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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1. 성경 (요 15: 9 ~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9)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0)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1)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2)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3)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4)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7)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요약본)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 그리스도께서는 보통 이상의 뛰어난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셨다. 여기서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항상 성자에 대하여 가졌던 은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요점을 벗어난 논리다. 그보다는 우리의 가슴에 우리에 대한 신령한 사랑의 확실한 담보를 놓아 두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도였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항상 성자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교묘한 생각은 이 귀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랑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교회의 머리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다. 중보자를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자는 심연에 빠진 나머지 올바른 길은 고사하고 출구도 찾지 못하고 말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사랑의 담보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아야겠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완전히 쏟아진 것은 그것이 그를 통해서 그의 지체에게 흘러 넘치게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는 이미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명칭을 일찍이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목적을 곧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려는 뜻에서 그에게 그런 명칭을 허용하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 안에서 마치 거울을 통해서 보듯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 모두에 대한 부성애를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따로 사랑을 받거나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와 그를 아버지에게 연합하려는 뜻에서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가 오히려 더 낫다. 그는 그가 일단 우리를 감싸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계속적으로 누릴 것을 원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이것을 박탈당하지 말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에게 제공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 많고 그들의 손에 한번 쥐어졌던 것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의 은혜에 받아들여지고 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수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한 것 같이~~~~” ; 이 말씀의 요지는 “내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예가 나를 통해서 비취고 있다. 너희들이 보는대로 나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일과 이 길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 않느냐? 그도 또한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의 나에 대한 사랑은 순간적이거나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그러한 사랑이다”하는 뜻이다. 신자들은 항상 머리와 지체간에 이 일치를 명심해야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귀감을 따르도록 노력 할 뿐 아니라 그의 성령을 통해서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향해 날마다 새롭게 되어질 것을 믿고 끝까지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살아갈 수 있어야겠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 그는 여기서 그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인내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시고 있다.  그리스도의 값없는 사랑을 깨닫는 믿음과 선한 양심 및 새로운 생명은 언제고 같이 묶여 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아버지에게 화해시키는 것은  그들이 벌을 받지 않고 방종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그 의 영에 의해 다스리심으로써 그들을 그의 아버지의 손길과 지배 아래 두려는 뜻에서이다. 여기서 진정한 순종을 통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모두 그의 사랑을 배척하고 있는 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 경건한 자들이 신앙으로 그의 사랑을 깨닫는 가운데 마음의 복된 평안을 누리기 전에는 그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혀 알려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점을 그는 여기서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기쁨은 거저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바탕이 허용되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 평안한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그는 이 기쁨이 근본적이요 충만한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신자들이 모든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쁨의 바탕이 얼마나 뛰어나든지 어떤 공포와 불안과 슬픔도 그들을 결코 삼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도록 허락받은 자들은 생명이나 죽음이나 그 어떠한 불행이 닥쳐 오더라도 그 슬픔을 이기고 승리하고 말 것이다.

 

”12 내 계명은 ~~~~ 이것이니라” ;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의 방향을 세워야하므로 먼저 우리는 그의 뜻, 곧 명령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것을 그가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서상 먼저 오지만 그것에 대한 진정한 증거는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이므로 그는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13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우리의 구원에 대한 보장을 보다 더 잘 설명하려는 뜻에서 자신의 사랑의 위대성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그의 본을 통해서 우리가 형제들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양자를 하나로 묶는다 곧 그는 우리가 그의 무한한 선하심을 믿음으로 깨닫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다음으로 그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사랑하는 일에 힘쓸것을 권유하고 있다.

 

”14 너희가 ~~~곧 나의 친구라” ; 이것은 우리 자신의 무슨 공로에 의해서 이 큰 영광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에게 그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를 그의 친구로 삼아주시는 조건을 상기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의 내용은 “ 나는 인간들이 통상 그들의 종들을 상대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너희들을 공손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하늘의 지혜의 비밀을 너희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는 사실을 나의 너희들에 대한 사랑의 표적으로 삼도록 하여라” 하는 뜻이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 물론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알고 계셨던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러한 수준에 다다를 수도 없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불가해한 만큼 그리스도께서는 각자에게 그들의 지식의 분량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것을 허용하셧을 뿐이다. 그러면 왜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나는 이것이 중보자의 인격과 임무에 국한된다고 대답한다. 그가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시는 것은 그는 우리에게 낱낱이 전해 줄것들을 하나님의 은밀한 성소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고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겸손하게 배우려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렇게 될 때 복음을 가리켜 인간을 완전하게 하는 지혜라고 부르는 바울의 말이 옳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골1:28)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처럼 큰 영예를 받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의 은혜 때문이라는 점을 보다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도로 선택한 그의 은혜와 그들을 교회의 몸으로 접붙여 준 이전의 선택을 하나로 묶고 있다. 분명히 이 말씀에는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모든 위엄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사도직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곧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 권고의 근거로서 그리스도는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값없는 사랑을 들추어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빚진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만큼 더욱 더 열렬하게 그가 우리에게서 요청하시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는 천박하고 배은 망덕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세웠나니” ; 선택은 한 사람이 그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직무를 받을 때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앞에서 인용한 귀절에서 바울은 그가 모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말을 하고 나서 그가 사도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 붙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자신의 좋은 시기에 가서야 마침내 예언자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부르시면서도 그를 모태에 있기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렘1:5). 물론 가르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이 직무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아무도 미리 필요한 은사를 구비하기 전에는 부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교회의 질서의 일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양자의 원저자라고 말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별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소명은 똑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속한다.

 

”이는 너희로 가서~~~~~~” ; 그는 이제 왜 그의 은사를 언급했는가 하는 이유는 곧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에 더욱 더 열성을 보이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사도직은 무슨 한직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없이 큰 어려움을 당해야 할 그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숱한 수고와 당황 그리고 위험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채찍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목적에서부터 이론을   전개하는 식이라고 보겠다. 여기서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는 ‘교회가 세상 끝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뜻으로 나는 해석하고자 한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 ; 이 귀절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문맥과 무관한 귀절이 아니다. 가르치는 일이란 원래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인 만큼 사단으로부터 수 없이 공격을 받기 마련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저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그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사전에 베푸시고 있다. 곧 그는 “그 일이 너희들에게 벅차서 임무를 성취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께서 너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복음의 사역자로 임명할 때 이미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면 언제고 그는 손을 뻗치사 너희들에게 도움을 베푸시기로 보장이 되어 있다”하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다.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 사도들에게 무엇보다도 서로간의 사랑이 요청되고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하게 하려는 뜻에서인데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일만 하고 각 개인이 자신의 일을 공동체에 가져오지 않는 것 보다 더 큰 장애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서로 간에 형제로서의 교제를 키워 나가지 않을 경우 어떤 대집단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 집단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요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