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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주석/사사기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사사기11:31)

1. 성경 (삿11:29 ~ 40)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29)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0)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1)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2)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3)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4)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5)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6)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7)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8)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39)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40)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삿 11:29-32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 (31절) 이것은 입다가 서원(誓願)하는 말이다.  그는  암몬 족속과 전쟁하기에 앞서 여호와께 이와 같은 서원을 올렸다. 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해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온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 자 "번제"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저 바쳐 올리우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  것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엄금되었다(레  18:21,20:2-5; 신 12:31, 18:10). 입다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혹은"밀곰"이라고도 함, 왕상 11:5,33)을 섬겼는데(왕상 11:7), 저희 자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다. 그 때에 입다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저런 미신도 미워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삿 11:35,36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 (35절) 입다가 승전하고 집으로 돌와왔을 때에    그의  외딸("무남독녀")이 누구부다도 먼저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이 때에 입다는 그의 서원한  것  때문에 걱정하였다. 여기 이른 바 "슬프다"란 감탄사(感歎詞)는 히브리어로 "아하" 인데 그저 염려를 나타내는 말이다. "슬프다"는 말은 너무 심각한 불행을  표현하므로 여기서 적당한 번역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너는 나를 당황케 만드는구나"라고. 우리 한역의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번역은 역시 너무 심각한 불행에 대한 표현이다.  35절 상반의 히브리어를 보면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죽임이 될 지경의 불행을  염두에  둔것이 아닌 것 같다.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성전  봉사에 평생 바침이 되어 그(입다)의 기업이 계승되지 못하게 됨을 그 중점으로 하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 (36절) 입다의 딸은 이 말로써 그 자신의 인격을 보여  주었다. (1)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며, (2)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효도를 행하였고, (3)  의리(義理)를 위하여는 자신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삿 11:37-39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37절  하반과 38절 하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은, 실상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또 39절 하반의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은, "그녀가 남
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 이되었다는 것(31절의 "번제"라고  번역된 것은,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출 38:8참조.


   중세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중세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도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7절). 9절 참조.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15-26)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事蹟)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레 18:21, 20:2-5). (3) 입다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9절 끝, 11절 끝), 그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 범하였다면 그는 레 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12:7). (4)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히 11:32).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 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35절 하반, 39절 하반).  그리고 그의 실행력(實行力)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 (36절 상반). 시 15:4 참조.


  삿 11:40

  나흘씩 애곡하더라 - 델리취(Delitzsch)는 여기 이른 바 "애곡하더라"란 말의 히브리어를 "찬송하더라"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하였다. 버네이(Burney)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한 것은, 신화적(神話的)  근거에 의하여 지켜진 축제(祝祭)였다고 한다(The Book of  judges  wiht  Introduction and Notes, 1970, pp.332-224).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구약 성경의 역사성(歷史性)을 그대로 받지 않는 잘못된 학설이다.

 

3. 메튜헨리목사 주석

암몬 족속과의 전쟁(사사기 11:29-40)

입다는 여기에서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또 한편, 입다는 그의 경솔한 맹세로 해서 고통 속에 괴로와하게 된다.

Ⅰ. 입다의 승리는 분명한 것이었으며, 그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밝게 드러내어 그의 탄원과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이루었다.

1. 하나님께서 그에게 훌륭한 영을 주셨으므로, 그는 매우 용맹스러워졌다(29절). 그 백성들이 만장일치로 그들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입다를 뽑은 후에 입다는 정당한 이유를 내세워 암몬 왕에게 화해를 제안하였으나, 그 왕은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그 때에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다. 입다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용감하고 슬기로와졌으며 그의 백성의 적에 대한 거룩한 열의가 더욱 불붙듯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의 임무를 확신시켜 주었으며 그에게 그 일의 성공을 약속하셨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을 들은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담하게 전장에 나아갔다. 그가 적진을 향해 나아 왔다는 사실이 특기되어 있다. 아마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비상한 분별력을 주심으로써,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전략적인 진영을 택하였을 것이다. 열심히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의로운 길로 가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그에게 훌륭한 승리의 기회를 마련해 주셨으며, 그는 그것을 대담하게 활용했다. "여호와께서 암몬 사람들을 그의 손에 붙이시어(32절)" 의로우신 심판을 내리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결코 굴하지 않는 전투력을 지니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과 싸우시는 분은 "보좌에 앉으시어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 입다는 그에게 주어진 호기를 놓치지 않고 잘 이용하여 드디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즉 그는 그들의 전사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그들을 성읍으로 추격하여 무기를 가진 자들을 모두 칼로 쳐 죽이니 그들은 결국 이스라엘군들과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33절).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 저주받은 백성을 완전히 멸한 것과는 달리 입다는 그들을 전멸시킨 것 같지는 않으며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 그들의 지배국이 된 것처럼 아첨했을지라도 그는 그 자신을 그들의 지배자로 받아 들이도록 요구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목표했던 것은 그들이 완전히 이스라엘에 항복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하려 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방어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해할 권리는 없는 법이다.

 

Ⅱ. 입다는 아주 우둔한 맹세를 했다. 마치 구름낀 날씨와 같았다. 그는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집에서 나오면서,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승리하게 해주시면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 집에서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또 무엇이든지 그것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기도를 함으로써 비밀스러운 엄숙한 맹세를 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가 승리를 거두고 이 기쁨 소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반갑게 맞아준 것은 바로 그의 외동딸이었다. 이 일을 당하여 그는 매우 당황했으나 이미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 자신의 불운을 애통하는 기간을 가진 후에 아버지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복종하였다.

 

1.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일들이 있다.
(1) 진실되고 깊은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에도 때로 불신과 의혹이 일어날 수 있다. 입다는 그의 성공을 확신할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었으며, 특히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승리를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행해야 하는 순간 그는 주저했으며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30절) 내가 이렇게 행하겠노라를 맹세를 했다. 이제 그의 맹세로 해서 그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은 그의 약한 믿음과 그가 하나님께 귀한 것을 바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바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합당한 봉사를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나,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댓가로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그리고 우리를 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경의로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러한 희귀한 맹세는(레 27:2)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자기 민족의 이익을 구하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좀더 열심히 하려는 뜻을 솔직하고 분명히 나타내려는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3) 우리는 이러한 맹세를 하는 데 있어서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좋은 충고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원한 후 양심의 갈등으로 혼돈 속에 빠져,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전 5:2-6) 말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또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이 물건이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된다" (잠 20:25). 그러므로 우리는 서원하기 전에 잘 살피고 필요한 조건과 제한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양심의 갈등을 막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입다의 경솔한 맹세를 우리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신 23:22 참조).

(4) 우리가 하나님께 엄숙히 맹세할 것은 그것이 아주 힘들고 우리에게 슬픈 것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합당한 일이면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입다처럼 맹세한 것은 강력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입을 열어 엄숙히 서원했으니 이제 내가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5절). 즉 "나는 이제 내 자신이 한 맹세를 취소하기에는 이미 늦었으며, 그 무엇이든지 그것을 감히 없앨 수도 없고, 또 나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할 수 없다." 그 물건이 나의 것이었을 때에는 "내 임의" 로 할 수 있었으나(행 5:4), 이제는 그렇지도 않도다. 내가 "서원하였으니 갚아야 한다" (시 76:11). 우리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맹세를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함받은 은총을 입었을 때 우리는 죄악을 강하게 대적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강한 노력과 함께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실행해야 한다. 내가 맹세했으니 나는 그 일을 해야 하며 또 곧 행하리로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조롱하지 않게 하라."



(5) 자식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부모들에게 온순하게 그리고 기꺼이 복종해야 하며, 특히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경건한 결정에 잘 순응하여 그 가정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 비록 그것이 힘들고 가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해야 한다. 마치 레갑 족속이 그들의 선조 요나단의 명을 지켜 믿음 가운데 술을 마시지 아니 하였으며, 여기에 나오는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맹세를 지켜 드리기 위해 또 하나님과 그녀의 나라를 영예롭게 하기 위해 기꺼이 그녀 자신을 제물로 헌신했던 것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36절). 아버지는 나를 귀히 여기시나 그보다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셔야 하나이다." 아버지는 딸의 서원을 취소하거나 허락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민 30:5), 딸은 아버지가 한 서원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제 5계명을 더욱 확고히 하는 일이 된다.

(6) 우리는 친구의 재난을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애곡하러 갈 때, 그녀의 처녀 친구들은 그녀와 함께 가서 애곡해 주었다(38절). 그녀가 사귀었던 이 같은 연령의 친구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 매우 기뻐해 주었을 것이며 이제 그녀가 이 무서운 재난을 당하자 그들은 다시 그녀와 함께 산에 올라가 그녀의 슬픔을 매우 애통한 마음으로 같이 나누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기뻐할 뿐 우리가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울어주지 않는 친구는 친구의 자격이 없다.

(7) 비록 경솔하고 잘못된 것이었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영예롭게 하려는 대담한 열의는 영구히 기억될 만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아버지를 위하여 원수를 갚으셨으므로(36절), 그녀의 목숨조차도 아끼지 않은 영예로운 입다의 딸을 기억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딸들이 매년마다 의식을 행했다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여자들은 싸움에 참가하거나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금해져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대담하게 자기를 희생시킴으로써 (아마도 그녀는 아버지가 "너는 나를 참담케 하였다" <35절>고 말하며 그의 서원함을 얘기했을 때 그녀가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신 감사로 그녀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를 꺼리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큰 일을 위해 그녀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그녀는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서가 아니라(이 영예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그 백성들에게 내리신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제물로 그녀를 바치는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8) 우리는 입다의 일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는 오늘의 환희가 돌연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오늘의 이 기쁨이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기뻐하되 항상 슬픔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2. 이 이야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몇 가지가 있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자세한 것은 풀(Poole) 영문 주석판에 맡기고, 나는 여기서 간단히 몇 마디만 얘기하기로 하겠다.

(1) 입다가 그의 맹세대로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1] 어떤 학자들은 입다가 서원한 말의 문맥으로 보아 그가 그의 딸을 번제로 바쳤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며, 그녀를 "여호와께 돌리겠다" 는 문맥으로 보아 그녀로 하여금 결혼을 하지 않게 하고 오로지 일평생을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은 그녀가 "그녀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다" (37,38절)는 귀절과"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 (39절)는 귀절에 그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녀를 제물로 바쳤다면 그녀가 애통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죽게 된 일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의 무남독녀로서 그녀가 결혼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재산이나 명예를 상속할 혈통이 끊어지게 된 그 불행한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입다가 그녀 이외에 아무런 자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34절)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입다가 그의 맹세를 회피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든 남자든 결혼하지 않은 자가 결혼한 자보다 더욱 거룩하다거나 하나님의 일군으로 더욱 합당하다는 율법이나 풍습을 구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제사장이나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러한 전통은 없었다. 여자 예언자였던 드보라와 훌다는 모두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녀가 단지 결혼하지 않는 일에만 입다의 맹세가 한정된 것이라면 그녀는 두 달이라는 기간 동안만 애곡하기보다는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그리하여야 했을 것이다.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슬픈 이별을 고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40절의 내용, 즉 이스라엘의 여자들이 해마다 네 번씩 그녀를 위해 애곡했다는 귀절에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입다가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는 의견이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입다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자에게 내린 율법 ("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 찌니라." 레 27:29)을 그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그의 딸을 바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을 기억하여 위로받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려 한다면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신 것처럼 그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그 일을 정지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아마 이러한 생각이 입다로 하여금 더욱 담대하게 행할 수 있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하도록 허락했다 할지라도 그를 해하여서는 안 된다." 입다는 분노나 악의로 행해진 것이 아니면 살인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의 선한 목적이 이 나쁜 행동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가 맹세를 한 이상, 그 맹세를 깨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딸을 죽이는 편을 택하였으며,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딸로 하여금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했다.

(2) 그러나 입다가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고 할 때 그것이 잘한 일인지는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1] 입다의 딸은 그에게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매우 귀한 자식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행위를 잘한 일이라고 정당화하는 학자들도 있다. 입다는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 믿음으로 위대한 일을 행한 훌륭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행한 위대한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입다가 두 달 동안이나 생각하고 상의하여 신중히 행한 일이었다. 또한 입다는 그 일로 해서 영감을 받은 저작자에 의해 비난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 행위가 아버지의 권위를 높이 세우긴 했지만 어쨌든 이 일을 정당화하기는 퍽 힘든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한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또한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그의 일상생활은 훌륭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떤 학자는 이 일을 위대한 제물로 바쳐지셨던 그리스도의 일에 비유하고 있다. 즉 입다의 딸이 처녀였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깨끗하고 결백하였으며 우리를 위해 저주받으시고 그의 아버지에 의해 제물로 바쳐졌다. 또한 그리스도는 입다의 딸같이, 하나님께 복종하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2]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입다가 경솔하게 맹세하고 그릇된 일을 행했다 하여 그를 비난하고 있다. 그는 그의 맹세로 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제 6계명을 어겼다. 하나님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것은 실상 라이트푸트의 의견대로 몰록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고 섬기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영감을 받은 저자들도 사실 입다가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는지는 잘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 후에 자기의 자손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자들도 확실한 위안을 받을 수가 없다. 이러한 입다에 대한 일과 제물을 바치는 그 밖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학자들도 의혹 속에서 잘 규명해 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이야기로 혼돈을 초래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만으로도 층분하리라 생각한다.

 

4. 호크마주석

29-32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 (31절) 이것은 입다가 서원(誓願)하는 말이다. 그는 암몬족속과 전쟁하기에 앞서 여호와께 이와 같은 서원을 올렸다. 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에승리케 해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온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 자 "번제"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저 바쳐 올리우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 것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엄금되었다(레 18:21,20:2-5; 신 12:31, 18:10). 입다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혹은"밀곰"이라고도 함, 왕상 11:5,33)을 섬겼는데(왕상 11:7), 저희 자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다. 그 때에 입다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저런 미신도 미워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35,36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 (35절) 입다가 승전하고 집으로 돌와왔을 때에 그의 외딸("무남독녀")이누구부다도 먼저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이 때에 입다는 그의 서원한 것 때문에걱정하였다. 여기 이른 바 "슬프다"란 감탄사(感歎詞)는 히브리어로 "아하"(* )인데 그저 염려를 나타내는 말이다. "슬프다"는 말은 너무 심각한 불행을 표현하므로여기서 적당한 번역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말(* )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너는 나를 당황케 만드는구나"라고. 우리 한역의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번역은 역시 너무 심각한 불행에 대한 표현이다. 35절상반의 히브리어를 보면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죽임이 될 지경의 불행을 염두에 둔것이 아닌 것 같다.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성전 봉사에평생 바침이 되어 그(입다)의 기업이 계승되지 못하게 됨을 그 중점으로 하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 (36절) 입다의 딸은 이 말로써 그 자신의 인격을 보여 주었다.(1)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며, (2)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효도를 행하였고, (3) 의리(義理)를 위하여는 자신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37-39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37절 하반과 38절 하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 )은, 실상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또 39절 하반의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 이되었다는 것(31절의 "번제"라고 번역된)은,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출 38:8참조. 중세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중세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도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7절). 9절 참조.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15-26)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事蹟)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레 18:21, 20:2-5).

(3) 입다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9절 끝, 11절 끝), 그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범하였다면 그는 레 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이스라엘의 사사(士師)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12:7).

(4)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히 11:32).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35절 하반, 39절 하반). 그리고 그의 실행력(實行力)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36절 상반). 시 15:4 참조.

40
나흘씩 애곡하더라 - 델리취(Delitzsch)는 여기 이른 바 "애곡하더라"란 말의 히브리어를 "찬송하더라"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하였다. 버네이(Burney)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한 것은, 신화적(神話的) 근거에 의하여 지켜진 축제(祝祭)였다고 한다(The Book of judges wiht Introductionand Notes, 1970, pp.332-224).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구약 성경의 역사성(歷史性)을 그대로 받지 않는 잘못된 학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