성과 무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가 사도로 택정함을 입은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도직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친다는 것을 그는 덧붙여 말한다. 바울은  6 절에서 로마인들이 그의 목회 관할하에 있는 이방인들의  수 가운데 들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자신을 로마인들의 사도로 언급하고 있다. 다른 사도들 역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특정 교회의 목자나 감독으로·임명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사도직의 일반적인 책임에 곁들여, 특별하계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도록 택정되었다. 그가 비두니아를 거쳐서 무시아에서 말씀을 전파하려고 애썼으나 성령에 의하여 허락되지 않았던 사실(행 16 : 6 -8)은 본 전술에 반대되지 않는다. 도행전 16장 6절부터 8절에서 성령이 허락치 않은 목적은 바울의 사역을 어떤 특정 지역에 국한시 키려는 것이 아니고. 아직 그곳이 추수할 때가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잠시 다른 곳으로 바울이 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종케 하나니.” ;  즉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명령을 우리가 받았다는 말이다. 바울온 그의 부르심의 목적을 말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그의 직분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그가 다음과 갈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나에게 맡겨진 바 말씀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수행하는 것은 나의 의무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부르심을 너희가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말씀을 듣고 거기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너희의 책임이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은. 그 의도하는 바가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것인 복음 전파를 불경건하게 그리고 경멸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완고하게 반항하여 그의 명령 전체를 반복시키고 있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 본문에서 믿음은 순종으로 언급되어져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르시고. 그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라기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든 고의적인 불순종의 근원은 블신앙인 것이다. 나는 ‘순종케’보다는 믿어 ‘순종케’라는 번역을 낫게 여긴다. 은유적으로 쓰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송케’ 라는 번역은 그것이 비록 사도행전 6장7절에서 한번 사용되기는 했어도, 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복음에 순종케 되는 방편임에 툴립 없다.

“6.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실을 입은… ..” ;  바울은 자기가 로마교회의 성도들과 보다 밀접하게 관련이 맺어진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주님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한 표적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표적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그가 그들을 불러서 복음에 동참케 하셨다고 선언하셨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부르심을 확실한 것으로 굳게 하고자 할전대, 바 울의 직무를 그들이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바울이 주님의 동일한 선택에 의해서 택함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사(小 詞)인 즉(namely)이 삽입된것으로보고서·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을 설명 어구로 나는 해석하고 싶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체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생의 상속자들이 될 사람들은 하늘에 계시는 성부에 의하여 택함을 받아 그의 자녀들이 될 뿐만 아니라. 선택되었기 때문에, 목자되신 그 분이 들보시고 의지(依支)케 해주신다.

“7. 모든 자에 게”   ;바울은 본 귀절에서 어순을 잘 배열하여, 우리 안에 찬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l) 주님께서는 천절을 베푸셔서 우리가 그의 온혜와 사랑을 엇입게 하셨다. (2) 그는 우리를 불러 주셨다. (3) 그는 우리를 부르셔서 거룩에 이르게 하셨다. 그러나 이 존귀는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을 등한시하지 않는 경우에만 마침내 우리의 것이 된다. 여기에 아주 심오한 전리가 있다• 이 운제에 대해 나는 간략하계언급만 하고, 독자 개개인의 판단에 그것을 맡기고자 한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 의 구원온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값 없는 부성애(父性愛)에 전적으로 그 근원을 둔다:._. 제일 주요한 사실온 이 것 곧“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이다. 그의 사랑에 대한 유일무이-한키 유는 그 자신의 순수한 선하심 (His own sheer goodness) 이 다. 그의 부 르심 또한 이것에 의존한다. 이 선하심에 의하여 하나님온 그의 정하신 때 에 그가 전에 자유몹게 선택하셨던 사람들에게 양자의 인울 치신다. 그러 나 우리는 이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가 있다. 비록 그들이 아무 자격도 없는 가련한 최인들이지만, 주님께서 은총을 그들에게 베푸신다는 것을 확 실히 믿지 않고.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r-'-') 아니요 거욱케 하심이니.(살전4 : 7)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격려되어 거룩함을 갈망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도 신실한 성도라고 볼 수 가 없다. 본문의 헬라어는 2인칭으로 번역될 수도 있기 때운에, 그것을 고쳐야 할 하등에 이유가 없다고 나는 본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도록 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축복인 것이다. 이것이 은혜가 의미 하는 바다• 또한 우리의 재반사(諸般事)에 성공과 형통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나오게 하는 것온 큰 축복이다. 이것온 평강이 의미하는 바다. 비록 모든 일이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화를내신다 면, 우리의 바로 그 축복은 저주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의 유일 한 기초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이것은 우리로`하여금 감되고 완전한 형 몽을 누리게 해준다. 반면에 우리의 역경 바로 그 자체는 우리의 구원을 도모해 준다.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 강을 기원하고 있는 이 사실 로 미루어 보아, 우리에게 임하는 축복은 어느 것이나 하나님의 은택의 열 매임을 알 수가 있다. 바울이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축복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또한 유의해야 한다. 우리 수님은 이 점에서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 대한 성부의 넘치 는 선하심의 관리자요 분배자이실 뿐만 아니 라, 모든 것을 그와 합께 더불 어 일하시기 때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그리스도을 롱하여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의 특별한 옥적이었다. 평강’이라는 단어를 양심의 평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어떤 학자 들도 있다• 그 단어가 때로는 이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하나님 의 축복 전체를 하나로-묶어서 우리 에게 주고자 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앞서 말한 개념 (뷰우처가 제안한 것임)이 훨싼 더 적합하다. 바울온 신자들이 행복 전부를 소유해야 한다 고 하는 소망율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했 던 대로, 바로 그 근원 자체인. 즉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한다. 이 은혜는 우리에게 영원 한축복을가져다줄뿐만아니라, 금생(今生)에서 모든좋은것들의 원 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