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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5)

1. 성경 (요12:20 ~ 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0)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1)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4)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5)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 그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도 예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제사와 관련된 의식적인 예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비록 종교와 경건이 성전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집에서 매일 영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던 성도들에게는 모세가 정해준 것과 같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나와서 외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기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때 이 사람들이 큰 비용을 들여 상당한 불편을 겪으며 위험을 각오하고 그와 같이 긴 여행을 하면서까지 외적인 경건의 모양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나라에서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물론 율법의 예배는 이제 끝장이 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세례와 거룩한 성찬과 공중 기도를 행하도록 하셨다. 우리가 이러한 예식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경건한 생활에 대한 욕망이 매우 메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헬라인 몇이 있는데” ; 자기 지방의 예배를 떠나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로마법에 의하여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그런것이 발견되면 총독에 의해 엄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헬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바다를 건너가 성전에서 제사 들이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엄숙한 일에 이방인과 섞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이방인과 어울린다면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과 성전과 제물이 다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유대인의 후손이지만 바다를 건너 멀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는 그들을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따라서 여러 마을과 동네로부터 모여든 유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로 뿐 아니라 소문이 바다 건너까지 퍼져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도 예배하러 올라왔다는 데 있다.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 그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강제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빌립을 통하여 주님께 접근하고 있는 것은 경외심의 표현이다. 경외심은 언제나 겸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아는 지식이 세계 도처에 퍼지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그의 죽음이 제자들을 경악시키고 실망케 할 것을 아시고 이를 미리 예방하고 있다. 그는 복음의 교훈이 온 세상에 두루 선포될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실망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형선고를 받고 신자가에 달렸다가 장사 지낸바 될 때에  그의 영광에 대한 묵상이 곧 사라질 경우 주님은 그의 죽음의 치욕이 그의 영광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미리 경고하고 또 그들에게 기대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주님은 아주 적절한 비유를 쓰고 계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 한 알 그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씨의 죽음은 발육을 촉진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을 씨 뿌리는데 비유하고 있다. 씨를 뿌리면 밀알은 파괴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풍성한 열매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 권고가 그 당시에느ㅡㄴ 특별히 필요한 것이었으나 지금도 교회 내에서 계속 쓰여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머리 되신 주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보이는 불명예와 저주의 무서운 출현은 주님의 영광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우리의 시야에서부터 빼앗아간다. 이때에 우리는 그의 죽음만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맺어준 열매를 또한 묵상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그의 영광의 광채는 어느 곳에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르침에 하나의 권고의 말씀을 더하고 있다.  만일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도록 우리는 인내하여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비교할 때, 우리는 무엇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고 무엇이 생명을 미워하는 것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현세에 대한 지나친 정욕으로 마음이 뺏겨 있는 사람, 즉 억지로가 아니면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을 멸시하고 용감히 죽음을 향하여 전진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생명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생명을 전적으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최상의 축복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그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이를 기쁨으로 내어 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서두르는 사람이 무겁고 불편한 것은 어깨에서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본향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여행한다면 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참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동안에는 그 생명 안에 남아 있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우리의 거처를 바꿀 준비를 갖출 때 즉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을 살아가다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현재의 생명에 지나치게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그의 생명을 잃는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생명을 영원한 파멸에 내던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잃어버린다는 것은 포기한다거나 어떤 가치 있는 것의 상실을 겪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파멸에 넘겨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 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말씀이 비교적으로 언급된 것임을 이미 지적한바 있다.  만일 하늘의 생명에 대한 묵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주관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반대도 쉽게 해결되었다. 많은 사람은 절망과 기타 이유로 특별히 인생살이에 지쳐서 자살을 감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준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이 생명에 대한 미움과 경멸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속한 삶을 너무 갈망하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이 후반 절을 덧붙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대한 사랑에 압도되어 그 세상에 대한 집념을 버릴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너무나 심각하게 우리를 일깨우고 있기 때문에 죽음의 잠을 자는 것은 미친 일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죽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 즉시 뒤에 나오는 말씀도 같은 목적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 주님께서 그의 종들이 죽음에 순복하는 일에 거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먼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종이 그 주인과 별도로 다른 것을 갖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쓰인 "있으리니"(shall be)라는 미래 시제는 히브리어의 습관을 따라 명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죽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되리라고 약속한 것처럼, 이를 하나의 위로의 말씀으로 받고 있다. 그러나 이미 본인이 말한 대로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그 후에 종들이 삶과 죽음에서 그와 나뉠 수 없는 짝으로 생활했을 때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보상하실 것이라고 위로를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