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딤후 1:6 ~14)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7)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8)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9)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0)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1)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2)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3)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4)
2. 묵상 (Calvin선생주석)
"6.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 물론 디모데가 바울 개인의 독 자적인 선택이 아니라 교회의 공동투표에 의해서 사역자로 초청받았음에 를 림없지만, 바울이 그 선택을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이해할 만한 것은 그가 그것의 주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디모데의 선택 이 아니라 임명, 곧 '엄숙하게 :세우는 '의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역자로 임명함에 있어서 모두가 한 사람의 머리에 기존을 얹었 는가, 아니면 한 사람이 그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의 대표로서 그렇게 7 했는가 하는 점은 전혀 명백하지 않다. 나는 한 사람만이 손을 얹었던 것으로 보고 싶다.이 의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사도들이 자기 주민족의 옛 습관에서 빌어온 것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 당시 사용되고 있었던만큼 그대로 행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추천하고 있는 건 전하고 질서정연한 절차의 일부이다(고전14:40).
아직도 의심이 가는 점 은 여기서 말하는 안수가 임명과 관계되고 있는가 하는 점인데, 그 까닭은 당시 로마서 12장과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언급하는 성령의 은혜들이 목사로서 세워지지 않은 여러 사람들에게 안수를 고통해서-베풀어졌기 때문이 다. 나는 첫째 편지를 볼 때 바울이 여기서 목사의 직분에 '대해처다루고 있 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 귀절은 그가 거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 곧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 을 조심없이 ,말며(딤전 4:114)라는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쯤으로 해결하고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은혜가 외적인 상징에 의해서 .수여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임명된 모든 사역자들 은 전체 교회의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께 추천되며, 이렇게 함으로써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대답한다.
" 물론 외적인 상징이 무의미하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은혜가 그것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아니요, 그들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신실한 표일 뿐이었다. 이 임명의식은 인간 앞에서 권위를 나타내려고 고안된 속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합법적인 성별행위, 곧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바울은 이 상징으로서 전체 절차를 대신 하고 있는데, 그의 의미는 디모데가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은혜 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대유법이 사용되 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아 있다. 만약 디모데가 사역자로서 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혜를 그가 임명받았을 때에야 받았다면, 아직 적합하지 않은, 곧 자질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사가 여전히 부족한 사 람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나는 그 은사가 현재 그에게 주어지고 있 다는 사실은 그가 전에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 것으 로 대답하겠다.
틀림없이 그는 바울이 그 사역으로 그를 부르기 이전에도 교의와 다른 은사에 뛰어났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일에 쓰 시기로 의도하시고 그를 거기에 부르셨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로운 은사들을 채워주신 것으로, 아니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신 것보다 곱절 을 그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말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디모데가 임명받기 이 전에는 아무런 은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직분이 그에게 주어졌 을 때 그것이 더욱더 밝게 비췄다는 결론이 나온다.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 이것은 디모데가 받은 은혜의 몫이 풍성할수록 날 마다 전진하려는 의욕이 그만큼 그에게 더 열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라는 단어가 앞 내용과 이 귀절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 권면이 아주 필요한 것은 은사들의 탁월성이 경솔과 나태를 낳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아니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것은 바로 사단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에 관한 모든 것을 말살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 이것은 그 의 앞의 말에 대한 확증으로서, 이것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그가 받은 은사들 의 능력을 증거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능력의 영'으로 그 의 사역자들을 다스린다는 사실에 호소하고 있는데, 능력의 영의 반대는 두려움의 영이다. 여기서 그들이 태만에 빠질 것이 아니라 더욱더 큰 확신 파 적극적인 활동에 몰두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눈에 보이는 결과로 드러 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로마서 8개 15절에 나오는 귀절은 언뜻 이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문맥을 볼 경우 그그 의미가 다르다. 거기서 그는 모든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들의 입양에 대한 신뢰를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 는 특별히 사역자들이 그의 관심으로써 디모데의 신분을: 통해서그들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자극시키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자신의 지무를 냉동생담 하고 맥없이 수행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성령의 력을 의지하면서 강력하게 나아갈 것을 원하신다.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 여기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아무도 사역의 실천에 필요한 한 정신과 불굴의 확신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위로부터 『새로운 사능력을 부여받지 않으면 .안된다. 장애물이, 얼마나 그리고 사많던지 .그것을 극복하기에 적합한 인간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능력의 운영으로 무장시켜 주시는분은 하나님이시다. 곧 어떤 면에서 큰 힘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지탱되지 않을 경우에는 바로 쓰러지고 만다.
다음으로 우리는 너무도 겁이 많고 나약해서 노예와 ,같은 사람들,-곧 필 요한 경우에도 진리의 변호를 위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 은 그리스도의 종을 다스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점을 '추론하 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부름받고 있는 자들 가운데 자신들이 참되다는 어떤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자는 극히 스스트물다는 결론이 나온다.7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난동을 부리는 높 은 자리의 [모든 (권력을 자신만만하게 물리치는 자들이 그들 중에 .몇이나 되 는가? 대부분이, 아니 거의 모두가 자신의 도이익과 여가에만 관심을 쏟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어떠한 고통이 터지는 순간 벙어리로 탈바꿈해 버리 지 않는가? 결과는 그들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엄이 전혀 나타나 지 않는 것이다. 들여기서 마음 (spirit)이라는 단어는 다른 많은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는 능력 다음에 왜 사랑과 근신을 덧붙이고 있는가? 내가 보기 에 그것은 아무렇게나 성급하게 돌진하면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는 것으로 떠들어대는 광신자의 무절제한 열성과 성령의 '능력을 구별하기 위해 서인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의 강력한 힘에 .사랑과 근신, 곧 교화( )에 대한 침착한 관심이 배합된다는 점을 일부러 밝히고 있다. 바울은 동 일한 영이 복음 선포 이전의 선지자들과 교사에게 허용되었다는 점을 부정하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뒤 은혜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명백하고 두드러지게 드러나야 마땅하다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8. 그러므로~~~~~부끄러워 말고~~~~~" ;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복음을 고 백하는 것이 그 당시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디모 데에게 야심이나 오명에 대한 공포가 담대한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그가 앞에서 말한 내용의 결론으로 이 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된 사람은 세상의 '소요 때문에 :당황 하지 않고 불경건한 자들이 자신을 치욕으로 덮는 것을 영예로 여길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 우리 주의 증거'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 에 대해서 증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임무를 우리 에게 부과하고 있기으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여하신 크고 특별한 영예로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생각하지 못할 그리스도 인이 아무도 없지만, 이것은 특별히 목사와 교사에게 부여된 영예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 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세상이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 서 증오심을 보이면 보일수록 목회자들은 더욱더 용감하게 그들의 수고를 통해서 그것을 공공연히 증거해야 마땅하다. "나를 부끄러워 말고"라는 표현이 덧붙여지고 오있는데, 이것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공통된 명분을 가진 동료로 생각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박해를 감수하고 있는 자들과의 교체에서 물러서기 시작한다면 결국 우리의 목표는 복음으로 하여금 모든 (박해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제조한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너는 네 스승에케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느냐? 너 도 똑같은 꼴이 되고 말 거야. -그런데 왜 온 세상이 쑥덕거리고 있는 가르침 을 굳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거지제?"라는 식으로 디모데를 비웃는 악한 사람 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이 권면을 듣고 틀림없이 새힘을 얻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에게, '네가 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나에게수치스러운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나는 주를위하여 갇힌 자이다', 나는 무슨 범죄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름 때문에 쇠고랑을 차고 있는 것이다'라 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그는 디모데에게 복음으로 인해 고통받을 각오를 히라고 당부함으로써-그에게 그가 요청하는 실천방법을 지적해 주고 '있다: 사실 십자가로부터 움츠러들거나 [그것을 피하려구하는, 것은 언제나 _복음을 수치로 여긴다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용감하게 증거 하도록 격려하고, 그 증거가 공연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십자가를 져 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뜻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지 않을 경우 우리는 당장 넘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권면과 위로가 담겨 있다. 권면이란 우리의 현재 연약성으로부터 우리의 눈 을 돌려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상의 그것들을 시도하 고 거기에 매진하라는 것이요, 위로란 우리가 .복음 때문에 무슨 '고통을 당 할 경우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요, 그의 능력 안에서 우리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9. 우리를 구원하사" ; 축복의 위대성으로부터, 그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 님께 신세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가0우리에 게 베푸신 구원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짊어져야 할 모든 질고를 쉽게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구원했다늠 단어는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것이지 만 이 문맥에서는: 영원한2구원에 관련되는 것이다. 그의 의미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구출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으로서, 따라서 그들이 주님을 속량자로 인정하기보다 그들의 '덧없는 목숨이나 평판을 더 아낀다면 더없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소명' 을 우리 구원의 확실한 보증으로 삼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 크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죽음에 참여하게 하신다.
이 소명을 더 강조하는 뜻에서 그가 그것을 또 거룩하다' 고 지적하고 있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겠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 과 마찬가지로,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은혜에 동참하도록 부르시지 않았다면 그의 죽음은 공연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확증된 '뒤에도 두번째 축복,9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품에 풀어주시며 주님의 혜택을 우리에게 전 해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즐기게 '하는 '것은 계속 베풀어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행위대로 위하심이 아니요" ; 이제 그는 우리의 |소명과 우리의 전반적 인 구원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있다.우리에게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다 먼저 이룰 행위가: 없었으며, 따라서{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과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 은혜라는 두 단어는 환 치법에 따른 표현으로서 후자를 형용사로, 곧 그의 은혜로운 뜻에 따라서' 로 볼 수 있다. 물론 바울은 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그 의 은밀한 경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여기서 은혜 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은 자신의 요점을 더욱더 명백하고 완벽하게 함으로써 행위에 대한 모든 관련성을 배제하려는 뜻에서이다. 이 귀절에 담겨 있는 대조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곳에는 전혀 행위를 내세울 여지가 없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특별히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그의 예기()하시는 대상으로 삼은 선택(choice)을 여기서 지적받고 있 다. 동일한 주제가 에베소서 1장과 관련해서 더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으 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언급하는 바이다.
"우리에게 .주신~~~~~" ; 그가 무상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허용된 시 간의 순서에 따라 변론을 펴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전에 그것을 받을 만한 일 을 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부 터 선택하셨다면 그 .당시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우리 자신도 아직 존재하기 이전이므로 행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는 이야기 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미리 내다보신 행위에 의해서 영향을 일반으셨다는 퀘 변은 길게 반박할 필요가 없다. 선택 그 자체가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며 원천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척하신 것이라면 이 행위는 도대체 무 엇이겠는가?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은혜의 허용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는 수단이 되는 예정과 관련된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 점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이 은혜가 우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사 작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맨 처음부터 스스로 결정 하셨던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전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아직 태어나 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을 주셨으며, 그가 무엇 이든 공연히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결과로 명백히 보여줄 때가 을 때까지 그것을 그의 보화들 가운데 보관하셨던 것이다. 디도서 1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그는 창세 이후의 끝없는 햇수를 영 원한 때'로 부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기발한 강론을 퍼지만 바울의 의도에 생소할 뿐이다. 비바울의 의도는 단순히 모든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라는 것이다. 또한 그 는 라그리스도를 우리 구원의 유일한 바탕으로 삼고 있는데, 이 점 역시 마땅히 주목해야 할 것은 에베소서 1장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듯이 그를 떠나서는 그 어떠한 사람도 입양되거나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10. 이제는 우리 구주~~~~~ 나타났으니" ; 그는 아주 적절하게 우리가 복음에 입각해서 갖는 신앙을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에 관련시킴으로써 각각 위치를 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가 갑자기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영원 전부터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구원을 위해서 나타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최근에 그에게 수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가 창세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은 믿음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어 오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복음을 현명하게 하나님의 가장 먼 옛날의 약속 관련시킴으로써 언급할 때마다 그것의 신비성 때문에 그것이 멸시 받는 일이 없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모든 것이 율법 아래서 살고 있던 조상들에게서 숨겨졌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만약에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계시되었다면, 그전에는 은폐되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바울이 조상들의 신앙의 기초가 되었던 바로 그것이 충만하게 제시된 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이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는다고 대답하겠다.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우리가 받고 있는 동일한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은혜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는 말로써 그는 조상들의 거기에 대한 참여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동일한 신앙이 나타나심에 대해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한 부분을 허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어제도 동일하셨지만(히13:8), 그는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이 되기 전에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이 시간을 우리의 신앙과 조상들의 신앙이 함께 바라보는 것은 그 속에만 우리의 구원의 보장과 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 그는 생명이 나타나는 문제를 .복음과 관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과 무관하게 오직 말씀에만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의 능력은 그것이 담고 있는 본질에 의존하고 있다. 그보다도, 그가 의미하는 것은 이 은혜의 열매가 인간에게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통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 셨느니라(고후 55 : 19)"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복음이 생명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불리어진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주목할 만한 기념이 되는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생명 다음에 그는 불멸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참되고 불멸하는 생명이라는 말이나 다름 없다. 물론 생명을 중생의 뜻으로 보고 여기에 여전히 소망의 대상인 복된 불멸이 따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말 못하는 짐승들의 것과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우리의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명의 참된 성격과 가치는 이 세상에서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설명하는 뜻에서 그가 불멸을 덧붙이는 것은 적합한 것이요, 이 불멸은 즉 현재에는 은폐되어 있는 그 생명의 계시인 것이다.
"11. 내가~~~~~~~세우심을 입었노라." ; 그가 복음을 이처럼 자신의 사도직과 함께 높이 추천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단은 무엇보다도 온갖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건전한 교의에 대한 신앙을 추방하려 하는데, 우리의 신앙에 정면으로 도전해서는 항상 이 일을 쉽게 해낼 수 없으므로 그는 은밀하게, 그리고 간접적인 수단으로 우리에게 대항하며, 경건한 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기 위해서 소명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기에 죽음을 앞에 두고 사단의 상투적인 올무를 익히 알고 있는 바울은. 단호하게 전반적인 복음의 가르침과 자기 자신의 소명의 순수성을 주장하고 있다. 양자가 다 필요했던 것은 설령 우리들이 복음의 위엄에 대해서 긴 강론을 듣는다 해도 우리들이 복음의 의의를 깨닫기 전에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이 확실한 권위라는 일반적인 원칙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들이 정작 따라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자신이 방금 그들에게 지적한, 생명을 주는 가르침의 충실하고 적합한 사역자로 명백하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반포자로 부르고 있는데, 이 반포자의 임무는 왕과 위정자들의 취령을 공표하는 것이요, 사도라는 명칭은 바로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와 제자들 사이에는 특수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는 자신을 이 세번째 명칭으로 묘사함으로써 자기에게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스승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임명되어 있다고 말하는가 ? '이방인들에게이다.' 당시 논쟁의 핵심이 이들에 관한 것이었던 까닭은 유대인들이 생명의 약속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자에게 속할 수 없는 것으로 주장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구원이 의문시되는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자신이 특별히 그들에게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 다름이 아니라 바울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공동으로 참여하게 했다해서 유대인이 그에게 노발대발했다는 점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이 명분 때문에)는 앞 귀절 전체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빙인에 대한 마지막 구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구금 때문에 조금이라도 권위가 훼손되는 일이 없게 하려고 두 가지 변론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그는 그의 구금의 원인이 자신의 어떤 나쁜 행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기 때문에 구금되었으므로, 수치스럽기는 커녕 도리어 자신에게 영예로운 일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부당한 판단에도 우리가 선한 양심으로 대할 때,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위로가 된다. 둘째로, 그는 행복한 결말에 대한 자신의 소망에 입각해서 자신의 구금이 전혀 수치스럽지 않다는 점을 따지고 있다. 이러한 방어로 무장된 사람 이라면 제 아무리 큰 시련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끄러 워하지 않는다' 는 말로써 그는 남에게 동일한 용기를 보일 것을 격려하고 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 세상이 모든 신자들을 낭패하고 소망이 없는 자로 여길 때, 그들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인준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을 의지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신앙과 한낱 인간적인 견해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어야겠다. 신앙은 인간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주저하고 미심쩍은 신뢰도 아니다. 그것은 지식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사단이 거기에 끝없이 퍼붓는 공격을 충분히 이겨낼 정도로 강력한 그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울처럼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리의 신앙을 세상을 극복하는 승리로 부르는 것이 정당하며, "똔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 18)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참뜻을 체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온갖 폭풍우 가운데서도 침착하게 쉴 수 있는 것은 거짓말하거나 속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가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수행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마음속에 이런 진리를 확고 부동하게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언제나 이리 저리 배회할 것이다. 이 귀절이 면밀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은 더없이 절망적인 역경에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진실하실 것이요,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나타나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고 확신 가운데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신앙의 능력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바울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론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눈앞에 두고 영생에 대한 확신의 크나 큰 가치를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명심 해야겠다.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물론 우리의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거나 우리의 마음이 불신의 유혹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도 사실 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우리를 위한 적절한 보호가 있다는 지식의 방어로 우리를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확신있게 나올 것을 당부하면서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 : 29)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보호하기로 받아주신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저지하고도 남음이 있으므로 우리가 전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사단까지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생각 우리 마음에 직접적으로 감히 제안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처럼 크나 큰 모독 죄로부터 움츠러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사단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다른 것에 집착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모든 의식을 빼앗아 가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이 능력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시험 가운데서도 이 체험을 고수하려면 철저하게 정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또는 효과적인 능력(ёνеργονμёνην: 에네르구메네엔)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실제로 그렇게 부르고 있는 대로이다 (골1:29).
신앙은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그의 말씀과 관련시키며, 멀리 있는 무엇이 아니라 .항상 자기 속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 대해 로마서에서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다(롬, 202 1). 그는 영생을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으로 묘사하고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물건을 보관소에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맡기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만약에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라면 줄곧 아주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지만, 그와 같은 보호자에게 맡겨진 이상 전혀 위험이 없다.
"13. 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 물론 나는 '엔'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어법에 따라 'with'라는 의미로 종종 쓰인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이것을 건전한 가르침의 표적으로 덧붙이는 것은 거기에 무엇이 담겨 있으며, 어떻게 요약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지적하려는 뜻에서요, 또한 그의 습관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믿음과 사랑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양자의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 두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주로 이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있는' (which is)이라는 표현이 단수로 되어 있으며 사랑이 되는 단어와 일치하는 그것은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이것은 신앙과도 관련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
'믿음과 사랑으로써' 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은 디모데가 건전한 가르침에 경건과 사랑의 정을 덧붙여야 한다는 뜻으로 본다. 나는 아무도 참된 믿음과 거짓없는 사랑을 부여받지 않고서는 건전한 가르침을 끝까지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첫째 설명, 곧 바른 말이 무엇이며,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는가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뜻에서 이 두 단어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의 전부가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 둘의 근원과 시작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있다
"바른 말을 본 받아 지키고" ; . 이 귀절을 가르침이 다른 사람들이 본 받을 수 있는 모범이 되도록 하라 하는 의미로 보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디모데가 바울의 가르침에 의해서 미덕의 상을 자기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는 크리소스톰의 해석 역시 바울의 의미와 거리가 멀다. 나 자신의 견해는 사도가 디모데에게 그가 배운 가르침을 그 본질에 있어서만 아니라, 그 표현 양식에 있어서까지 고수하도록 당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υπoτυπωσιS(휘포튀포-시스)라는 단어는 생생한 상, 곧 실제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과 같은 대상을 뜻하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참된 가르침을 반역하고 거기서 떨어져 나가는 데 얼마나 익숙한가를 알고 있기에 디모데에게 그가 받은 가르침의 형태에서 이탈하지 말고 그에게 규정해 놓은 원칙에 따라서 그의 가르침의 방법을 규제할 것을 주의깊게 경고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단어 하나 하나에 얽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와전시키는 것이 해롭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황주의 신학의 가치를 알게 된다. 곧 그것은 바울이 여기서 추천하고 있는 귀감에서 얼마나 이탈했던지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점장이나 마술사들의 수수께끼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모든 책에 바울의 자취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르침이 이처럼 제멋대로 와전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원래 형태를 고수하도록 당부한 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바른 말은 여기서 명백하게 불경건한 가르침뿐 아니라 건강으로 이끌기는 커녕 병으로 인도하는 무의미한 변론과 대조되고 있다.
"14.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 이 권면은 앞의 것보다 더 범위가 넓다. 곧 그는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의 고귀한 가치에 합당하게 부지런히는 정성껏 그것을 사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가치가 작을 때는 그것의 가치가 아주 클 때에 비해서 정성껏 다룰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부탁한 것을 나는 그의 사역의 위엄과 디모데에게 베풀어진 모든 다른 은사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그의 사역에만 국한시키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이것이 그 사역에 필요한 그의 자질들, 곧 그에게 뛰어난 '성령의 모든 은사' 와 주로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또 여기서 '그가 부탁한'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디모데에게 그가 앞으로 언젠가 낱낱이 고하지 않으면 안될 자신의 사역에 대한 설명을 상기시켜 주려는 그 뜻에서이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모든 것을 충실하게 시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좋은 것, 곧 to καλ6ν(토 칼론)은 높은 가치나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을 뜻한다.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탁월한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나도 그의 번역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나태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유실되거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배은 망덕이나 남용 때문에 '그것이 빼앗겨지는 일이 없도록 여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에 다시 박탈당하는 사람은 더 많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으므로 그는 "성령을 통해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데,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서 능력 이상의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을 성령께서 제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나 다름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곧 하나님께서는 말로 명령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에 그의 말씀을 새기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심으로써 그의 명령이 헛되지 않도록 보살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뜻은 .신자들이 자신에게 제공된 것을 ,배척하지 않는 한 그가 그들에게 조력자로서 함께 통 계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