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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후서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딤후4:13)

1. 성경 (딤후 4:13~22)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3)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4)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5)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6)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7)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8)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19)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0)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1)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2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3. 네가~~~~겉옷을 가지고 오고~~~~" ;  주석가들은 φαιλбνηS(파일로네-스) 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견해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책 넣는 만들어진 외투로 보는 상자로 보는 사람도 있고, 추위와 비를 막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외투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 의미야 어떻든 마치 로마에는 기술자도 없고 천도 없고 나무도 없다는 식으로 왜 바울은 그렇게 먼 거리에서부터 외투나 궤를 가져오게 하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된다. '그것이 책이나 원고, 편지가 담겨진 상자라면 그런 것들은 돈을 주고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가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추측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므로 나는 기꺼이 그것을 외투로 번역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 사용한 것이라서 바울에게 더 편하고 또 그가 비용을 절약하려 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가 이것을 그렇게 먼 곳에서 가져오게 한 것이 터무니없는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내가 첫번째 해석을 더 좋아하는 것은 그가 곧이어 책과 '가죽종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도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지만 독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진보했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으며, 그렇더라도 그들 가운데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을 바울과 겨 룰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서 이 귀절은 책을 무시하고 모든 독서를 정죄하며 자신들의 '엔뒤시아스무스' , 곧 하나님이 ,주신다는 은밀한 영감만을 자랑하는 광신자들의 광기를 반박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문장이 지속적인 독서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추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왜 외투를 가져오게 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난제가 바울이 궤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나의 또 다른 이유지만,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용도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쓰고 싶지 않다.
 
"14. 알렉산더~~~~~~~" ; 이 사람은 배도에 대한 무시무시한 본보기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진시킴에 있어서 어느 정도 열성을 보였지만, 후에 거기에 대해서 공공연한 전투를 감행한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위험하고 독살스러운 원수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께서 그의 교회에 이런 종류의 악이 없어지지 않도록 작정하신 것은 우리가 동일한 방법으로 시련을 받을 때 우리의 용기가 시드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우리는 바울이 알렉산더가 저지른 것으로 하소연하는 악들이 무엇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가 그의 가르침을 대적한 점을 크게 들 수 있다. 알렉산더로 말하면 그는 장사꾼이었고 위대한 논쟁자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집안에 있는 원수들은 항상 해를 끼치려고 적재적소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퍼뜨리는 사악함은 항상 세상이 믿어주며, 그 결과 위대한 재치와 학문보다 악의적이요, '수치스러운 무지가 더 어려움과 고통을 야기시키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주께서 그의 종들이 이런 사람은 사람들과 투쟁할 때 의도적으로 이 세상적인 관점으로부터 종들을 숨기시는 그들이 즐거움으로 허황된 지혜를 결과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 이다. 우리는 바울이 한 말을 통해 그가 가르친 건전한 교훈에 대해서 가장 좋 있다. 알렉산더가 자기 자신을 공격했거나 그를 때렸다면 그는 크게  참을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자 그의 헌신적인 마음이 분노로 불타는 것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시69 : 9)"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그가 그처럼 강력하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주께서 그에게 갚아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 조금 뒤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것으로 하소연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을 기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사면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린다.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처럼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왜 그 한 사람에 대해서만은 그처럼 엄격하고 가차없이 나오는가?  그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시길 바라는 것은 그들이 공포나 연약성으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의 연약성을 동정해야 옳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악의와 신성모독적인 오만함으로 하나님께 대항했으며, 그가 한때 고백한 진리를 공공연하게 공격하였으니, 그만한 사악은 도무지 긍훌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재앙에 대한 이 기도에 있어서 바울이 과도한 분노에 휩쓸 려 정신을 잃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가 알렉산더에게는 영원한 파 멸을 저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기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 과 잘 조정된 열성에 입각한 일이었다. 바울이 여기서 하늘의 심판을 선언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얼마나 귀중하며,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재앙을 내리시 알게 된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악의로서 참는가 하는 점을 종교와 맞서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죄악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도의 본을 잘못 따르면서 무모하게 이런 종류의 저주를 선고받지 않으려면 세 가지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우리는 흔히 있는 자애와 우리의 사적인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에게 가해진 손해를 보복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주장할 때, 좋은 질서를 항상 소란시키기 마련인 우리 자신의 감정과 그것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째, 우리는 무분별하게 누구에게나 판단을 내릴 것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이 그들의 불경건을 통해서 자신들은 악한 것으로 입증할 때에만 그들을 판단함으로써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 자신의 판단과 일치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 의 소원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무분별한 저주를 퍼붓던 제 자들에게 내려진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눅9 55 한글개역 성경에는 난외 주에 있음)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우리도 받을 우 려가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불을 내려주실 것을 기도했다. 해서(왕하 1 10) 제자들도 엘리야에게서 자신들의 권위의 근거를 찾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정신이 엘리야의 정신과 전혀 달랐으므로 그들이 그를 본 받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저주를 퍼붓기 전에 주께서 그의 판단을 명백하게 드러내실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 우리의 열성이 그의 영의 안내와 제지를 받 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한 사람에 대한 바울의 격렬한 반응을 기 억할 때마다 동시에 자기를 비천하게 저버린 자들에 대해서 그가 품었던 경 이적인 온유를 염두에 둠으로써 그의 본을 통해서 우리 형제들의 연약성에 대해서 동정하는 법을 터득해야겠다. 베드로가 그 당시 로마에 있으면서 로마 교회를 지배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물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바로 1년-후에 죽은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그의 재임 기간을 최종 7년으로 잡는다. 곧 이때 베 드로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식으로 본다. 들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 은 그의 첫번 변호로서 그가 두번째 법정에 나타나는 것이 그처럼 가까운 시일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에 베드로가 교황의 직위를 '상실하지 않 으려면 그는 남은 사람들과 함께 불성실하게 바울을 저버린 죄책이 있는 것 으로 비난받지 않으면 안되는가? 단연코 전체 문제를 제대로 검토해 볼 때 우리는 베드로의 교황권에 대해서 믿어지고 있는 모든 내용이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7~22. 주께서 내 곁에 서서" ;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자신 의 명분을 비천하게 저버린 데서 야기될 것으로 본 물의를 제거하는 뜻에서 이 점을 덧붙이고 있다. 로마 교회가 그들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음에도 불 구하고 그들 때문에 복음이 전혀 손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것은 자 기들만 하늘의 힘을 의지해서 모든 짐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곳으로부터는 아무 런 도움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극한 상황에2처하게 되었을 때 그런 위기에서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은 점을 두고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있 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저지했다는 점을 인정하고{있는데,- 성령의 내적인 은혜가 그에게 마치 방패와 같아서 그를 모든 공격으로부터 방어해 준 것만으로 그에게는 충분했다.  이어서 그는전도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이라는 이유를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전파는 특별히 그에게 위임되 었던 이방인 사회에서의 복음전파 직분을 뜻한다. 다른 사람들의 전파는 유 대인들에게 국한되었던만큼 전령관의 선포와 같지는 않았다. 그가 다른 여 러 [곳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온 세 상이 그를 상대로 노발대발 횡포를 부리고 있으며, 모든 인간적인 도움이 그 를 제저버릴 때도 그가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굳게 서 있었다는 것은 그의 사 역에 대한 결코 평범하지 않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 의 사도직이 그리스도에게서 왔다는 점을 실천에 옮긴-사람이다. 이제 그는 확증하는 형식으로 주께서 그처럼 경이적으로 자기를 도왔다는 점을 -모든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함이니 라는 말로 덧붙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점 을 통해서 그들은 바울의 소명과 그들 자신의 소명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  여기서 사자가 네로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나는 그가 일반적인 위험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가 '이글이글 타는 불에서' 또는 '죽음 의 입으로부터 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바울은 그위험이 얼마나 크던지 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경이적인 도움에 의해서만 피할 수 있었다는 것과 그 렇지 않으면 그것이 당장 자기를 삼켜버리고 말았을 것임을 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장래에도 동일한 도움을 바라는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단에게 압도되거나 올바른 길에서 이 우리가 주로 바라야 하는 것은 우리 몸의 '안전이 아니라 우리가 온갖 시련을 딛고 일어서며, 그 결과 우리 몸을 한 가지 악한 일로 더럽힐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백 번 죽 을 각오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악한 일'이라는 표현을 소극적인 의미 에서 불경건한 자들의 격렬한 공격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주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이 나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를 모든 악 한 행실로부터 청결하고 자유롭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훨 씬 더 적절한 것은 그가 곧이어 그의 천국에 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 문이다. 이것은 오직 참된 구원은 주께서 죽음을 통해서든 생명을 ,통해서든 우리를 그의 나라에 인도하실 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교황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연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을 주장할 수 있는 훌륭한 귀절이다. 그들은 구원의 시발점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은 인 정하지만 그것을 지속해 :가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덕분인 것으로 돌리는데, 이렇게 되면 견인()은 하늘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의 덕이 되고 만다. 그 러나 바울은 우리를 그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돌림으로써 우리의 모든 전투가 끝나고 우리가 승리를 얻을 때까지 일생 동안 사하나님의 손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대한 기념비적인 일본을 그가 언급하고 있는 데마에게서 보는데, 그는 그리스 도의 영예로운 선수에서 천박한 변절자로 바뀐 사람이다. 다음에 나오는`내 용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설명된 일이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을 덧 붙일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