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딤후2:1 ~ 26)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1)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2)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3)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4)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5)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6)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7)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8)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9)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0)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1)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2)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13)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4)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5)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6)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7)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8)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19)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0)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1)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2)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3)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4)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5)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2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러므로 네가 ~~~~은혜 속에서 강하고". ;그는 앞에서 성령에 의해서 그에게 낼 것을 맡겨진 것을 잘 지키라는 당부를 했듯이, 여기서는 은혜 안에서 힘을 명령하고 있다. 이 표현을 통해서 그가 뜻하는 것은 그가 나태와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이 어느 정도로 꾸물대느냐 하면 탁월한 은사를 부여받고 있는 자들까지도 만약에 그들이 자주 깨우치지 않을 경우에는 도중에 맥이 빠지고 말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유의지가 은혜와 어느 정도 협력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은혜 안에서 강하라는 권면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또한 그의 영에 의해서 공급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제공하는 은혜 안에서 힘을 얻게 된다고 대답하겠다. 그렇지만 이 권면이 쓸모없는 것이 아닌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내면적으로 가르치면서 이 권면으로 하여금 우리의 귀에 공연한 것으로 들리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이 권면이 오직 성령의 은밀한 능력에 의해서만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내다보는 사람은 결코 이 귀절을 이용해서 자유의지를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것은 두 가지 이 유에서인데, 그 첫째는 은혜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는 점과, 둘째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것을 받지 않은 채 내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두에게 공통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누구나 그의 은혜에 참여한다는 결론이 나오며, 따라서 이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사람 모두가 그것을 가 지고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디모데를 가리켜 '내 아들아' 하고 다정 하게 부르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이 더욱더라고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2. 또 네가~~~~~~내게 들은 바를" ;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건전한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는 일에 대해서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디모데에게 앞에서처럼 그것의 양식과 특징을 보존할 것을 권할 뿐 아니라, 그것을 경건한 교사들에게 전함으로써」널리 퍼뜨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 박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보는 대로 사단은 사도들이 죽은지 얼마 안되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했는지 모른다. 곧 수 세기에 걸쳐서 아무런 전파가 없었다는 듯이, 사단은 부지기 수의 광적인 행위를 일으켰는데, 이것의 터무니없고 해피 망측한 면은 모든 이방인들의 미신을 능가했다. 바울이 그처럼 큰 악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이 그것을 전달할 자격이 있는 모든 경건한 사역자들에게 .위임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즉, '내가 죽은 뒤에 내 가르침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인이 남아 있도록 하라. 그런데 이것은 너희들이 나에게서 들은 것을 몸소 가르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그것을 .더 널리 .공포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을 발견 하거든 그때마다 이 보화를 그들의 신뢰에 위임하도록 하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가 그들을 '충성된 사람들'로 부르는 것은 고린도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신앙이 아니라, 그들에게 특별히 큰 분량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위임된 가르침에 대한 기억 곧 영원히 존속시키려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단어를 '충성된' 으로 번역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가지 다른 야심 때문에 자극되는 사람들이 많은데, 더러는 탐욕에 의해서, 더러는 악의에 의해서 자극을 받고, 더러는 위험에 대한 공포 때문에 뒷전으로 .물러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특별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충성이다.
"많은 증인 앞에서~~~~~~" ; 이것은 그가 디모데의 경우에 있어서 거창한 의식을 갖추고 증인들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디모데의 가르침이 바울에게서 같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고안인가 하는 결론이 예상되었으므로 그가 어느 모퉁이에서 :살며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디모데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모두 스스로 바울에게서 들은 것이라는 점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살아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있다.: 따라서 디모데에게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증거할 동료 제자들이 많았으므로, 그의 가르침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란 자기 성전에만이 아니라 그의 관심과 수고가 미치는 한, 자기 가르침의 순결성을 보존하고 지키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가를 배우계 된다.
"3. 고난을 받을지니" ;강력한 필연에 이끌려 그는 이 두번째 권면을 덧 붙이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의 봉사를 바치는 자들은 고난을 받을 각 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며, 따라서 질고에 대한 끈질긴 인내가 없이는 결코 견인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라 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자들이 남에게 악을 부과하기보다는 스스로 그것을 참을성있게 견디는 전투의 주인공이 되는 군인들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 한 일이다. 처음에는 용기백배하여 나갔지만 날마다 의기소침해지는 사람들 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것은 왜 그런가?? 그들이 십자가에 익숙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도 가날프기 때문에 전투에서 움츠러들 기분이 요, 그들의 전투 개념이란 적대자들과 맹렬하게 싸운다는 생각뿐이다. 그들 은 인내하는 가운데 침착하게 영혼을 달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배울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하나도 없나니" ; 그는 군대 비유를 더 발전시키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디모데를 그리스도의 군인으로 부르면서 이 비유를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계속해서 세속적인 전투를 그리스도인의 전투와 비교하고 있다. 곧 군기의 원칙은 어떤 사람이 군에 입대하는 순간 그는 자기 가정과 모든 자신의 업무를 뒤에 남겨두고 전쟁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생활'이란 자기 가정과 자신의 일반적인 업무를 운영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복무기한을 마칠 때까지 노농부들은 전답올 버려두고, 상인들은 장사를 그만둔다는 말이다. 이 비교를 현재의 주제에 적용할 경우,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사로운 일과 정신을 빼앗아가는 것들을 단념하고 싸우는 일에만 온 정력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된다.
한 마디로 우리는 Hoc age 네 손에 있는 것을 실천하라는 옛 속담을 기억해야겠는데, 이것은 우리의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관심과 주의를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전적으로 그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싸우는 자는~~~~~~아무도~~~~~없나니' 라는 식으로 흔히들 번역하는데, 이것은 바울의 의도를 전적으로 곡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라는 사람을 통해서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지만 특별히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적합하다. 첫째, 그들은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서 거기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각 사람은 각자의 선 위치에서 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하늘의 사령관으로 하여금 자신의 복무에 충성을 맹세한 이 세상의 군인들에 대해서 유한한 인간이 행사하는 것 이상의 권위를 행사하도록 해야 할 것이 다.
"5. 경기하는 자가~~~~~~~" ; 어떤 사람이 한두번 전투에 참여해 놓고 그것으로 충분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그는 계속 불굴의 인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달리기 선수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달리기 선수란 끝까지 달려 승리하기 전에는 상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그는 고린도 전서 9 장 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회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투쟁의 시초에 싫증을 느끼고 당장 전장에서 물러나 쉰다면, 그는 면류관을 받기는 고사하고 무기력하다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분투하기를 바라므로 승리의 도중에서 물러서는 자는 설령 그가 처음에는 용감하게 시작했다 하더라도 이 영예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법대로 경기한다' 는 것은 법이 규정하는 방법과 기간에 따라서 투쟁함으로써 아무도 정해진 시간 전에 중단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6, 수고하는 농부(농부는 곡식을 반기 전에 수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역)~~~~~~" ; 물론 나는 이것을 다르게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또 그들이 바울의 헬라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 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을 세밀하게 검토해 볼 경우 내 견해가 더 낫다. 그 뿐 아니라 '수고한다' 대신에 수고함'이라는 용법을 사용하는 것은 헬라어 의 흔한 용법이다. 헬라 저술가들은 부정법 대신에 .분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농부들이 파종과 기타 다른 경작 활동을 열심히 하기 전에는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부들이 잠시 후에 열매를 얻기 위해서 일에서 물러서지 않고 땀흘리며 참을성있게 추수를 기다린다면 그처럼 큰 보상의 약속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는 수고를 거 부한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노릇이겠는가?
"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 그가 이것을 덧붙이는 것은 그의 비교가 애매하기 때문이 아니라,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서 전투 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의 보상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곰곰이 선생각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사실 우리들이 그것을 쉬지 않고 생각한다 하더라 도 마지막에 가서 그것을 붙잡는 경우는 드물다. 다음에 이어지는 기도는 일종의 교정으로서 덧붙여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란 쉽사리 장래 생명이라는 '불멸의 면류관' 을 묵상하게 되지 않으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디모데에게 이해력을 허락하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배우는 것이 헛되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명령을 성취할 능력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 그 명령들이 공연한 것이 되고 마는 원리와 같다. 바울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결실을 맺도록 하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생도의 마음을 일깨워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8. 다윗의 씨로" ; 이 귀절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체를 확증할 뿐 아니라 그에게 메시아의 영예와 명칭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이단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것으로 상상하는 사람도 있고, 그에게는 인간의 모습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상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분께서 다윗의 후손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틀림없이 그는 우리의 인성을 입고 마리아의 아들로서 태어난 참 인간이라는 점을 단언하고 있다. 이 증거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라서 이것을 회피하려던 이단자들의 많은 노력은 그것이 모두 수치로 끝나고 말았을 뿐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의 다른 원수들은 그분이 오래 전에 약속된 분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만 바울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요, 메시아가 나와야 할 가문의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그는 후대에까지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랐던 자신의 가르침의 일부를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가장 걱정했던 것 같은데, 이 점은 그가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언급하는 귀절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났다면서 부정한 자들인데, 여기서 바울은 거기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의 이 권면이 얼마나 필요했던가 하는 점은 옛날 역사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이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우리 신앙 가운데서 이 조항을 파괴하려고 모든 힘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조항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태어났으며,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사도들의 시기 이후 곳이어 말키온(Marcion)이 나와서 그리스 도의 인성의 실체성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려 했으며, 그 후에 마니교도들이 따랐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동일한 역병이 만연하고 있다. 부활에 관한 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타파하려고 얼마나 많은 수단을' 동원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확언은 아무도 내 복음을 거짓 중상으로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 내가 가르치고 전파한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태어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그는 '내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복음의 사역자라는 뜻에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부활에 대한 보장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셨다는 점을 고백하는 자는 또한 우리들이 일어날 것으로 확언하는 셈인데,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머리 되시는 분께서 그의 지체로부터 구별될 수는 없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는 우리 구속과 구원의 완성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그는 그것을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로 말하고 있다. 죽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다. 왜 ? 무슨 목적에서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 생각하면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효과와 열매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9. 복음을 인하여 내가~~~~고난을 받았으나~~~~~~"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는 그의 구금 때문에 그의 복음의 신빙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던만큼 여기서 그는 이 점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그는 겉모습만 보았을 경우에는 자신이 감옥에 있는 여느 죄수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시인하면서, 이것 때문에 복음의 거침없는 진로(free course)가 방해받지는 않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보다도 그가 고난받는 것이 선택자들의 혜택에 보탬이 되고 있으니, 그 까닭은 그것이 그들을 확신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은 그들이 받드는 선한 명분을 알고 거기서 힘을 얻을 경우 그들의 용기는 불요불굴의 힘이 되고, 마침내 육체적 고통과 고문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수치까지 무시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적대자들에게 공격과 모독을 당하는 것을 볼 경우 마땅히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을 보다 못하게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복음이 세상의 앞길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 만약에 우리들이 극도로 육신에 치우쳐 있지만 않다면, 설령 우리가 불경건한 자들의 잔인함으로 압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복음은 넓고 멀리 확장되고 퍼진다는 이 지식만으로 우리는 여러 박해 가운데서 충분히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이 아무리 애써서 박해한다 해도 복음의 빛을 흐리게 하거나 말소하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더 환히 비취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우리의 좋은 이름이 감옥에 갇힌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터져나와 넓고 멀리 확대되기만 한다면 기쁘게, 아니 최소한 침착한 마음으로 견디도록 하자.
"10. 그러므로 내가~~~~참음은"; 그는 결과를 통해서 자신의 구금이 조소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택자들에게 아주 효용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택하신 자를 위하여 .참는다' 는 말로써 그는 교회를 세우는 문제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안전보다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교회의 안녕을 증진하기 위해서라면 죽을 뿐 아니라 범죄자로 취급받는 것까지 기꺼워하고 있다. 이 귀절의 가르침은 골로새서 1장 24절과 동일한 것으로서, ,거기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위해서 그의 고난에 있어서 부족한 그것을 채우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교황주의자들은 무모하게 이 부분을 바울의 죽음이 우리의 죄악에 대한 보상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이 귀절은 이 표점을 전적 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것이 경건한 자들의 신앙을 확증하는 데 도움 되는 이상의 것을 주장하려 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지만, 곧이어 신자들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그는 설명 형식으로 덧붙이고 있다. 이 의미에 대한 더 상세한 강론은 인용된 귀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영광과 함께~~~~~" ;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하는 구원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살기 위한 것으로서 중생과 더불어 시작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다가 그의 나라에 모으실 때 이 유한한 생명의 여러 .비극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해방됨으로써 완성된다. 이 구원에 덧붙여서 하늘의, 곧 신령한 영광에의 참여가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높이는 뜻에서 그는 우리를 영원한 영광스러운 구원으로 부르고 있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그가 이것을 다음 내용의 서론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안되며, 죽음은 생명의 시작이라는 점을 믿는 것만큼 육신의 지혜에 어긋나는 것이 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것을 알게 른 귀절을 통해서 특별히 중요하거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하기 전에 이 런 서론을 사용하는 것이 바울의 습관이라는 점을 된다. 그 그 의미는 우 리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먼저 그의 죽 음과 굴욕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로마서 8장 29절에 서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만 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지적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이것은 신자들 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뜻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고통' 뒤에 행복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런 고통에 짓눌려 쓰러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이 권면을 활동해서 자극을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동일한 생각으로 십자가의 모든 쓰라림이 사라지고 달콤하 게 되는 것은 고통이나 고문, 연수치, 사망, 이 모든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한다고 생각할 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당황할 수 없으며; 특별히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승리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바울은 자신의 본 을 통해서 모든 신자들에게 장차 영광의 맛을 갖다줄 고통들을 가벼운 마음 으로 견디도록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 민기 어려운 것이요; 십자가가 우리를 너무 압도하고 우리의 시선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방패를 사용하도록 명심하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또한 생명과 -복됨이-있 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이 교제를 확고하게 고수함으로 써 우리 혼자서 죽을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반려 자가 되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죽음' 은 그가 고린도 4장 10절에 서 말하는 외적인 극기를 뜻한다.
'12. 참으면~~~~~~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 태만을 털어버리려는 뜻에서 이 엄숙한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그의 경고는 박해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을 포기해 버리는 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경고하고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이름보다 이 세상의 순간적인 목숨을 더 중요시한다면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비굴하게 부인 하는 자들을 주께서 그의 백성으로 계산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여기서 연 약성이 구실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허황된 아첨으로,스 스로를 기만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요새 되는 성령으로 무장되어 신실하 게 저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천박하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데 있어서 작용하는 것은 연약성과 배신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볼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의 여러 유혹거리로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이 가르침은 설명보다는 묵상을 더 필요로 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 33)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명백한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각자가 이것 이 결코 유치한 위협이 아니라 우리의 재판관께서 엄숙하게 선언하신 것이 요이것은 정한 때가 되면 사실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을 자기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는 것뿐이다.
"13. 우리는~~~~~주는 일향 미쁘시니(주는 신실하게 :거하시니)~~~~" ; 그의 이 발언은 언뜻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지만, 의미는 .'우리의 (불성실은 조 금도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영광을 훼손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지족하시므로 전혀 우리의 고백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라는 것이 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원한다면 모두들 그리스도를 배척해 보라지, -그들 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곧 이들이 .멸망할 때에라 도 주님께서는 불변한 채로 존재하신다' 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지 않으며, 그의 진리로부터+이탈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 모두가 그 리스도의 부인함을 받는다는: 점이 명백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불경 건한 배도자들에게서 이 위로를 받는데; 이 위로는 그들이 스스로를 달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환경에 따라서 색깔을 바꾸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두 얼굴을 하며 변화무쌍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내가 앞 귀절과 관 련해서 지적한 점, 곧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영속적이요, 불변한 진리 에 기초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인간적 불성실이나 배도도 그것을 흔들 어버릴 수 없다는 점을 확고하게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 이 일들' 은 .강조적인 표현으 로서 여기서 뜻하는 그것은 그가 권면과 함께 이야기해 일본 복음의 개요가 너 무도 중요한 것이므로, 훌륭한 사역자라면 그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 결코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결같이 취급되어야 하는 내용으 로서 인간들에게 제아무리 자주 지적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이다. 즉 마음에 것이나 이것은 네가 단 한 번 선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반하게 인간의 그것을 새기는 수고를 아끼지 말기를 내가 바라는 내용들이다'라는 다름없다. 훌륭한 교사는 교화()를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되며, 그는 거기에 자신의 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소극적인 면에서 그는는 그에 게 스스로 쓸모없는 변론을 삼가할 뿐 아니라 남들도 그런 일에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Moroμaxeiv(로고마케인)은 탁상공 론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보다더 현명해 보겠다는 욕망에 서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 이것은 그들에게 겁을 주라는 뜻으로서 우리 는 그의 격한 어조를 통해서 입씨름이 얼마나 교회에 위험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경건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 전시에만 관심을 두는 지식이다. 교황주의자들의 소위 사색적인 산신학이라는 것은 이 범주에 속한다.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 그는 λοтоμαχια(로고마키아)를 두 가지 이유 에서 정죄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그것이 무익하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 것이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동요시킴으로써 더 큰 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번 역에 있어서 내가 에라스무스를 따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바울의 의도와 일 치하기 때문이지만, 독자들은 바울의 말을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는 것 의 의 미로 보기 바란다. 헬라어로는 els obdev χρσιρν(에이스 우덴 크레-시몬)으 로 되어 있으며, 내가 xρσιμον(크레-시몬)을 대격 대신에 주격으로 보는 것 은 그렇게 해야 문맥이 더 잘 풀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그는 거기 서 무슨 유익이 오기는 고사하고 많은 악밖에 오는 것이 없는데 무슨 쓸모 가 있단 말이냐?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전복될 뿐이다 라고 말하는 셈이 다. 그러므로 먼저 이런 가르침은 그것이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는 유일한 근거에 입각해서 정죄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점을 주목하도록 하자.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의 꼬치꼬치 파고드는 마음을 선동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을 주는 데 있다. 교화에 아무런 보람이 되지 못하는 사색은 모두 집어치우자! 그러나 둘째 이유는 더 악독하니, 그것은 무익할 뿐 아니라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탁상공론이 제기되기 때문이 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면서 말 하나 글자 하나를 가지고 늘어지면서 말 싸움만 노리는 자들이 이 점을 마음에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야심에 끌려 정신을 잃고 있는데, 내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체험한 바로 이런 [야심은 치명적인 병이다.? 사도는 ˙그것을 듣는 자들이 망망한 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상 생활의 관찰이 전적으로 인정하는 내용 이다. 말싸움에 빠질 경우 '우리들이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사단이 분쟁을 악용해서 그들의 신앙을 동요시키거나 파괴하는 구실로 수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5. 네가~~~~옳게 분변하며" ; 이것은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훌륭한 비유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 족해야 마땅하다면, 날마다 설교를 들을 필요가 어디 있으며, 목회자의 직분 그 자체의 의의가 '무엇이겠는가? .각자에게 스스로 성경을 읽을 기회는 없 느냐는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교사들에게 말씀을 나누 는 임무를 할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빵을 갈라서 자기 아이들에 게 주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올바로 나눌 것 을 충고함 으로써 미숙한 사람들처럼 표면만 잘라내는 데 있어서는 성공하지만, 가장 깊은 정수는 손대지 못하고 그냥 버려두는 일이 없게 하고 있다. 그러나 나 는 여기서 이야기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적용된다고 보며, 말씀을 듣는 자들 에게 유익하도록 현명하게 분배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이 말씀을 난도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것의 팔다리를 끊어놓는 사람도 있고, 이것을 꼴사납게 만들어 놓는 사람도 있고, 박살내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 만 돌 뿐 핵심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모든 잘못들을 그는 올 바른 나눔, 곧 교화()에 도움이 되는 해석 방법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것은 우리들이 성경의 온갖 해석을 판단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원칙이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 모든 교리상의 분쟁의 근원은 재치 있는 |사람들이 세상 앞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함에 있다. 그 러기에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로 하여금 그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도록 당 부함으로써 여기에 대한 최선의 적합한 개선책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대중의 인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너는 네 자신과 네 사역이 하나님께 인준받는 것을 네 유일한 목표로 삼으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과시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을 제지함에 있어서 우리가 상대해야 할 분 이 하나님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유효한 것도 없다. 에라스무스는 '아네파이스퀸톤' 을 '얼굴을 붉히거나 수치를 당할 필요가 없는' 으로 번역하는데, 여기에 잘못은 없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적극적으로, 곧 '얼굴을 붉히지 않고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헬라어의 관용 어법이요, 또한 이 귀절에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여기에는 대조가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논논 쟁으로 교회를 소란시키는 자들이 서로간에 그처럼 잔인한 것은 패배당하 는 것을 수치로 들여기며 그들에게 모르는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점을 치 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부르면 서 먼저 게으른 말싸움꾼들이 아니라 일꾼들' 이 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말로써 그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우왕좌왕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간접 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일꾼들이 되어 어떤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나님의 일을 착수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수치거리가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수 다스러운 허풍선이들과 다뤄 이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교화에 대 한 우리의 열성, 우리의 근면과 용기, 우리의 가르침의 효율성에 있어서 그 들을 능가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디모데에게 부자 런히 일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고 있다. 반면에 야심적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꼭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예 리성 또는 애매한 지식에 대한 자신들의 평판을 상실하는 것이다.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 이 말에 대해서는 이미 디모데 전서 마지막 장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독자들은 그곳을 참조해 주기 바란다. 디 모데에게 이런 속되고 시끄러운 입씨름을 말리는 뜻에서 그는 이것이 일종 의 심연의 깊은 소용돌이와 같아서 일단 거기에 빠져들면 도저히 빠져나올 , 의 수 없고 오히려 더 깊숙이 빠져들고 말 뿐이라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그들의 말은 회저처럼 파 먹어 들어갈 것이다)" ; 의사 베네딕투스 텍스터(Benedictus Textor)는 에라스무스가 이 귀절을 잘못 번역한 사실을 ,나에게 환기시켜 주었는데, 이유는 에라스무스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병을 혼동하면서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회저()가 아니라 사람()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갈렌(Galen) 은 많은 논리에서 특별히 그의 책 〈비정상적인 종기>에서 정의를 내리면서 양자를 구별하고 있다. 폴아기네타(Paul Aegineta)는 갈렌을 따르면서 그의 제 6권의 책에서 암을 불규칙한 종기로서 무서운 막을 형성하고 있으며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색깔은 청적색으로 통증이 따르지 않는 것으로 정의 하고 있다. 후에 그는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형태의 암을 구별하고 있다. 어떤 암은 숨겨져 있으며 궤양이 없지만, 다른 암은 검은 모담즙이 많은 곳에서 궤양을 일으킨다.
그러나 회저()로 발하면 갈렌은 이미 인용한 저서에서와 글라우코(Glauco)에게 보내는 그의 두번째 책에서, 애티우스(Aetius)는 그의 책임제 14권에서, 그리고 로아기네타(Aegineta)는 그의 책 제 4권에서 그것이 어떤 지체이든 공격하는 큰 염증에서 오며, 그 ,염증이 해당 부분에서 열과 생명력을 박탈하기 때문에 그것이 기능을 잃어가는 것으 로 정의하고 있다. 신체의 일부가 완전히 마비되는 경우 헬라인들은 그 질병 을 σρακelos(스파켈로스)로, 라틴인들은 sideratio로, 일반 국백성들은 성 안토 니의 불로 부른다. 코넬리우스 엘쿠스(Cornelius Celcus)는 암을 이류(genus) 로, 사회저()를 종(species)으로 부름으로써 둘을 구별하지만그의 오류는 정평 있는 의사들에게 여러 곳에서 명백하게 (반박을 받고 있다.
그는 또 한 게 cancer와 gangraena, 두 라틴어의 유사성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내리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헬라어에_ 있어서는 이러한 실수가 불가능하다. Kaprivov(카르키논)은 라틴어 cancer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게(crab)와 질병 을 뜻하지만, 문법가들 생각에 회저는 소멸한다는 뜻을 가진 dad toi γραινειν (아포 투 그라이네인)에서 유래하는것이다. 그러므로우리는 회저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며, 바로 이것이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이자 긍가 파먹어 들어감 또는 소멸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지금까지는 어원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모든 의학계의 권위들은 이 질병의 성격이 얼마나 지독하던지 가능한 한 가장 아랍은 시간 내에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주위 부분에 퍼지고 당장 뼈에까지 파들어가며 마침내 그는 질병에 걸린 사람이 죽게 될 때까지 계속 파먹어 들어가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회저는 재빨리 다른 지체에까지 감염되어 마침내 신체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만다는 점을 생각하고 바울이 거짓 교의를 이 치명적인 감염에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다. 일단 거짓교의가 [허용될 경 우 그것은 점점 확대되어 마침내 교회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만다. 이 감염 은 너무도 파괴적이므로 '우리는 일찌기 공격을 해야지 그것이 점차 힘을 모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손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무 시무시할 만큼 복음이 교황주의자들 사회에서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은 목회 자들의 무지 또는 태만 때문에 여러가지 타락 현상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장기 간에 걸쳐 우세하고, 그것이 점차적으로 교의의 순수성을 파괴해 버렸기 때 문이다.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 그는 이 두 해충을 지적해 냄으로써 모두가 그들에 대해서 경계하도록 한다. 사실 온 교회의 파멸을 음모하 는 사람들을 그대로 숨겨둔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해를 끼칠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가 형제들의 잘못을 감추어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것은 그 전염도가 넓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 국한된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도 숨겨진 악을 적절한 시기에 가서 노출시키지 않는 것은 자산을 위한 위장이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생명이 나의 침묵으로 멸절하는 것이 옳겠는가? 바울은 이 소식을 디모데 한 사람에게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만대의 사람들에게 이 두 사 람의 불경건을 증거함으로써 그들의 타락하고 치명적인 가르침에 문을 닫아 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진리에서 이탈했다는 점을 지적한 다음에 예를 들어가면서 그들의 오류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이 이미 지나간 것처럼 꾸며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종의 풍유적 부활을 고안해 냈다는 뜻으로서, 오늘날 더러운 개들이 시도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사단은 이런 술책을 통해서 육신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신앙을 전복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그처럼 가혹하게 정죄를 받고 있는 쓸데없는 망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당황할 필요는 없지만, 복음이 맨 처음 전파되기 시작할 때부터 '어떤 사람들의 믿음이 전복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러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 자신과 타인들에게서 그러한 역병을 재빨리 물리치도록 각성해야겠다. 인간들의 지독한 허영심을 생각할 때 거 기에 귀를 기울이는 망측한 사람들이 있다 해도 전혀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 우리는 우리와 동일한 신앙을 동시에 고백한 사람들의 결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추문이 .일어나는가 하는 점을 잘 알고 있는데, 이것은 특별히 잘 .알려져 있고 평판이 뛰어난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배도할 경우 우리는 그다지 크게 동요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크게 존경하는 사람들, 즉 교회의 기둥과 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넘어질 경우에는 꼭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휘말려 넘어지고 만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여기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서, 따라서 경건한 자들은 가장 신앙이 확고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더라도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는 인간의 변덕 또는 불성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끝까지 지탱하는 데 방해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꼬집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택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비유적으로 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확고부동하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자에 속하는 한,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택자들이 변화하는 여러 사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 부동한 터에서 푹 쉬는 것은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 : 13>라는 말씀처럼 그의 손으로 고정시켜 놓은 뿌리는 비바람의 해를 입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먼저 육신의 크나 큰 허약성에도 불구하고 선택자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터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인간들이 놓는 기초도 튼튼한데 하나님께서 놓는 것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흑자는 이것을 가르침의 진실성을 아무도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불성실로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관련시키기도 하지만, 문맥을 볼 때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 곧 선택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인침이 있어" ; signaculum이라는 단어를 표적이나 새김의 뜻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오해가 야기되고 있으므로 나는 보다 덜 애매한 sigillum, 곧 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바울의 명백한 의미는 선택자들의 구원은 마치 인인()이 박힌 반지처럼 하나님의 은밀한 보호하 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고 분명 히 밝히고 있다(시 69: 28;빌4:3). 인침이라는 단어와 이어지는 귀절은 우리들이 선택자들의 숫자의 많고 적음을 우리의 견해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날인하신 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닫혀진 책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백성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면 종종 그들 중의 대다수가 우리에게 알 려지지 '않거나 우리들이 누가 그런 사람들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실수한다 하더라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인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런 배도에 직면할 경우 요 한의 말대로(요일 2:19)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 나니"라는 점을 지적함에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혜택이 있는데, 첫째 우 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요, 예상 밖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당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교 회가 안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서, 버림받은 자들이 그들의 예정 된 운명으로 이탈하는 것을 더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는데, 그 까닭은 하나 님께서 만족하시는 숫자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상 과 소망에 위반되는 무슨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주님께서는 의 백성을 알고 계시다는 점을 곧 깨닫도록 하자.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 배신 때문에 일어난 추문으로 신자들이 극도로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서, 여기서는 그 러한 위선자들을 예로 그들면서 우리에게 '그처럼 기독교를 위장하고 하나님 을 조롱하지 말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위선자들의 사한 사악성을 이처럼 폭로하십으로써 그들을 처벌하시므로[이와 유 을 운명이 우리에게 닥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τ진실한 양심으로 하나님 두려워하도록 .하자 라는 1말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 로 는』자는, 곧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으로 ,고백하며 (그들 가운데 하나 지 계산되기를 바라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에게서 모든 불경건을 멀리하 하며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는 것을 주의 이름을 자랑 주의 양떼에 속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는 뜻으로서,ι이것은 이사야 4장 1절에서 어떤 여인에게 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 여자가 그 곱의 남자의 합법적인 아내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창세기 48장 16절에서 야 게서 모든 후손을 두고 야곱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 가문의 명칭이 그에 유래하는 것이기에 그치지 않고 계승된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와 마 찬가지이다.
"20, 큰 집에는~~~~~~~" ;이제 그는 계속해서 한 가지 비교를 들어가면서 당분 신앙심과 열성을 탁월하게 보여주던 사람들이 수치스럽게 떨어져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적절하고 합당한 배열로 보아야 가득한 큰 집에 '전시용 그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온갖 종류의 설비가 있다 해서 잘못으로 볼 릇이 있을 뿐 아니라, 보다 못하고 불품없는 그릇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벽 선반과 :테이블 위에서는 금과 같은이 정번쩍거리는 반면 부엌에는 나무와 질그릇이 갖추어져 있다면 이 다양성은 아름답게보 아버지가 되 이기까지 할 것이다. 만일 그의 가족에게 부요하고 풍성하신 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큰 집에 여러가지 가구를 두고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해서 놀랄 이유가 :무엇인가? .
주석가들은 큰 집이 교회를 뜻하는가, 아나면 세상을 뜻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문맥은 우리가 그것이 교회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대상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식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며,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것을 확대해서 온 세상과 관련시키고 있다. 곧 로마서 9장 21절 에서 그는 모든 버림받은 자들을 여기서 사용된 동일한 용어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누가 이것을 세상과 관련시킬 경우 다룰 아무런 이유가 없 지만 바울의 의도가 선인들이 악인들과 섞여 있는 것을 이상하 여기지 말 하게 아야 하며, 이것이 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준한다는 것은 의 심할 수 없다.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그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 버림받은 것이 수치스러운 노릇이라면 그 수치는 그들 자신에게 국한되는 것이지 다양한 가구를 그 용도에 따라서 배치하는 가장의 집을 꼴사납게 .하거나 그 가장에게 수치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영예롭고 더 고귀한 용도에 적응시키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버림받은 자의 경우를 통해서 인간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려 할 경우 그 상태가 얼마나 혐오스러운가 하는 점은 마치 거울에 비춰 봄과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없는 생활에 전심할 것을 권면할 이유를 다분히 제공해 주고 있다. 이 귀절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대권 으로 밝히는 것들을 인간의 의지와 행위의 권한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은 아주 경솔한 것이다.
바울은 지금 로마서 9장-16절에서처 럼 인간의 선택의 근거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과멸을 받으려고 태어난 불경건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의 숫자에 포함시키고 자신의 입양을 성취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을 추론하는 것은 어 리석은 짓이다. 이것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가 아니다. 이 짤막한 경고는 마치 바울이 인간에게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아니 창세 전에 이미 성취된 일을 처리하라고 당부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자 신의 운명(predestination)을 결정하도록 당부하는 자들을 .반박하는 데 충분 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이 귀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적합한 자격을 갖 추도록 함에 있어서는 자유의지 하나로 충분하다고 추론하는 사람들도 있 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언뜻 지금까지 이야기된 사람들의 것에 비해 덜 어 리석은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들에게도 확고한 근거는 전혀 없다.
사도는 자신들을 하나님께 성별하려는 자들은 스스로를 불경건한 자 들의 오염으로부터 청결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권면하고 있는데, 이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다른 곳에서 명령하고 있는 동일한 내용이다. 여기 에는 우리가 바울의 다른 많은 글에서 보아온 것과 전혀 다른 데가 없는 데, 특별히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고린도 후서 6장 17 절 (사 52 : 111 참조)의 말반씀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성화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기독교인의 임무와 소명에 대한 문제는 그 것을 성취하는 인간의 역량이나 능력에 대한 문제와는 다르다. 우리는 신 자들이 스스로를 청결케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주님 께서는 다른 곳에서 에스겔을 통해(겔 36:25)[우리가 정결케 되도록 맑 은 물을 보내실 것으로 약속하시면서 이것을 주님 자신의 일로 밝히고 있 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도움없이 자신을 청결케 하겠다고 공연히 우리의 힘을 행사하기보다는 주님께서 우리를 청결케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마땅하다.
"귀히 쓰는 그릇(커하게 구별된 그릇)~~~~~" ; 이 말은 존귀하게 장식용으로 구별된 그릇을 뜻한다. 가정에서 '쓰임받는' 그릇은 훌륭하게 용도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 후에 그는 우리가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덧붙임으로써 이 비유를 더 설명하고 있다. '나는 바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하겠노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기만 한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라는 미치광이들의 울부짖음은 .집어치우도록 하자.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개선하고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 섬김 받기를 원하고 있는가를 뚜렷하게 밝혀주시고 있다.
"22.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 이것은 그가 방금 어리석은 변론들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과 실리추구와 헛된 호기심 때문에 올바른 신앙에서 이탈한 후메내오와 빌레도에 대한 그의 질책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해서 디모데에게 그런 위험한 역병을 아예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목적으로 그에게 '청년 특유의 욕망'을 피할 것을 충고하고 있 는데, 이것은 성적 죄악이나 수치스러운 욕망, 또는 흔히 젊은이들이 빠지 기 쉬운 방탕한 과정 가운데 그 어느 것을 뜻하지 않고 왕성한 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치우치기 쉬운 격렬한 감정이나 충동을 뜻한다. 변론에 있어서 젊은이들은 지긋한 나이를 가진 사람들에 비해 더 빨리 열을 올리며 더 쉽게 화를 내고, 경험 부족으로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더 담대하고 무모하게 일을 처리해 버린다. 그러기에 바울은 한 청년에게 까딱 잘못하다간 쓸데없는 논쟁에 말려들기 쉬운 그 나이에 있기 마련인 잘못들에 대해서 신중하게 경계할 것을 얼마든지 권면할 수 있다.
"의와~~~~~화평을 좋으라" ; 그는 정반대 성질의 특성을 열거함으로써 젊은이 의 극단에 조금도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그의 마음을 지키게 하고 있다. 이 것은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들이 네가 온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하고 끝까 지 보살펴야 할 내용들이다 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먼저 그는 의, 곧 올바 른 생활 방식을 언급하고, '다음으로 그것의 구성 요소인 '믿음'과 /사랑 을 덧붙이고 있다. '화평'이 현재 그의 중대한 관심이 되는 것은 그가 금하고 있는 변론을 마냥 즐거워하는 자들은 필연코 시끄럽게 다투기 마련이기 때 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 은 전반적인 예배에 대한 대유법적 표현이다. 아니면 이것을 신앙을 고백하는 것의 의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신령한 예배의 핵심이므로 그것은 종종 하나 님에 대한 신앙이나 예배의 전부를 상징한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변화평을 좇으라는 말로써 그가 모든 신자들을 디모데에게 한 예로 제시하면서, 그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모든 자들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 면 디모데에게 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도록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는 지는 분명치 않지만, 후자의 해석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 그가 이런 변론을 어리석은 것 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교훈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그것 때문에 제아무리 재치를 보일 기회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경건을 증대 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선한 목적에 있어서 현 명할 때만이 실제로 현명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그처럼 흉측하고 어리석은 일에 얼마나 바보스러운 경탄을 보내는 지 모르며, 얼마나 진지하게 그것을 추구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 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런 전사를 통해서 그들의 호의를 얻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우리는 세상이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변론이라도 어 리석은 것은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라는 바울의 이 발언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자. 다음으로 그는 여기서 생기기 마련인 악을 설명하면서 그것 때문에 다툼 과 분쟁이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날마다 체험하 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변론을 경고하는 본보기들이 많음에도 불 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 바울의 생각의 흐름은 다음 과 같다. 곧 하나님의 종은 말다툼에 대해 의연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어리석은 변론은 논쟁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하 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멀리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다. 하나 님의 종이 다투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 한 가지로 쓸데없는 변 론을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사람들이 끝없는 쟁론을 시작함으로써 박 수갈채를 받으려고 뻔뻔스럽게 나오는 것은 얼마나 몰염치한 짓인지 모르 겠다. 교황주의자들의 신학을 보라. 정론과 말다툼의 기술 이외에 다른 무엇이 거기에 담겨 있는가? 따라서 어떤 [사람이 신학에 실력을 많이 갖 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그리스도를섬기는 데제 부적당한 사람이 될 것 이다.
그리스도의 종에게 할 것을 당부함으로써 그는 다투기를 좋아하는 기질과 정반대 되는 무덕을 요청하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 곧 그가 διδακικ6S(디다크티코스 :가르칠 자격이 있어야 불한다)라는 말도 내용은 같 다. 가르치는 자는 온유와 침착한 기질이 없이는 가르칠 수 없다. 만약에 가르치는 사람이 싸우는 일에만 급급하다면 무슨 제약을 지키겠는가? 사람 이 가르치는 일에 자격을 ,갖출수록 그는 그만큼 논쟁과 다툼을 기피하기 마 련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너무 정급하기 때문에 성가신 사람이 되거나 지 겨운 사람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그는 참을성을 덧붙이고 그와 동 시에 그것이 왜 필요한가 하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경건한 교사 에게는 고집세고 반역적인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본분이 있으며, 이것은 오직 자제하는 온유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25.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 '혹'이라는 표현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거의 불가능하고 절망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 다. 바울의 의미는 온유를 받을 자격이 가장 적은 사람에게까지 그것이 베 풀어져야 마땅하며; 처음에는 진전에 대한 그럴듯한 소망이 전혀 없더라도 여전히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실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다. 인 간의 회심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므로 오늘날 순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자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변화되어 다른 사람이 될지 누가 알 겠는가? 따라서 회개가 하나님의 은사요, 사역이라는 점점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더욱더 진지하게 소망할 것이요, 이 확신으로 격려를 받아 반역 자들을 훈계하는 데 더 많은 수고와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씨 뿌리고 물 주는 일을 우리의 임무로 알아야 마땅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증대케 해주실 것을 예상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우리의 수고와 노력 그 자체로서는 쓸모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것이 무익하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잠간 동안 하나님께 불순 종한 자들이 회개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그것 이 '지리를 아는 것 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그가 하나님과 그의 교의에 대해서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는 한 계속 눈 먼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조명 뒤에는 마귀에 대한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 따른다. 불신자들은 너무도 사단에게 도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몽롱한 정신으로는 자신들의 비참상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진 리의 빛을 우리에게 비취게 하실 경우 우리를 그 치명적인 잠에서 일깨워주 시며 우리들이 갇혀 있는 올무를 타파하시고,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신 다음 에 그에게 순종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
"26.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 마귀가 우리를 자기 멋대로 이리저 리 끌고 다닐 정도로 우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말로 무시무시 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은 너무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순종의 기반(bond)을 타파해 버리는 자들의 상태로서, 오늘날 우 리는 버림받은 자들에게서 사단의 이러한 포악한 지배의 증거를 보고 있다. 곧, 만약 그들이 사단의 은밀한 능력에 의해서 몰아붙여지지 않았다면 그 들이 그처럼 포악하고 잔인하게 온갖 비천하고 수치스러운 죄악으로 달음박 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단이 불신자들에게서 권한을 행사하는 이것은 바 로 우리가 에베소서 2장 2절과 관련해서 본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한 본보 기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명에 아래 두며 성령의 지배에 복종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아야겠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처럼 속박 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불경건한 자들에게 죄를 짓고 있지 않다는 주장의 구실이 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사단의 사주를 받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 시 말해서 그들을 휘어잡고 있는 악에 대한 불가항력의 충동은 그들에 대한 사단의 지배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온 마음을 기울여 사단이 그들을 몰아붙이는 대로 가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속박은 자발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