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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1. 성경 (요 13:31 ~ 35)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1)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2)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3)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5)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6)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요약본)
”31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부축해 줌으로써 그들이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오늘날도 그가 십자가에서 사단, 죄, 그리고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는 위로가 우리에게 없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무서운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갖은 모욕을 받으시며 십자가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떠했을까? 그 처참하고 흉측한 광경을 보았을 때 백번이면 백번 다 어안이 벙벙하게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위험을 미리 내다보시고 그의 죽음의 외적인 면에서 영적인 성과를 내다보게 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신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치욕이 제 아무리 크게 부각되더라도 바로 이 십자가가 그에게 영광스럽다는 점을 그들에게 증거하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하는 말씀은 확증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볼 때 그처럼 흉측한, 아니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그 죽음에서 인자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은 역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 것은 바로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 길데 없는 선하심을 온 세상 앞에 제시하는 휘황찬란한 극장과 같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을 통해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십자가에서 처럼 그렇게 찬란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 십자가야말로 만물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현장이었다. 곧 모든 인간의 저주가 드러나고, 죄가 말끔히 씻겨졌는가 하면 인간에게 구원이 회복된 현장이었다. 한마디로 온 세상이 새롭게 되고 만물이 질서를 회복한 곳이었다.

 

”32 하나님이 ~~~ 영광을 얻었으면” ; 그리스도께서 그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실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 죽음을 통한 그의 유일한 목적은 그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영광을 추구하시되 아들로 하여금 이 동일한 영광에의 참여자가 되게 하는 그러한 방법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당분간 당하실 치욕이 씻겨지고 나면 장엄한 영광이 그의 죽음을 통해 비췰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성취되었다. 곧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영광을 흐리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더없이 밝게 비취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인류에 대한 불가사의한 사랑이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그의 끝없는 의가, 사망을 정복하고 사단을 짓밟는, 아니 하늘 문을 열어젖히는 그의 놀라운 능력이 최대한의 광채를 발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모두가 체험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곧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깔아뭉개려고 음모를 꾸민다 해도,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고자 분투한다면 우리는 그가 그의 편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의심할 수 없다.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이 떠나고 없을 경우 슬픔에 잠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그가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기에 어울리지 않는 영성을 제거하는 뜻에서 그들이 당장에는 그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는 제자들을 가리켜 “애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헤어지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더 없이 친근한 사랑을 그들에게 베풀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가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의 형제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다른 명칭을 통해서 그는 그의 사랑의 열정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를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의 잠시 동안의 부재를 참을성 있게 인내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말하자면 그는 그들이 지상 전투를 다 마칠 때까지 그들의 위치에 남아 있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제동을 걸고 있는 셈이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 그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권고를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나의 몸이 너희들과 함께 없는 동안 너희들 서로 간의 사랑을 통해서 너희들이 나에게 헛 배우지 않았다는 점을 증거 하도록 하라. 이것을 꼭 명심하거라”하는 말씀과 같다. 여기서 그가 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못 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율법에서 말한 사랑에 대한 내용은 문자적이요 외형적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통해서 그것을 신자들의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공포하셔서 그것이 모든 면에서 활기를 뜨게 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새롭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억지요 그리스도의 의도와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곧 비록 율법이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너무도 많은 의식과 첨부된 사항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그 가르침이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반면 복음에서는 아무런 그림자가 없이 완전한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물론 나는 이 해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의도는 이보다 훨씬 간단한 것으로 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이란 처음에는 잘 지키다가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잊혀지고 마침내 진부한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마음에 사랑의 교리를 보다 더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뜻에서 이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권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나는 너희들이 이 계명을 명심하되 언제고 바로 얼마 전에 제정된 법인 것처럼 여겨라”하는 말씀과 같다.

 

”서로 사랑하라” ; 물론 사랑이 외부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우리 모두 같은 육신을 입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중생한 자들 가운데서 더욱 밝게 빛나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 사이에서 이 사랑의 결속이 더욱더 다져지는 것이 마땅하다. 사랑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분에게 그 뿌리가 잇으며 그분을 향해서 지향되고 있다. 따라서 이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를 만날 경우에는 그를 더욱 더 큰 열성과 애정으로 껴안기 마련이다. 더욱이 서로 사랑하는 자세는 동일한 영의 지배를 받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만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최고 수준의 사랑이지만 한편 하나님의 선하심은 온 세상에 베풀어지고 부어지고 있듯이 우리 역시 모두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본을 제시하신 것은 우리가 그 수준에 미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에 비해 무한히 앞서 있지만 우리가 어쨌든 동일한 표적을 목표로 삼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35 이로써 모든 사람이 ~~~~알리라” ; 이것은 마치 “너희들이 나의 제자라는 점을 너희들만 아는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언행이 타인들에게 진정한 것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과도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표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백성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고 있는 만큼 사랑을 배척하고 새롭게 조작된 예배를 택하는 자들은 헛수고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허영이 오늘날 로마교회에서 성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그처럼 집요하게 고수하시는 일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물과 불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다.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을 완전히 배제하고 말 정도로 우리의 오관을 안 데로 묶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를 속이려고 던지는 수많은 유혹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귀속되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생활 전체가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재조정해서 이 일에 매진해야 마땅하다.

 

”36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내가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씀과 관련되는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자주 그리스도의 따나심에 대한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에게 전혀 생소한 소식이었다는 듯이 걱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에 적합하고 필요한 모든 내용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정작 실천해야 할 마당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는 문외한처럼 당황한다. 베드로는 또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 너무 집착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가는 곳에~~~~” ;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선,ㄴ 베드로의 부적당한 욕망을 견제하고 있다. 그는 교사답게 간략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곧 그의 말씀의 가혹성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모든 욕망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그것이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그의 말씀의 의도는 베드로가 아직은 십자가를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곡식이 영글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르익어가고 단단하게 되어 그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증대하시고 개선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하겠다.

 

”37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 베드로의 이 말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답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는 자신의 연약성에 대해서 수차에 걸쳐 경고를 받았으며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즉각 따를 수 없는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이해는 하였지만 아직 이 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베드로의 말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우리의 타고난 천성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힘이 없는 자들일 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도하려고 덤비기 마련이다.

 

”38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논쟁을 벌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배워 가기를 바라셨다. 이것은 실패를 맛보기 전에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도 헛된 자만심으로 물들지 않으려면 각자의 결점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약속해도 잘못이 없지만 여기서 책망되고 있는 것은 육신의 경솔과 뻔뻔스러움이다. 신앙은 두려움과 불안을 낳는다.

 

”닭 울기 전에~~~~~” ; 저돌성과 오만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베드로는 그가 전쟁터 밖에 있으면서 용맹스러운 군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꾸중을 듣고 있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말고 주님에게 매달리는 가운데 그가 그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붙들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