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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12:10)

1. 성경 (요 12:9~15)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9)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0)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1)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2)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3)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4)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 그리스도의 죽음의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주님의 죽음 이후에 보다 충만한 믿음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그의 이름이 사방에 알려지는 것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복음서 기자는 최근에 있었던 나사로의 부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표적을 통하여 그의 신성을 여실히 증명해 보여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많은 증인이 나타나기를 원하셨다. 복음서 기자가 그들이 온 것은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라고 할 때 그는 사람들이 나사로에게 특별히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왔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사로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기 위하여 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이 얼마나 광란적인 행동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이와 같은 혼미의 영으로 괴롭히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로 저들의 광란을 막으신다 하더라도 그들의 광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이 악한 모의가 이러한 식으로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와 같은 완악함으로 치달은 것이 어떤 어리석음을 인함이 아니라 분노에 찬 악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는 것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사단은 어느 정도까지 아니면 완전히 하나님의 일을 약화시키거나 멸하려고 발광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계속적으로 상고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이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 그리스도의 입성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를 완전히 요약해 주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기 위해서 자기의 뜻에 따라 자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자발적인 필요가 있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순종의 제사에 의해서만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님에게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로 끌려가기 전에 그는 엄숙한 예식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영접받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통치가 그의 죽음을 향한 진군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도착을 많은 무리가 반겨 맞았으나 주님은 예언을 이루심으로 자기가 참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실 때까지 그의 원수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계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본질적으로 확인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떠한 것도 생략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어야 할 예루살렘 시민들보다 외국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더 경의를 표하려 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매일 제사를 드렸고 성전도 그들 앞에 있었고 이런 것들은 마땅히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교회의 대 선생들이 거기 있었고 하나님의 빛이 비치는 성소도 그들 가운데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땅에 닿았고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들은 따라서 그들에게 약속된 구속주를 거들떠보지 않고 거절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더 가까이 그리고 친밀하게 보여주실수록 더욱 무엄하게 하나님을 멸시한 것은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인간이 범하는 공통적인 오류이다. 자기 땅을 떠나 외지에 가 살다가 명절을 지키려 온 무리들이 더 큰 열성을 보였다. 그들은 열심히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고 그가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아가서 그와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세상의 군왕들이 그들의 왕국을 차지할 때 전령의 소리나 나팔소리로 신하들을 불러 모으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성령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기를 왕으로 환호하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나라를 주장하고 계신다. 나는 주님을 맞으러 나갔던 사람들이 참으로 그의 나라의 성격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날을 바라보셨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령한 나라와 일치되지 않는 어떠한 것도 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 종려나무는 옛날에 평화와 권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왕위를 부여하거나 정복자에게 겸손하게 용서를 구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쓰는 것도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새로운 왕을 환영하는 환희와 즐거움의 표시로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한것 같다.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메시아로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구원과 구속을 찾았다. 이 외침은 시편 118편 25절로 26절까지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는 모든 성도들이 끊임없이 열망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바라도록 그리고 메시아가 나타나셨을 때 그를 존귀하게 영접할 수 있도록 기록된 것이다. 이 기도가 모든 유대인들 사이에 흔히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것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이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공급하여 그리스도를 축복하게 했던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증거 하는 전령으로 삼았던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 우리는 먼저 ‘주의 이름으로 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은 경솔하게 자신을  앞에 내세우거나 거짓되이 영광을 취하지 않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행동의 주체와 지도자로서 하나님을 내세운다. 이러한 표현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자기가 하늘로부터 받은 교훈을 솔직하게 사람에게 전달한다. 완도 같은 이름으로 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손을 빌어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 그러나 주위 영이 그리스도 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 아래 있는 것이다. 아니 생명의 샘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이다. 주님은 과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왕의 지위상 다른 왕들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주님 안에서 나타내셨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이다(골2:9). 주님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형상이며 간단히 말해서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특별한 권한에 의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부분을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그의 제자 두명을 보내어 이 나귀를 끌어오도록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다. 요한은 끝으로 이를 기록하면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의 본질적인 내용만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한은 많은 세부사항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걱정하도록 만드는 모순이 여기서 쉽게 풀리게 된다. 

 

“두려워 말라” ; 복음서 기자가 인용하고 있는 선지자의 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왕노릇 하실 때에만 우리 마음은 평온을 되찾고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진다는 것을 유념해야겠다.  선지자가 실제로 한 말은 다르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서 기자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참된 기쁨으로 기뻐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두려움이 제거되는 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화해하여 믿음에서 나는 평안을 얻었을 때인 것이다(롬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