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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12:32)

1. 성경 (요12:27 ~33)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7)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8)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0)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1)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2)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죽음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죽음을 간구하라고 권고하심으로써 뛰어나게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죽음에서 주춤 물러서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각자의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는 여기서 일관성이 없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이 이를 비웃는다 해도 놀랄것이 없다. 그것은 실행에 의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와 같이 연약함을 드러낸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주님의 죽음에서 가장 먼저 상고해야 할 것은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감을 그에게 담당시키지 않았다면 그러한 속죄의 죽음을 죽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겪은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찬 것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감각에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몸소 체험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만족한 죽음을 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악의 막중함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유일한 독생자에게 그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오락이나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가 우리의 죄를 인하여 가장 극심한 고통에 내어준 바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와 같이 괴로와 하신 것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신성은 감취어져 있었고 그 능력은 속죄할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나타나지 않은 채,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입으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도 취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이러한 느낌들은 자발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두려워 했다.  두려워하도록 강요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의에 의해서 자신을 두려움에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두려워 한 것이 거짓으로 한 것이 아니라 참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이점을 가져다 준다. 만일 죽음의 두려움이 그리스도를 거스르지 않았다면 우리 중에 누가 그의 죽음이 우리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인가? 슬픔이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도 그에게 강철같은 강인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용기를 모아 그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죽음 앞에 공포를 느끼는 육신의 연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도자의 친구가 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리요” ; 우리는 여기서 마치 우리 눈 앞에 보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떠한 희생을 치렀는가를 알 수 있다. 주님께서 깊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는 슬픔의 정도를 표현할 말도 찾지 못하였으며 하나의 인간으로써 내려야 할 결정도 내리지 못할 정도였다. 주님은 자기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기도로 피신하여 죽음을 면하게 되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의하여 죄를 위한 제물로 내정되어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그는 그의 깊은 슬픔이 표현했던 소원을 즉시 시정한다. 말하자면 자기 손을 뻗쳐서 자신을 제어하며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도록 하였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섯가지 단계를 유의하여 보아야 한다. 첫째로, 무한한 슬픔에서 솟아난 불평이 눈에 띈다. 둘째로 그는 자기에게 치유가 필요 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묻는다. 셋째로, 그는 아버지에게로 가서 자기를 구해 달라고 간구한다. 넷째로 주님은 자기가 표현했던 소원이 자신의 소명에 상반되는 것임을 알고 이를 철회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한 것을 이루지 않는 것보다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받겠다고 결심한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로 만족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망각하고 그런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 우리가 두려움에 싸여 낙담할 때나 슬픔으로 인하여 마음이 억눌려 있을 때 우리가 준수해야 할 법칙은 즉시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에 대하여 속으로 걱정하는 것보다 더 잘못되고 해로운 것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은 고통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에 위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 않는 모든 이들의 무관심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 비록 주님께서 정당하게 죽음을 두려워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보냄을 받은 이유와 중재자로서의 직분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의 타고난 감각에 의하여 품었던 두려움을 아버지에게 내놓고 그 두려움을 제거하여 달라고 구했다. 아니 차라리 그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이루어 드리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 죄와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리스도의 감정은 주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하여 제어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육신에서 솟아 나오는 수많은 감정이 우리의 내면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에 방해가 되는 감정일 때는 이를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의 뜻을 중시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러한 순수하고 완전한 인간의 뜻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끝으로 죄의 병에 의하여 감염된 우리 자신의 뜻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보다 못한 다른 모든 것이 순종해야 하는 대 원칙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 이 말씀에 의하여 주님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으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도외시하고 등한시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참으로 제어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힘들고 괴로운 것을 모두 견뎌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 자체를 충분한 보상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 이 말씀은 시편 138편 8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미리 제거하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광스럽다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을 이미 여러가지 장식품으로 아름답게 꾸몄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 오늘날도 같은 현상이 만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에도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만한 성령의 능력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마치 죽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럼 복음에 냉담한 사람이 많이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천둥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야만인의 잔소리로 간주하고 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확증이 필요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께서 주님보다도 우리를 더 염려하신 것일까? 우리는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은 우리를 즉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서 외부적인 이적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다는 질책이 나타나 있다.. 귀를 기울이지 않은 그들의 배은망덕한 태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 우리는 먼저 사단의 나라가 완전히 제거되고 육신과 하나님의 의에 의해 거치는 모든 것이 전멸되기 전에는 세상의 질서가 바로 잡힐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새롭게 되기 전에 죽음의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단이 그의 횡포를 행사하는 동안에는 죄악이 편만하기 때문에 혼돈과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단이 쫓겨날 때 세상은 사단의 반항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환원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단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쫓겨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단은 계속 싸움을 벌이기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볼때 이 쫓겨남은 짧은 시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매일같이 나타나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 십자가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아버지께로 끌어 올리는 일종의 운반수단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 후 그리스도께서는 땅에서 들어 올리워 가신 후 인간과 더 이상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의 떠남이 매우 다른 형태로 이루어 질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땅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형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인간과 분리시키기 위한 떠남이 아니라 땅을 하늘로 끌어 올리기 위한 새로운 방법임을 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