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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1. 성경 (요6:60~65)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0)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1)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2)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3)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4)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5)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6)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7)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8)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6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0)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71)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의 요약임)

”이 말씀은 어렵도다~~~” ; 완악하게 대적하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은 것이다(렘23:29). 그러나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똑 같은 단단함이 내재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감정에 따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판단한다면 그의 말씀은 수많은 모순과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은 우리가 귀로 듣는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 주신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여기서 우리는 불신의 죄가 얼마나 악의적인 것인지를 보게된다. 구원의 가르침을 완악하게 거절하는 자들은 핑계를 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거만스럽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를 돌리고 그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마음이 상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치유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또 나머지 사람들의 입을 막을 방법이 없는가를 알아보기를 원했다. 이 질뭄을 하시므로써 주님은 그들이 수군거릴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마음에 걸림이 되는 근본 원인이 가르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중상모략하려고 미쳐 날뛰는 악인들을 억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솔하게 진리를 공격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채찍을 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터놓고 이야기했다면, 거기에는 더 많은 희망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길이 열릴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끼리수군 거릴 때 그들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길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의미하는 바를 즉시 깨닫지 못할 때는 주님에게 직접 나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함으로ㅓ 주님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길잉 것이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주님이 육신을 입고 있을 때 그들이 실제로 보았던 그의 낮고 비천한 상태는 그들에게 그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휘장을 찢어 제체면서 하늘에 속한 그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 크리소스톰은 주님의 살이 육적인 마음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릇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비밀을 논하는데는 인간의 모든 지혜가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억지로 왜곡하지 않는 한 그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살리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억지 견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만, 그 살을 먹을 때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도 잘못되어 있다. 오히려 우리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를 먹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에 “육”만으로는 또는 “육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육은 성령과 연결되어 잇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잘 어울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먹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육은 아무것에도 전혀 쓸모가 없다는 듯이 모든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다만 육이 성령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씀하고 잇을 뿐이다. 육이 신령하지 않다면 어디서 살리는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육의 땅에 속한 성품만을 생각하나 사람은 그 육에서 죽은 것 밖에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육이 힘을 공급받고 있는 성령의 능력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그 효능과 믿음의 경험에서 살린다는 말이 절대 빈말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영이 육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조달한다는 의미에서 육은 과연 양식이 된다. 하나님은 육에서 우리와 화목의 관계를 맺으며 육에서 구원의 모든 부분이 성취된다. 그러나 육의 원천과 성격을 생각한다면 육은 무익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 자체가 죽음에 종노릇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님의 육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를 먹일 힘을 힘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신령한 입을 가져야만 참으로 영양 섭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은 짧게 단축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동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설교를 이 말씀으로 끝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신령한 자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몇마디 말씀은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주님은 그의 말씀을 그 결과에 따라 생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가 말씀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하셨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받는 사람에게만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에서 죽음을 자아낼 뿐이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들어가는 입구가 경외심과 겸손에 의해서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깨달음은 돌만도 못할 것이며 어떠한 건전한 교훈도용납지 못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라” ; 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을 때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여 말해진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문제의 진상을 알 수 있을 때까지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데 그 뜻이 있다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처음부터 아셨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에 국한된 특징이다.

 

“그러므로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사도 요한은 주님의 설교가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때까지 그의 편을 들던 사람들이나 그의 가까운 제자들까지 그의 마음을 소외시킨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이상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이 다수의 제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만든 그런 설교는 아예 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예언된 내용이 그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나는 것은  그 때에도 필요했고, 지금도 매일 같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되신다고 했기 때문이다(사8:14). 우리는 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을 잃지 안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에게 거침이 되지 않을 정도로 조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멸망에 넘겨진 버림 받은 자들은 아주 건전한 음식에서도 독을 빨아내고 꿀에서도 쓸개를 빨아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물론 무엇이 가장 유익한것인지를 아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 중 다수를 거치게 하는 일을 피하지 않으신것을 보게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순전한 교훈을 싫어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교훈을 억누를 자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고 한 바울 사도의 권면(딤후2:15)을 기억하고 담대하게 거치는 말씀까지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그것이 버림 받은 자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힐책해서는 안될 것이다. 몇 사람의 배도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너무나 소심하여 사람이 좀 걸려 넘어지면 실망하는 것이 예사다. 사도 요한은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고 하며 덧붙일 때 그는 그들이 완전히 배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와 가까이 동행하는 관계에서 물러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을 배도자라 부르지는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심각하게 흔들렸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화제를 사도들에게 돌려 다른 사람들의 경박함과 변덕스러움에 의하여 동요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 베드로가 주님에게 “영생의 말씀”이 계시다고 선언 할 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통 평범한 말을 하고 잇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영생의 말씀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우리는 인문과학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 진리를 우리 마음에 인칠 때 확실한 지식에 이른다. 비록 열두 제자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님을 구원의 주라고 고백하고 모든 일에 그에게 순복하는 것으로 족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 그리스도의 권면은 다음과 같다 “큰 무리 중에서 오직 너희 열 둘만 남았다. 많은 사람의 불신에 의해서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제 새로운 시련을 위해 준비하라. 열 둘은 적은 수이지만 아직도 한 사람이 더 줄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 하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유와 능력보다 사단에게 더 많은 자유와 능력을 불경건하고 악한 사역자를 위해 사용토록 허락 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 마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들은 야생의 맹수와 같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직분을 무시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 직분을 더럽힌 자가 그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 것을 볼 때 더욱 그 직분을 공경하게 된다.

 

”이 말씀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 수 많은 위선자들은 자기 자신의 상처를 느끼지 못하며 사람들 앞에 너무나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내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