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딤후1:1 ~ 5)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1)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2)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3)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4)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디모데후서의 주제]
누가의 설명만 가지고는 첫째 편지가 쓰여진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이후로 바울이 디모데와 개인적으로 접촉 했다는 것이요, 또한 일반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그가 디모데를 여러 곳에서 자신의 동료와 조력자로 고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편지가 그의 앞으로 쓰여지고 있는 동안 그가 여전히 에베소에 있었다는 점을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끝에 가서 바울이 브리스가, 아굴라, 그리고 오네시보로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사람은 에베소에 속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누가의 말대로 바울이 유대를 향해 출항했을 때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이 편지의 으뜸가는 목적은 디모데에게 복음의 신앙을 확신시키며, 순수하고 계속적인 전파를 행하도록 함에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상황도 이 권면에 특별한 의의를 더해 주고 있다. 바울은 자기 눈앞에 죽음을 두고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복음에 대한 증거로서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나라, 영생의 소망, 기독교인의 전 투, 그리스도를 자신있게 고백하는 것, 그리고 교의의 확실성 등에 대해서 읽는 모든 내용을 단지 잉크만이 아니라 바울의 활력으로써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가 주장하는 것 가운데 당장 죽음을 서약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내용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본 서신은 바울의 교의에 대한 엄숙하고 끈덕진 비준으로 볼 수도 있다.
첫째 편지와 관련해서 우리가 이미 지적한 내용, 곧 사도가 단지 한 사람을 위해서만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가르침을 한 사람에게 주었는데, 이것을 그는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그는 디모데가 어릴 적부터 양육받아 온 신앙을 들어 그를 칭찬한 다음에 그에게 그가 가르쳐 온 교의와 위임된 직분에 있어서 신실하게 인내 할 것을 권면하고, 그와 동시에 디모데가 자신의 감금 소식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탈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그를 기다리고 있는 보상을 두고 자랑하고 있다. 그는 또한 오네시보로를 칭찬함으로써 그의 본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려는 자에게는 고된 임무가 따르기 마련이므로 그는 농부와 군사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농부들은 어떠한 열매를 거두기 이전에 땅을 일구는 데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군사는 군대와 사령관의 명령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관심과 염려를 제쳐놓는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복음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디모데에게 그것을 남들에게 전하고 또 후대에 양도하도록 관심을 가질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는 또 다시 자신의 구금을 언급하면서 그의 용기로 말미암아 남들을 북돋아주는 거룩한 열성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면류관을 자기와 함께 곰곰이 생각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에게 서로 우기는, 탁상공론과 헛된 질문을 삼갈 것을 명령하면서, 교화에 대해서 열성을 품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쓸데없는 논쟁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그것 때문에 멸망한 사람이 있다는 점을 후메내오와 빌레도 두 사람을 지목하고 있다. 이 두 사람으로 말하면 어처구니 없는, 부활 신앙을 부정하는 흉측한 죄에 빠졌으며, 그들의 주제 넘음 때문에 무시 무시한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타락은 특별히 평판이 좋은 사람들이 거기에 관련될 경우 심각한 추문을 야기시키기 마련이므로 그는 경건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사람 모두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며, 교회가 악 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면 이런 종류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섬세한 마음이 무리하게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주께서 그의 몫으로 선택한 백성을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 점을 완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현명한 일이다. 다음으로 그는 다시 디모데를 권면함으로써 그의 사역의 임무를 충실하게 견지하도록 하고 있다. 그로 하여금 더욱 더 충실하도록 그는 선하고 경건한 자들에게 얼마나 위태로운 시기가 기다리고 있으며, 얼마나 파괴적인 사람들이 곧 그들에게 대항할 것인가 하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비해서 그는 그에게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과에 대한 소망으로 무장시켜 주고 있다. 특별히 그는 성경의 올바른 사용법을 지적하면서 꾸준히 건전한 가르침에 종사할 것을 추천함으로써 그것에 의해서 교회의 교 화에 필요한 무장을 전적으로 갖추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 이제 가깝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지만 그의 태도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향해 치닫는 정복자의 태도 바로 그것으로서, 이것은 그의 경이적인 확신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가능한 한 빨리 자신에게 올 것을 요청한 다음에 그는 당시 자기가 당면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필요사항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의 주제이다.
"1. 하나님의~~~~~약속대로" ; 자신의 소명을 더욱 더 확실히 하기 위해 그는 이것을 영생의 약속과 관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약속하셨듯이 이제는 '나로 하여금 그 약속을 선포할 사역자로 정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사도직의 의의, 곧 그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의 안에서 생명을 찾도록 하려는 뜻임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의 약속이 이미 오래 전 조상들에게도 허용되었다는 말은 아주 정확한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이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아래서 살았던 자들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음에 틀림없으며, 그 약속된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기까지 어느 정도 보류상태에 있었다 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다.
"사도 된 바울~~~~~~" ;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모데에게만이라면 그처럼 거창하게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요, 자신의 주장의 신빙성을 이미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처럼 미사여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에게 속한 공적 권위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장하며, 여기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자신의 전체 사역 과정에 대한 인정을 받고 그의 죽음이 다가 옴에 따라서 그가 그처럼 수고하며 가르친 교의에 도장을 찍음으로써 그것이 후대에 거룩하게 받아들여지고, 그에 대한 참된 예표를 디모데에게 남겨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먼저 이것은 그의 습관이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한 사도'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말을 오류에 빠지기 쉬운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는 개인의 말처럼 건성으로 들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의 말로 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의 직분의 위엄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와 선택에 의해서 받기 전에는 누구 에게든 아주 귀한 것이므로 그는 곧이어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거기에 임명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여 자신의 소명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도직의 근원이며 보증이므로,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2. 사랑하는 아들" ; 이 표현을 통해서 그는 디모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권위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곧 그는 디모데가 자기의 아들로 불리어질 만한 그런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를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예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 시키는 데 사용하는 활동의 주인공인 신실한 사역자들에게도 양도되고 있다.
"은혜와 긍휼~~~~" ; 그가 여기서 삽입하고 있는 긍휼은 대개 그의 일상적인 안부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서 내 생각에 그는 여느 때보다 더욱 더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가 순서를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은혜의 성격과 근원을 더욱 더 명백히 하는 뜻에서 긍훌이 은혜 다음에 놓이는 것도 부적당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의 긍훌하심 때문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긍휼은 또한 하나님의 긍휼하심 그의 일상적인 축복의 의미로 설명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의 긍휼하심 때문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긍휼은 또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많은 증거가 되는 그의 일상적인 축복의 의미로 설명될 숟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를 질고에서 해방시켜 주시며,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며, 우리의 연약성을 담당해 주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긍훌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 이것은 그가 얼마나 그의 기도에 있어서 신실했는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자신에 대해서 확증하고 있는 것은 그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추천하는 내용일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본을 닮아가도록 감동을 받고 격려를 받아야 마땅하다. 아니, 최소한 그런 본질적인 실천이 우리 가운데서 자주 행해지도록 해야 마땅하다. 밤낮 기도 한다는 말을 바울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잘못된 것은 없지만, 나는 그것을 더 간단한 의미로, 곧 그에게 있어서는 기도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는 의미로 보고 싶다.
"청결한 양심으로" ; 바울의 양심이 항상 청결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명백한 것은 자신이 위선에 끌려 죄악 된 욕망에 빠졌다는 점을 그가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롬7:8). 그가 바리새인이었을 때 복음을 대적한 것은 악의가 아니라 무지 때문이었다는 크리소스톰의 변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청결한 양심이란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진지하고 간절한 경외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이 말을 현재(the present time)에 국한시키며 그가 그의 조상들과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이제는 그가 복음에 의해서 깨우쳐졌으므로 순수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정으로 그리하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 발언은 그가 여러 곳에서 하고 있는 많은 항변, 곧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 :14),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행 26: 6-7),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행 28: 하는 귀절과 그 의미가 동일하다.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 ; 그는 유대인이 온 사방에서 자기에게 퍼붓는 잘 알려진 중상모략, 곧 그가 자기 민족의 신앙을 버리고 모세 율법의 이단자가 되었다는 내용에 대항해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는 그 반대로 자신이 조상들에게 배워온 하나님, 곧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손에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 조작한 무슨 신기한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그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따르는 것이 커다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종류의 미신에 대한 구실이 될 수도 있었으며, 어떤 사람이 만약 조상들의 습관으로부터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털끝만큼이라도, 이탈할 경우에는 죄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바울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그들의 습관에서 이탈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우상 숭배자들의 후손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섬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요한복음 4장 22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의 모든 허망한 종파를 부정하면서 유대인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방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점을 피력하신 바 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자기 조상들의 권위에만 의존하고 있거나 무분별하게 자신의 모든 조상을 들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에 대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스스로 이상한 신을 조작해 낸 것으로 몰아 붙이는 거짓된 의견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하고." ; 이 귀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계속해서 감사하는 이유가 바울 자신이 끊임없이 디모데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독자들은 다음 해석 역시 동일하게 좋은 아니, 더 나은 의미를 주지 않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곧 내가 계속 기도하면서 너를 기억할 때마다 너를 두고 감사하노라 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사실 '호스'는 종종 그런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다른 해석은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캐낼 수가 없다. 나의 해석에 따를 경우 기도는 관심의 표가 되고, 감사는 기쁨의 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그가 부여 받은 탁월성을 기억했기 때문이며, 여기서 그의 감사가 나온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은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항상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다. 양자는 진정한 선의의 증거이다. 그가 디모데에 대한 자신의 '생각' 을 αδιαλеιττον(아디알레이프톤)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기도할 때마다 그를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이다.
"5. 이는~~~~ 생각함이라 ," ; 그가 디모데의 믿음과 그의 외할머니, 어머니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은 그를 칭송하기보다는 그를 격려하는 뜻에서이다. 사실 하여금 어떤 사람이 훌륭하고 용감한 첫 발을 내디딜 경우 그의 진전은 그로 더욱 더 전진하도록 용기를 주기 마련이며, 자기 가문의 여러가지 예는 그를 더욱 더 매진하게 하는 강력한 촉진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디모데에게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곧 그를 어릴 적부터 해서 모유와 함께 경건을 먹여 준 분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경건한 양육에 의해서 디모데는 그의 과거와 그의 조상들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권면을 받았다. 이 여자들이 그리스도에게 개종했는가,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여기는 칭찬하고 있는 믿음의 시작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믿음이란 기독교 밖의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약간의 의심이 따르는데, 후자가 더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물론 당시에 많은 미신과 타락이 어느 곳에서나 판을 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주께서는 항상 자신의 백성을 갖고 계셨으며, 그들이 다수와 함께 타락되는 것을 허용치 않고 자신을 위해서 성별함으로써 유대인 가운데 언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은혜의 담보들이 남아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직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중보자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은 것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모순된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대해서 적극적인 주 수 없으며, 그렇게 한다면 무모한 짓이 될 것이다.
"확신하노라." ; 이 구절은 나의 마지막 추측을 확증시켜 주는 것으로서, 그 까닭은 그가 내가 보기에 디모데의 현재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 때문이다. 그가 여기서 디모데의 신앙이 그의 모친과 외조모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만 했더라면, 그것은 디모데의 신앙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훼손하는 노릇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디모데가 어릴 적부터, 곧 그가 아직 복음의 지식을 받지 않았을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앙을 얼마나 많이 받아왔던지 그것이 산 씨앗이 되어 후에 증 대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