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 14: 21 ~ 24)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1)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4)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5)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6)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7)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8)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29)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0)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3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 ‘나의 계명을 가진다’는 말은 계명에ㅔ 대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고, ‘지킨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활을 그 원칙에 따라 맞춘다는 뜻이다. 이 성구는 바울사도가 고린도후서 5장 16~17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가르치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를 사랑하는 자니” ;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그를 사랑하는 자는 모두 그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므로 복이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그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이 귀절 역시 동일한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지식이 사랑보다 선행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그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지키는 자들이 매일 매일 신앙에 진전을 보도록 허용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로 하여금 나에게 더 친근하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의 열매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발전이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곧 가진 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그는 위선자들을 배척하실 뿐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을 온 마음으로 받아 들이며 그것을 순종하는데 온 생활을 바치는 사람들 모두에게 신앙의 진전이 있도록 해 주신다. 여기서 또한 명심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완전한 지식이 우리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대한 특별한 보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랑이 얼마나 귀한 보화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22 가롯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 제자들로 하여금 경건에 전념 하도록 권면해서 신앙에 큰 진전을 보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의 가르침을 지키는 이 표적을 통해서 세상과 그들을 구별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 이 표적은 신앙의 시작 뒤에 이어지는 것이요 신앙은 그들의 부르심의 결과이다. 후에 가서 그는 그들에게 이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에게 그의 가르침과 경건에 전념할 것만을 명령하고 있다.
”23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둘째 자리에 놓인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사랑의 원인인 우리의 경건 뒤에 오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복음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계속 새롭고 풍성한 선물을 기대하게 하려는 뜻에서다.
”저에게 와서” ; 이 말씀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 속에 내주 하는 것을 느낄 것이요 날마다 하나님의 여러 선물을 더욱 더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아니 세상에 창조되기 전에 그가 우리에게 가졌던 영원한 사랑을 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입양에의 참여자로 만드시면서 우리의 마음에 날인하는 그 사랑을 두고 말씀하고 있다. 더우기 그는 처음 조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하는 말씀에 따라 계속적으로 신자들이 발전해 가야 마땅한 신앙의 단계를 뜻하고 있다.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 ;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섞여 사는 가운데 마치 풍랑이 극심한 바다에서 온갖 폭풍에 시달리듯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이 권고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못된 본을 보고 곁길로 흐르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세상을 보거나 거기에 기대지 말라 거기에는 언제고 나와 나의 가르침을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한번 받은 은혜를 끝까지 고수하기만 하라”는 말씀과도 같다. 하지만 그는 이 말씀에서 세상이 눈먼 가운데 멸망하는 것은 세상의 배은망덕에 대한 정당한 보응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은 진정한 의를 멸시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건한 증오심을 들어내기 때문이다.
”너희의 듣는 말은~~~~” ; 제자들이 세상의 외고집 때문에 낙심하거나 방황하는 것을 막는 뜻에서 그는 다시 한번 그의 가르침이 인간적인 고안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그의 가르침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의 인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도자요 우리는 오직 그의 영원한 진리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세상이 제아무리 추태를 부리며 광기를 발한다 해도 우리는 모두 천지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자.
“25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이것은 무슨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도록 하는 뜻에서 덧붙이신 말씀이다. 그는 가르침의 씨앗을 뿌렸었지만 이것을 당시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잠시동안 잠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필요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 가르침이 열매를 맺히고 말것이므로 그때까지 소망을 갖도록 당부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그들이 이미 들은 가르침 속에는 풍성한 위로가 담겨 있으므로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게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면 내면적인 교사인 성령께서 동일한 것을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실 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것을 그는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당장에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교만한 마음에 압도되어 애매모호한 것에 쓸데없이 헛수소 할 필요가 뭐냐는 식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권면은 모두에게 유익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성령이 가르쳐 주실 것으로 약속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상기시켜 주실 것으로 그는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은 새로운 계시의 건설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한마디로 우리는 사단이 처음부터 성령의 권위라는 거짓 이름 밑에 교회에 들여온 모든 착상들을 반박할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마치 그것에 서명이라도 하듯이 확증할 성령을 약속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보냄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 그리스도의 평안은 허황한 소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실제적인 효과가 따른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장이다. 즉 그의 몸은 떠나지만 그의 평안은 제자들과 함께 남아 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그의 축복으로 항상 행복할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임재만 빼앗길 뿐 그의 진정한 임재는 성령을 통해서 계속 누릴 것이므로 놀랄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다. 우리 또한 이러한 종류의 임재로 만족할 것이지 언제고 하나님을 외형적인 착상과 육신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하자
”28 나를 사랑하였더면~~~~~~” ;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마땅히 그를 사랑했어야 하는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에는 어딘가 육적인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분과 헤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들이 그를 영적으로 사랑했더라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아버지에게로의 귀환을 열망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이나 영원한 신성을 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성을 생각하시고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높이에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곳에 들어 올리려고 내려 오신 것이다. 그의 말씀의 요지는 “너희들은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이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의 뜻이다. 이 말씀으로써 그는 그가 어떤 면에서 아버지와 다른가 하는 점이 아니라 왜 그가 우리에게 내려 오셨는가를 곧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서 오셨음을 보여주시고 있다. 우리가 이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길가는 도중에 서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전에는 우리는 그를 반 그리스도와 불구가 된 그리스도로만 상상하기 마련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만유안에 계시게 하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비슷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인성으로 통치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육신으로 계시된 하나님이기에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그리스도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신성은 그 때 가서는 그에게서 공공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신 시간부터 비취기 시작한 신성한 광채의 오나전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를 더 명확하게 얘기하는 뜻에서 좀더 직설적으로 예기해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아버지의 신성과 자신의 신성의 차이를 비교하거나 그의 인성과 아버지의 신령한 본질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의 상태와 그가 누릴 하늘의 영광을 비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너희들은 나를 이 세상에 잡아 두려고 하지만 내가 하늘에 올라가는 편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육신을 입고 낮추신 그리스도를 보며 그가 우리를 복된 불멸의 샘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바라도록 하자. 그는 우리를 태양권으로 데려 가는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만드실 지도자이시다.
”29 이제 이 일이 이루기 전에~~~~~” ;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그처럼 자주 경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 이 말씀으로써 그는 제자들이 자신의 말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기를 바라셨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 먼저 이 능력이 사단에게 허락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다음에 그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 순종하기 때문에 떠너야 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사단이 사마으이 나라를 휘어잡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편에서의 자발적인 복종이 없이는 아무 흠이 없으신 그분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잇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순경성 뿐 아니라 죽음에 굴복할 수 없는 그의 신성한 능력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그의 능력에 대한 신앙에 구김이 가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가 연약해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에게 선언한 것은 적절했다. 물론 이 일반적인 말씀 속에는 그가 사당에게 이끌려 억지로 죽어가고 있지 않다는 말씀도 포함된다. 여기서 그가 우리 대신에 죽음에 굴복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 모든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위배된다는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일어나 여기를 따나자” ; 그리스도께서 당장 그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간것으로 보기 보다는 그들이 그에게서 본 뛰어난 순종의 본보기를 하나님에게 바칠것을 권면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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