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15:14 ~ 20)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4)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5)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6)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7)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8)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19)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20)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삿 15:14-17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마주 올 때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나귀의 새 턱뼈" - 로 그들 1000명을 죽였다. 삼손은 늘 위험한 원수들 중에 다니면서 아무 무기(武器)도 휴대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그릇으로 자기자신을 위험한 시대에 내놓았던 신앙가였다. 그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없는 것을 택하여 있는 것을 폐하시는 것이다(고전 1:29). 나귀의 새 턱뼈는 도저이 전쟁 무기로 꼽히울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늘 지니고 다닌 것도 아니었고, 그가 위기를 당하여 그것이 눈에 띄었으므로 집어서 사용했을 뿐이며 (15절), 사건이 지난 뒤에는 그것을 내어 버렸다(17절).
삿 15:18-20
삼손이 목 말라 허덕이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적(奇蹟的)으로 샘물을 솟아나게 하셨으므로 그가 그 물을 마시고 힘을 얻었다.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부르짖는자의 샘"이란 뜻이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동안 역사하였다.
3. 참고 (호크마주석)
=====15: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소리 지르는 동시에 -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결박된 채 오는 모습을 보고선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이제까지 겪어 본 중에 가장 힘센 사람이므로 어떻게 손 써 볼 수 없었던 삼손이 꽁꽁묶여서 오는 모습을 보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 들며 환호성을 지른것이다(Wycliffe,Matthew Henry)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 여기서 '여호와의 신'은 곧 성령을 가리킨다. 3:10주석 참조. 즉 원수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 승리의 환호성을 지를 때 삼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고, 포박된 줄은 불탄 삼과 같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죄의 사슬을 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히 2:14).
=====15:15
라맛 레히 사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 여기서 '나귀의 새 턱뼈'라는 것은 죽은 지 얼마 안된나귀의 턱뼈를 가리킨다.이것은 오래되고 마른 턱뼈보다 더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으므로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서 무기로 사용하기에는안성 마춤이었다(Lange).
그것으로 일천 명을죽이고 - 실로 피 튀기는 대학살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과단 한 줄로 요약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서 환호하며 뛰어오던 모습(14절)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즉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대적들은 순식간에 고통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죽어갔던 것이다.
=====15:16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 삼손이 혼자몸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무찌르고서 이제 자신의 승리를 2행시로 노래하는 장면이다. 이 시에서 '나귀'(* , 하모르)와 '더미'(* , 하모르)는 동의어로서 언어 유희를 담은 시이다(MatthewHenry). 이것은 신 32:30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삼손이 자신의 승리로 인해 이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있는 것이다.
=====15:17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여기서 '라맛 레히'(Ramath -Lehi)는 '턱의 산'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나귀의 턱뼈를 던져 떨어진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던 것이다. 아마 9, 14절에 언급된 '레히'라는 지명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 이로 볼때 삼손이 블레셋 일천 명과 대항하여 싸울 때(15절)에 유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삼손이 싸우는 동안 모두 도망가 버렸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일천명과 상대하여 싸운 삼손은 이제 지치고 갈증이나서 기진 맥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갈증으로 인하여 죽음 직전에 이른 삼손은,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만이 참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 이 때의 삼손은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을 이기고 이스라엘 광야에까지 도망갔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던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이다(왕상 19:4). 그렇지만 그는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다음과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1) 삼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위대한 구원의 체험을 상기함과 동시에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시30:10 ; 39:4).
(2) 그는 스스로를 종으로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고 계심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에 더불어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롬 6:13).
(3)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만일 삼손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죽게 된다면 라맛 레히에서 빛나게 했던 하나님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일이 되고마는것이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시 23:3)을 간구하였던 것이다.
=====15: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 여기서 '한 우묵한 곳'에 해당하는'함마크테쉬'(* )는 '절구' 또는 '절구형태로 된 구멍'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고대의 주석가들LXX, Vulgate, KJV, Luther)은 나귀 턱뼈(15-17절) 모양이 이 절구모양과 비슷하므로 하나님께서 턱뼈의 우묵한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란 단어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정관사가붙어 있다는 점과 엔학고레라는 이름이 본서 저자의 시대에까지 알려져 있다는 사실등을 볼 때 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옳지 않음이 분명하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나귀턱 뼈와 같은 모양의 뾰족한 절벽 사이 구멍에서 물이 흘러 나오게 하여 삼손의 갈증을 해갈해 주셨을 것이다(Keil, Lange, Studer).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위를 가르셔서물이 흘러나오게 한 사건은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출 17: 6 ; 민 20:8, 11).그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하는 이적들이다.
=====15:20
라맛 레히 사건 본절에서는 '레히'에서 대승리를 거둔 삼손이 이제서야 비로소 동족의 냉대에서벗어나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인정받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들처럼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과 같이 승귀(昇貴)되신 것을 연상케 한다(시 118:22).
블레셋 사람의 때에 - 사사기의 기록은 엄격하게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기 보다는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연대별 순서가 무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사들의활동 범위가 국지적(局地的)이었기 때문에 연대적으로 둘이상의 사사들이 동시대에 활동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삼손의 경우에도 그 활동 연대를 추정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그에 관한 기록들과 본절을 참고할 때 삼손의 사사직은 블레셋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과 결부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B.C.1080-1060년에 걸쳐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Cundall). 이렇게 볼때 삼손은 입다와 동시대인이면서 사무엘의 활동 시기와도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다. 한편그의 활동 반경은 단 지파와 유다 지파에만 국한되었다.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 '레히'에서 블레셋족을 격멸한 일로 인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의 사사로 정식 인정받은 삼손이 이후 20년 동안 사사로서의 공적 활동을하였음을 부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20년간은 블레셋의 이스라엘 압제 기간 40년(13:1)의 절반 밖에 못 미치는 기간이므로 삼손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완전히 구원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3:1 주석 참조.
4. 사사 삼손의 대강
전장(前章)은 아내의 배신으로 인해 수수께끼 게임에 진 삼손이 크게 분노한 채 아비 집 소라 땅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났었다(14:19). 그런데 이제 본장은 삼손이 아내에 대한 연정을 품고 다시 블레셋 땅 딤나로 돌아왔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것에 분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1-4절). 그리하여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로 블레셋의 논밭을 불사르며(4,5절) 자기 처가집을 해안 블레셋인들을 크게 도륙(屠戮)한다(6-8절). 그리고 자기를 잡으려는 것에 맞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쳐죽이는 대활약을 펼친다(9-20절).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삼손의 행동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인간들의 감정 대립에서 야기되는 온갖 비참한 인간사(人間事)의 저변에도 구원자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섭리가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고 한 말씀을 근거로 한 해석이다. 즉 한갖 여인에 대한 연정(戀情)으로 인해 폭발해 버린 삼손의 복수극은 단순히 삼손 자신만의 복수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복수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을 욕되게 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삼손을 통해 징계하신 것이다.
둘째, 문란한 사생활로 부도덕하게 보이는 삼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민족을 향한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다는 것이다(3절 ; 14:4). 그러기에 삼손은 본장에서도 자신이 당한 모욕을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블레셋인들과 격전을 벌인 것이다. 이로 볼 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다'(14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삼손을 강요하여 구원의 도구로 사용한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성령께서는 결코 사람을 돌이나 막대기로 취급하지 않으시며 도덕적 인격체로 대우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혹자들이 생각하듯이 삼손을 고대의 신화속의 초인적 인간이나 21세기의 초능력 소유자와 같이 만드셔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령은 인간의 지성을 깨우치고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의 의지가 하나님의 선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작용하시며 거기에다 육체적인 능력까지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자들을 오직 믿음의 사람들, 즉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을 가진 사람들 뿐이라고 하겠다. 히브리서 11:38에선 이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런 사람은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평하고 있다.
1. 삼손의 보복적 활동(15:1-8)
장인이 자기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준 것(14:20)을 단순히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응징하는 장면이다. 먼저 분노한 삼손은 여우를 이용하여 블레셋인의 곡식단과 밭을 불사른다(1-5절). 그러자 블레셋인은 도리어 삼손의 장인과 처를 죽임으로써 보복을 가해 온다(6절). 이에 극도로 분노한 삼손은 블레셋인을 크게 도륙하고나서 에담 바위틈으로 피신한다(7, 8절). 이상과 같은 본문은 부정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긍정적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이제 이를 생각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2. 동포의 손에 포로가 된 삼손(15:9-13)
삼손으로 인하여 블레셋으로부터 크게 위협을 받게 된 유다 사람들이(9, 10절)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장면이다(11-13절). 즉 앞서 삼손이 블레셋인을 크게 도륙한 데 대하여(8절) 원한을 품은 블레셋족은 유다 사람을 상대로 삼손을 결박, 그들에게 넘겨 준다. 이로 보건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압제하에 있었으나 굳이 그들이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략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현실 도피 또는 무사 안일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민 의식을 망각한 결과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식민지로서 허덕이게 되었는데(13: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진취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함으로 40일 광야 길을 40년 동안 헤매인 것과 유사하다(출 16:2, 3).
또한 본문은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종을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를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겼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특별한 선민 의식이 없는 그들에게는 삼손과 같은 지도자의 필요성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단적인 중거가 된다. 즉 그들이 실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21:25) 행한 자들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르기 위해 단합심을 보이기 보다는 뿔뿔이 자기 이기심을 좇아갔던 것이다. 그결과 삼손과 같이 민족 의식이 살아있는 사람은 오히려 동족에 의해 이방대적에게 넘기워지게 되었는데 이는 무룻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 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아와같이 동족의 손에 잡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가는 삼손의 모습은 일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모습을 예표해 준다(사 53:7). 그리고 죄로 인하여 올바른 신앙적 양심까지 상실한 채 굴욕적인 삶을 끝까지 고집한 간사는 유다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죄의 사슬에 매여 안일한 삶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어라석은 현댕인의 모습을 투영해 준다. 따라서 과거 얽매였던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삼손과 같은 깨어있는 의식하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엡
2:1-10).
3. 삼손의 승리(15:14-20)
동족의 손에 의해 결박당해 대적 앞에 끌려간 삼손이 밧줄을 끊고서 마침 주위에 있던 나귀 턱뼈 하나를 주워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쳐죽이는 장면이다(14-17절). 그리고 그로 인한 피로와 심한 갈증을 호소함으로써 삽손이 새로운 구원을 체험 하는 장면이다(18-20절).
이라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삼손을 결박한 굵은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끊어졌다는 것(14절)은 죽음의 밧줄을 끊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망의 권세가 잠시 그리스도를 결박할 수는 있었으나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온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눅 24장).
(2) 삼손은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했을 때 사슬에서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14절).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요 16:7-13). 즉 구원은 진리 가운데서 성령이 인도 하시는 자유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삼손이 나귀 턱뼈 하나로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15, 16절)도 하나님의 능력과 자유 안에서 가능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들어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고전 1:27).
(3)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손이 정작 그 자신은 갈증으로 목말랐던 것(18절)은 각 성도 개개인의 진정한 구원체험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즉3, 7절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구세주처럼 사기가 등등했고, 16절에선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삼손이지만 정작 목마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체험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이 구원이 여호와에게서 비롯된 것인 줄 깨닫게 된다(18절). 그리고 그의 기도에서도 자신의 죽음보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 것을 염려하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보여 준다(18절). 이와 같이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만이 그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후 1:9, 10).
민족주의와 신앙의 관계 - 본서에서 삼손은 바록 개인적으로는 문란한 사생활의 일각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지만(14:1 ; 16:1, 4)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당대의 큰 위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신앙인으로서 보여 준 그의 민족적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주의와 신앙의 바른 관계에 대한 깊은 교훈을 안겨 준다. 그리고 과거 3.1 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우리로서는 참된 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손에게서 그에 대한 몇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한 민족 안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극복해야 된다는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삼손과 다른 유다인 간에는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즉 유다인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인들에게 넘겨 준 것(11-13절)은 그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삼손과의 이견에서 나온 충돌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손은 자신의 견해를 동포들에게 고집하므로서 내부의 분란을 야기시키기 보다는 그러한 의견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행동함으로써(14-17절) 장차 동족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한분이시고 성령도 하나이시고 교회도 하나이듯 민족을 향한 마음도 하나로 뭉쳐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결실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진정 신앙 운동과 병행함으로써만 민족주의와 신앙을 서로 접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앞서 언급한 첫번째 요소만을 생각한다면 누구든 신앙인으로서의 민족주의자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18절) 이후 주체적 의식하에 20년 간이나 민족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20절).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민족주의적 운동운 우선적으로 하나님안에서 부름받은 그분의 일꾼이라는 자각 의식에서 시작될 때 비로소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