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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후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4:3)

1. 성경 (딤후 4: 1 ~ 8)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1)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2)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3)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4)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5)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6)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7)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  이것은 곧 주께서 오실 때에 아직 살아 있는 자들과 이미 죽어 있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따라서 아무도 그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  이 두 단어의 의미는 동일하다. 그 이유는 지금 주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지만 지금까지 그의 나라는 명백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십자가의 그늘 아래 있으며 그의 원수들에게 맹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나라가 실제로 설립되는 그것은 주께서 원수들을 무찌르고 모든 적대 세력을 무산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위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실 때 이다.
 
"명하노니." ;  그는 '그러므로' 라는 단어로써 성경과 설교를 적절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은 또한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교사들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무식하게 떠들어대는 광신자들의 견해를 반박해 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의 유용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누구든지 그것을 읽어야 할 뿐 아니라 교사들은 그것을 전달해야 마땅하며, 그것이 그들에게 부과된 임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모든 지혜가 성경에 담겨 있으며, 우리 자신이나 교사들이 그것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므로 생생한 목소리의 도움을 무시하고 침묵하는 성경으로 만족하는 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명령하는 학문의 방법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이 모두에게 추천되고 있다해서 목회자들의 사역이 무효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요,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연히 임명한 것이 아니므로 신자들은 읽고 듣는 것을 통해서 유익을 얻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여기서 바울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디모데에게 당부하고 있는데, 만약 그가 교사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것을 중단할 경우에 하나님을 복수자 로서; 그리스도를 심판관으로 엄숙하게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 아들까지 아끼지 않을 정도로 그의 교회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셨듯이 그가 그처럼 크나 큰 대가를 지불하고 구속한 영혼들이 목회자들의 소홀함으로 멸망하거나 사단에게 희생될 경우 소홀함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가 특별히 그리스 도의 심판을 두고 언급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대표자 되는 우리들에게서 그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실패의 내력을 엄격하게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 이 말로써 그는 단순히 불굴의 인내뿐 아니라 모든 장애물과 난관을 극복함에 있어서 공격성까지 추천하고 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겁약하고 태만하기 때문에 더없이 하찮은 장애물들 앞에서도 넘어지며, 그것들을 우리의 무기력의 연구실로서 환영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사단이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우리 앞에 두고 있으며 부름받은 자들은 얼마나 느리게 따라가며, 얼마나 쉽게 지쳐버리고 마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억척스럽게 복음의 주장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면 복음은 오랫동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억척스러운 '보챔(importunitas)은 목회자와 일반 사람들 모두와 관련되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단지 자신이 정한 시간에 가르침의 직분을 수행하고 자신의 편리한 대로 맞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수고나 고통도 불사하고 계속 전진하게 한다는 뜻에서이다.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끈질긴 억척이란 잠들어 있는 자들을 일깨우며, 나쁜 길로 곤두박질해 가는 자들을 저지하며, 허영된 세상에 관계되는 일들을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그는 디모데에게 한결같이 '경책하는 일', '경계하는 일', 그리고 '권하는 일'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올바른 일을 이어감에 있어서 여러가지 자극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제대로 순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단지 올바른 길만 가리켜 보임으로써 우리를 안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건전한 충고와 온건한 권면만으로는 우리의 냉담성을 털어버리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거기에 책망과 매질이라는 더 큰 자극제가 덧붙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  이것은 더없이 절실한 특성이다. 책망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마는 것은 그것이 너무 잔인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건전한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아서 빈 말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권면과 꾸지람이 가르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수가 있으며, 그것이 없이는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우리는 열성은 많으나 난폭하고 확고한 가르침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예를 본다. 그들은 부산하게 오가면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소란을 피우지만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기초없이 건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면에 있어서는 선하지만 배움이 부족하며, 너무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자들이다. 사실 있는 힘을 다해 건전한 가르침을 배척하는 자들은 훨씬 더 위험하며, 그런 사람들은 여기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자들이다. 한 마디로 바울은 징계가 공연히 쓸모없는 것으로 무시받지 않게 하려면 그것이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런 이야기 를 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열심이 오래 참는 온유성으로 견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일단 열심내기 시작하면 우리의 열기에 제한을 둔다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초조성에 휩쓸리고 만다면 이때 우리의 분투 역시 허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의 매정함은 우리 스스로를 우스팡스럽게 만들뿐 아니라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매정하고 준엄한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들이 상대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고집을 견딜 수 없어하며, 우리가 유익하게 되고자 할 경우에 굳게 참고 감당해야 하는 여러가지 당황과 분격에 굴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준엄성은 그것이 평화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 알려지기 위해서는 온유성과 조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3. 때가 이르리니" ;  인간들의 타락성에 입각해서 그는 목회자들이 얼마 나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경건한 사람들이 진지하게 복 음을 유지하려고 분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소멸되고 인간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의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우리가 우리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일 때 우리가 우리 일에 꾸물낼 것 이 아니라 재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러한 기회가 다시 허용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  이 말로써 그가 뜻하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싫어하고 무시할 뿐 아니라 '실제로 증오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그것을 건전한 것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경건을 기가르침에 있어서 그것이 미치 는 효과 때문이다. 다음 귀절에서는 그것을 '진리'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건전한 교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취급하는 것이라는 뜻 으로서, 그는 이것을 '우화들', 곧 복음의 단순성을 더럽히는 쓸데없는 망상 과 대조시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 시함에 있어서 단호하게 될수록 경건한 교사들은 그것을 주장하는∫12일에 그 만큼 더 열성적이어야 하며; 그것을 온전히간직하는 데 더욱더 끈질긴/노 력을 기울여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근면을 .통해서 사단의 공격을 물리 쳐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필요한 때가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 인간들의 배은망덕은 전에 없이 이것을 절실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거기에 대한 적극적인 열성을 보이지만 조금 후에는 그것에 대한 싫증을 일으키며, .이것은 마침내 적극적 인 증오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것을 맹명하게 배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멸시하는 태도로 '듣거나 처음부터 그것을 '조소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가 하면 그것의 명에를 견딜 수 없어서 거기에 발길질하거나, 거 룩한 예의법절에 대한 증오심에서 그리스도에게서 전적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 그의 동료에서 공공연한 원수로 탈바꿈하고 '마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그처럼 흉측한. 배은망덕에 대항해서 싸우며, 그리스도의 제안이 보편적으로 기쁘게 받아들여질 때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써서 분투해야 마땅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런 모욕과 배척을 이미 경고받고 있으므로 여기서 성령에 의해서 예언되고 있는 것이 성취되는 '것을 '우리가 본 다 하더라도 마치 무슨 뜻밖의 일을 대하는 것처럼 당황해서는 안된다. 그 리고 우리가 천성적으로 허영에 기울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진 리보다는 우화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은 전혀 새롭거나 이상한 1일이 아니다.' 더우기 .복음은 그 겉모습에 있어서 |으스대지 않고 비천하므로 그것의 [가르 침은 우리의 호기심이나 우리의 [교만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생명의 새로움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정도로 영적인 일들에 대한 맛을 타 고난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 바울은 여기서 장차 한 특정한 시대에 있을 특별한 불경건의 크나큰 발발 (outbreak)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스승을 많이 두고(교사들을 자신에게 산적할 것이요)" ; . 우리는 많이 (heap; 산적함)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광기가 ,얼마나 크던지 그들이 서너명의 협잡꾼으로 만족하지 않고 폐거리를 원할 것 이라는 뜻이다. 헛되고 해로운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만족을 모르는 욕망이 있기 마련이듯이 세상은 온 사방으로, 그리고 무제한으로 그것이 고안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멸책을 구하고 있으며, 마귀에게는 항상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그러한 교사들이 준비되어 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악인들은 언제나 풍성하게 추수할 수 있었으며, 사단에게는, 인간을 속이는 수단이나 조력자들이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인간 사회를 거의 항상 휩쓸고 있는 이 크나큰 타락성에 j.대한정당한 보 상은 하나님과 그의 건전한 가르침이 배척되고 무시되며, 거짓이 쌍수로 환영받는 이것이다. 거짓 교사들이 그처럼 빈번하게 넘치며 때로는 구더기 처럼 나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결과로 돌려져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아무런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받아들여진다 해도 당장 빼앗기고 말며, 우리들이 얼마나 신화와 우화에 빠져 있든지 부 지기수의 협잡꾼들마저 우리에게 별로 이로운 편이 못된다는 점을 생각할때 우리가 이런 협잡군들에게 수작을당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것이다. 교 황들 밑에 있는 쓰레기같은 수도사들의 폐거리를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사 열 명과 신부 열 명 대신에 경건한 목사 한 사람을 받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경우 당장 비용에 대한 불평이 제기되고 있다. 온 힘을 다해서 헤아릴 수 없는 사기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모조리 뿌리 째 뽑아버리려 하는 것이 세상이다. 수많은 오류의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올바르게 교훈받기보다는 속아넘어 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거침없는 욕망이 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그 많은 악의 원인을 밝히고자 하면서 귀가 가려워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훌훌륭 비유가 뜻하는 것은 세상 이 새로운 것에 대해서 너무 예리하고 너무 지속적으로 간절한 귀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위해서 많은 다른 '교사들을 쌓을 것이요, 계속 새로운 날조 에 의해 '휩쓸려다닐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악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신자 들이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에 밀착하도록 가르침을 받는 데 있다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  그가 그의 '권면을 계속함으로써 디모데가 고통이 더 심해질수록 더욱 열심히 그것을 치유하는 데 힘을 기울 이며, 위험이 클수록 더 정정스럽게 경계하도록 하고 있다.그리고 그리스 도의 사역자들에게는 그들이 자신의 직분을 신실하게 이행하기 시작하는 순 간부터 여러가지 투쟁이 밀어닥치므로 .그는 또한 그에게 역경을 '감당함에 있어서 확고부동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전도인의 일을 하며~~~~~" ;  이것은 전도자에게 속하는 것을 실실천하는 것이다. 이 단어에 일반적인 의미가 있어서 복음의 모든 사역자들을 지칭하는 것인 지, 아니면 그것이 무슨 특별한 직분을 뜻하는지는 명백치 않다. 내가 둘째 견해 쪽으로 기우는 것은 에베소서 4 장 11절을 볼때 사도들과 목사들의 중 간 계층이 있으며, 따라서 복음 전하는 자들이 사도들 다음가는 조력자들이 었다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바울이 자신의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밀접한 동료로 여기던 디모데가 서열과 그 직분의 위엄에 있어서 일반 목사들보다 위였으며, 단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 서 그의 지분을 언급하는 것은 그를 격려하는 동시에 남들에게 그의 권위를 추천하는 셈이 되는데, 바울은 이 양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게이트 역처럼 마지막 소절을 다하다 로 읽는다면, 그 의미는- '네가 너 에게 위임된 사역을 충분하게 이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특명령한 것 울 실천함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네가 도중에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 라북하는 직이 될 것이다. 그러나 πληροσopsiν(플레-로포레인)이라는 단어 에는확실하게 하다' 또는 '입증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l나는 디모데가 경 계하고 고통을 참을성있게 견디며 한결같이 가르침으로써 자신의 사역의 실 제성을 성공적으로 입증한다는 뜻으로 보는 편을 택하는데, 이것이 훨씬 더 어울린다. 사실 그런 모든 장조는 그가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역 문맥에 잘 자라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다.
 
"6. 관제~~~~~~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 이제 그는 그처럼 엄숙하게 당부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나의 손을 뻗쳐 너를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너는 지금까지 줄곧 나의 끈질긴 권면을 받고 있었으며, 내 충고가 너를 크게 도왔으며, 나의 본이 큰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네가 혼자 가르치고 네 자신을 격려하고 아무 도움없이 헤쳐나갈 때가 다가오고 있다. 네 속에 있는 것이 하나라도 나의 죽음 때문에 변화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원할 것 우리는 그가 자신의 죽음을 묘사함에 있어서 사용하는 표현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떠남 (departure)이라는 단어를 써서 그는 우리가 죽을 때 전 적으로 멸망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곧 그것은 몸으로부터 영혼이 떠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란 영혼이 몸에서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정의에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증 거가 담겨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예물 (offering)과 희생제물이 바울의 죽음에 특별히 적합한 용어인 것 은 그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사수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과 죽음에 있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제물인 것은 사실 이지만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자신들의 피를 ******* 훨씬 더 돋보이는 제사를 바치는 셈이다.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σπёνδeσθιι(스펜데스다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제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언약을 비준하는 데 사용된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그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빌립보서 2장 17절의 말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는 귀절과 동일하다. 이 귀절의 의미는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이, 옛날에 도살된 짐승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언약이 비준 된 것과 똑같이 오직 자신의 죽음에 의해서만 확증될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우리 신앙의 확실성이 순교자들의 지조에 기초하 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확증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 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비준으로 추천함으 로써 칭송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신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쉽게 지치기 보다는 끝까지 버티도록 격려를 받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나의 떠날 기약~~~~~~" : 이 표현 역시 주목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가 이것을 통해서 죽음의 성격과 결과를 가리켜 줌으로써 우리의 [죽음에 .대한 과도 한 공포를 더없이 적절하게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죽음이라 는 말만 듣고도 그처럼 당황하는 것은 그들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출발'로 부름으로써 인간이 멸망하 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로부터 나누어질 뿐이라는 점을 사람혀주고 있 다. 동일한 이유에서 그는 '시간이 왔다' 는 말을 두려움없이 이야기하고 있 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무시하지 않았던들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거기서 움츠러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요,' 완전 히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신앙은 이 공포를 극복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떠나지 못하는 일이 모없도록 해야겠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  일이란 그 결과에 따라서 판단하기 마련인데, 바울의 싸움은 '그것이 불행하게 (끝났다는 점에서 정죄를받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세상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선한 싸움이었다 는 점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탁월한 신앙의 증거인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지극히 비참한 사람으로 정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의 죽음 역시 수치스럽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아무런 성과없이 분투했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은 인간들의 왜곡된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큰 용기를 그 대로 가치고 모든 재앙에서 일어서고 있으며, 결과 아무것도 자신의 행 복과 영광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그가 싸워온 싸움 이 선하고 영예로왔던 것은, 아니 죽음을 앞에 두고 즐거워하기까지 또하는 것은 죽음이 자신이 도달하고자 분투했던 목표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달리기 선수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은 그들이 목표 지점에 도달할 때이다. 그의 의미는 죽음이란 그리스도의 선수 들에게 수고의 끝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목표점이요, 또한 만약에우 리들이 .마침내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시발점부터 중간 지점까지 열심 히 도달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우리가 이 세상의 공생명으로 만족하지 말 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하 나는 그가 끝까지 자기 대장에게 충실한 군인이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충실하게 올바른 교의를 지속했다는 것이다. 어느 의미이든 적합하다. 사실 그가 주님에 대한 자신의 신의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의 순수한교의를 계속 증거하는 것이었다. 넘여기서 나는 틀림없이 군인의 충성심에 대한 엄숙한 맹세의 암시가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발해서 그의 이야 기는 자신이 항상 자기 대장에게 선하고 충실한 군인 노릇을 해왔다는 이야 기나 다름없다.
 
"8. 이제 후로는" ;  그가 지금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 쳤으며 믿음을 지킨 점을 들어 자랑했듯이, ]여기서는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끈질긴 노력을 기울이고도 응분의 [보상을 일반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보상이 확실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부활의 날을 바라봄으로써 이런 확신을 얻고 있는데, 우리도0마 찬가지로 본받아야 마땅하다. 우리 주위를 빙 둘러볼 경우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죽음뿐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겉모습에만 집착할 것이아니 라 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가 의의 면류관과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주다' 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을 사용해서 하 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대행위를 공로로 [치켜세우려 하지만 그들의 추리는 터무니없는 것이다.믿음을' 통해서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 풀어진 칭의가 행위 보상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곧 둘은 완전히 일치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고:인 정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행위에 대해서 보상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행위를 은혜롭게 대하시며, 우리의 유행위가 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보상을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여 기서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그것째는 이 귀절에서 우리들이 자유;의 지로 선행을 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지하여금 우리에게 빗지게 하는 것으로 추 론하는 것이요,다른 하나는 우리 구원의 근원이 그의 무상의은혜 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얽매이신 것으로 상상하 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을 정당하게 [우리에 게 주신다 ,해서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빚지고쿠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 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분에 넘치는 은혜의 행동에 있어서도 공정하시 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 자신 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가 먼저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그가 처음에 :우리에 게 보여주신 동일한 '관용을 [베푸시는 가운데 그의 첫번 은사들 후에 허용되는 다른 은사들을 덧붙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 절을 통해서 .선행의 근원이 자유의지의 능력에 있는 것으로 증거하려고 하 지만 ,그것이 헛되고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 의 은사를 채워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들이 이 귀절을 이용해서 믿음의 의를 파괴하려는 것이 마찬가지로 헛되 고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전가하지 않으시고 값없이 그 를 받아들이는 친절과 동일한 관용을 베푸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허용하는 선행에 대한 ,그의 보상 사이에 아무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내게만 아니라~~~~" ;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동일한 용기를 가지고 싸우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보면류관에 동참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만 약에 우리들이 우리 앞에 면류관에 대한 동일한 소망이 없다면 그의 한결같 은 신실성이 우리에게 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신자들을 주의 나. 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로 부름으로써 그들의 성격을 아주 탁월하게 묘 사하고 있다. 신앙이 열렬할 경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잠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며, 최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품도록 일깨워준다. 그의 의미는 이 세상과 덧없는 목숨에 너무 집착된 나머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 해서 관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대한 아무런 사모함도 없는 자들은 모두 스 스로에게서 불멸의 영광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온 주의력을 집중해야 하는데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조정도로 우 리가 우매하다면 이것이야말로 화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벌벌 떠는 자들을 신지사의 숫자에서 제외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유쾌하고 즐거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