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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1. 성경 (요 14:1 ~ 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2)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3)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4)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6)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그의 제자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무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힘들고 처참한 투쟁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볼것인데 이것은 특이한 시험이요 절망 밖에 가져다 가져다 주지 않는 광경이었다. 더 없이 깊은 비탄의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는 그들이 완전히 압도되어 삼킨바 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그들에게 끝까지 인내할 것을 권면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서 용기를 얻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구원을 가져 올 힘이 충분히 있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을 때 신앙에서 용기를 얻을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우리는 언제고 이 말씀이 이야기된 때를 주목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만사가 완전한 혼란 속에 휘말려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용감하고 담대하게 서 있을 것을 바라셨다. 우리도 그러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패를 사용하여야겠다. 물론 우리가 여러가지 동요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설령 우왕좌왕 하는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하나님을 믿으니~~~~~~” ;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인내하는 방법을 곧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신앙을 고정시키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손을 펴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 먼저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놀랍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했어야 하기 때문이다.다시말해서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만큼 우리는 먼저 그를 바라 보아야 옳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내려 오신 목적도 우리의 신앙이 그에게 시작해서 하나님에게 이르도록 하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점은 모두들 인정한다. 아니 그것은 모두가 이론의 여지없이 동의하는 확정된 격언이다. 그러나 실제로 믿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위엄이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사단이 온갖 종류의 구름을 중간에 뿌려 놓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시야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의 영광과 접근 불가능한 광채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우리의 신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쉽게 안주할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2 내 아버지 집에 ~~~~~” ; 그리스도의 부재 때문에 그들이 슬퍼하게 되었으므로 그들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요 하늘나라에 그들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는 그가 아버지에게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그의 제자들을 땅에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신다는 생각을 제거하여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거할 처소가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곧 그집이 서로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충분한 집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거기에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그의 제자들을 위한 방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 “나는 너희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간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것을 이렇게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곧 이어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하는 말씀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뜻은  그의 따나심의 목적이 자신의 백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혼자 계시려고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그곳이 모든 경건한 자들의 공통 상속처가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머리가 지체와 머리가 지체와 연합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3 가서 ~~~~예비하면~~~~” 이 조건 접속사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 해석해서 “내가 가서 ~~~~ 한 다음에 너희에게 다시 올것이다”하는 식으로읽을 수도 있다. 물론 이 귀환을 성령의 오심으로 이해 해서는 안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때 제자들에게 성령 안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임재를 증거하고 있지 않으셨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후위 심판날을 곧 그가 최종적으로 그의 백성을 모으러 오실 그 날을 두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전체 몸을 생각한다면 그는 날마다 우리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는 적합한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4 내가 가는 곳에~~~~~” ;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오랜 격리기간을 참을서 있게 인내하려면 우리에게 불굴의 정신이 필요하므로 그는 또 다른 확증을덧붙이고 있다. 곧 제자들은 그의 죽음이 멸절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로의 통과라는 점과 그들이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따라야 할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두 귀절은 면밀한 주목을 받아야 마땅하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의 하늘의 영광과 복된 불멸에 대한 신앙의 눈을 통해서 바라 보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그가 우리의 생명의 첫 열매요 그가 우리에게 닫혀 있던 길을 열어 제쳐 놓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5 도마가 가로되~~~~~” ; 얼핏 도마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의 의도는 그의 스승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이유와 그 설명 방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지식에 혼란이 생기는 수가 더러 있다. 그러기에 선지자들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진정한 신앙의 이해와 결부시켜 예언하고 있지만 바울은 그것이 그들에게 감취어진 신비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떠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이 나라를 확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그가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고 있다는 도마의 지적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그 길이 더욱 더 애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우리가 길을 출발하려면 사전에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6 내가 곧 길이요 “ ; 그리스도는 자기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여러면으로 붙들어 주는 의미에서 곁길로 나가는 자들에게 손을 뻗쳐 내밀며 젖먹이 아이까지 손수 겸손하게 안내시키고 있다. 자신을 지도자로 제시한 이상 그는 경기 도중에 자신의 백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동참자가 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들로 하여금 더 없이 뛰어나고 기쁨이 되는 진리의 열매로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 되시므로 연약하고 무식한 사람들은 그들이 버림을 받고 있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는 진리요 생명이신만큼 그는 가장 완전한 자들까지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바로 앞에서 내가 말한 믿음의 대상에 대한 축복을 밝히 말씀하고 있다. 모두들 인간의 축복은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가운데 말하자면 그를 그의 참되고 본질적인 신성에서 격리시키는 바로 그점에서부터 잘못을 범하고 있다.

 

”진리요” ; 나는 이 “진리”를 신앙의 완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길”이 신앙의 시작이자 초보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귀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돌이킨다면 그는 곁길로 갈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바람과 허영을 먹고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표를 그리스도 이상으로 잡는다면 그는 생명 대신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이 귀절은 앞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길되심은 그가 우리를 아버지에게 인도하시기 때문이요 그가 진리와 생명이 되심은 그 안에서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문제로 말하자면 어느 기도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 ; 이 말씀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으려 하는데 이것으ㅡㄴ 어리석고 악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바로 앞의 말씀을 확증하는 셈이다.

 

”이제부터는~~~~~~” ; 이 말씀을 더 하시는 것은 그의 책망의 엄격성을 누그러뜨릴뿐 아니라 만약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 경우 그들의 배은망덕과 게으름을 비난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