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 16:1 ~ 14)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1)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2)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3)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4)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 (5)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6)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7)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8) 이미 사람을 방안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 줄들을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의 힘의 근원은 알아내지 못하니라 (9)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하니 (10)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1) 들릴라가 새 밧줄들을 가져다가 그것들로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때에도 사람이 방안에 매복하였더라 (12)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13)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니라 (14)
2. 묵상 (박윤선박사주석)
삿 16:1-3
삼손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것은 잘못이다. 그는 순조롭게 결혼해 본 일이 없다. 처음에는 율법(신 7:3)을 범해가면서 이방 여자와 결혼했다 헤어졌고(14:1-3,8), 이번에는 그가 "기생"을 취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합당치 않은 처신이다. 레 21
:14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그를 도와주셔서(힘을 공급해주셔서) 원수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게 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자기 개인의 육신 생명 구출(救出)에 사용하였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을 징벌하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양심이 어두워지지 않았더면 그는 이중으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곧,
(1) 이스라엘의 사사(士師)의신분으로 기생 집에 들어갔던 것이 부끄러운 일이고,
(2) 범죄하던 중 위기를 당해서자기 개인의 육신 생명 구출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 했으니 그것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삼손은 이미 어두워져서 부끄러움을 몰랐다.
삿 16:4,5
삼손이 이번에는 "들릴라"라고 하는 여인을 사랑한다. "들릴라"란 이름은 약한 자란 의미이다. 그녀도 블레셋 여자로서 물론 삼손의 정식 아내는 아니었다. 성경에는 그가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는 말씀도 없고, 그녀를 그의 아내라고 한 말씀도 없다.
그녀의 이름 뜻이 약한 자란 것도 의미 심장하다. 삼손과 같이 힘있는 용사가 약한 여자에게 끌려 넘어지는 것을 보니, 사람의 육체의 힘 그 자체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영력(靈力)의 소유자가 되어야 참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된다(요일5:4). 삼손이 이 때에는 믿음을 지키는 자가 아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들릴라를 통하여 믿음이 떨어진 삼손을 넘어뜨리려는 공작을 개시한다. 그들은 들릴라를 "은일천 일백"으로 매수하였다.
삿 16:6-9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 (6절) 삼손이 이 때에 그녀에게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이와 같은 요구가 들어왔을 때에 그는 이같은 요구를 다시 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강경하게 막았을 것이다. 그는 일찌기 딤나 여자의 요청에 따라 수수께기의 비밀을 알려주었다가 실패한 쓴 경험도 있지 않은가! 이번에 들릴라의 요구는 삼손을 해하려는 데 노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이 그 요구를 아주 외면하지 않고 거짓말로라도 응해 주면서 부드러운 태도를 지켜 나갔으니, 그는 쾌락에 빠져서 위험을 위험으로 느끼지도 못하는 어두운 자가 되어 버렸다.
삿 16:10-12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 (11절) 삼손은 그녀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그녀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지 못하고 응해주었다. 그런데 이 때에 그의 마음 자세가 그녀를 위험 시 하지는 않고 이성(異性)을 즐기며 희롱하는 태도(13,15)로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이와같은 태도는 그녀에게 홀리어서 마침내 비밀을 발설할 수 밖에 없는 약점을 내포한 것이다. "새 줄"은 새로운 밧줄을 의미한다.
삿 16:13,14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 - (13절 하반) 세 번째 요구에 삼손은 거의 넘어지는 방향으로 끌려간다. 그는 자기의 "머리털"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 "위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날"이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베틀에 걸은 "날"실(warp)을 말한다. 그가 이제는 자기의 머리털을 염두에 두었으니, 참으로 위태한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이 때까지도 그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들릴라가 그의 말대로 그의 머리털을 직물의 "날"에 섞어 짜고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이르렀느니라)(14절 중간)고 할 때에 그가그 직물과 베틀의 바디까지 빼어냈으니, 그것은 하나의 희극이었다. 그는 심히 위험한 그 장면에서 도무지 깨지 못한 채 거짓말로써 자기의 애인과 즐기고 있었다.
그의 이 행동은,
(1) 시험 받는 때를 전쟁의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방종함이요,
(2) 자기를 멸망시키려는 자를 식별하지 못한 어두움이요,
(3) 육신의 정욕에 끌려 호색(好色)의 욕구를 채우는 데만 집중한 타락이었다.
그는,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그의 성역(聖役)에 사용해야 할 능력을 죄악의 향락에 이용하였다. 그가 이렇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아직까지 그에게서 떠나시지 않으셨다.
3. 16장의 대강 (호크마주석 발췌본)
삼손의 20년간의 사사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들은 이미 13-15장에 다 기록이 되었다. 이제 본장은 15장 이후에 추가된 기록으로서 삼손의 최후에 대해 특별히 따로 한 장에 걸쳐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본장에는 삼손의 치명적 약점인 여자와 관계 된 사건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삼손이 기생과 관계한 사건이다(1-3절).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릴라라는 세속적인 여인과의 사랑에 빠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나실인의 규례(13:5)를 깨뜨린 사건이다(4-20절). 이로 인해 삼손은 두 눈이 뽑히며 블레셋인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과 같은 수치와 모독을 당한다(21-27절). 이 와중에서 삼손은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최후의 긍휼을 덧입는데 곧 자신의 몸을 던져 대적을 멸하고 더불어 자신도 죽는 것이다(28-31절). 삼손의 최후에 대한 이러한 본장의 기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멀어지며 그 규례를 깨뜨려 타락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본장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께서는 철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삼손이 나실인의 서원을 깨뜨렸을 때 당한 환난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2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러한 환난은 공의에 입각한 징벌이면서도 동시에 그분의 사랑의 반영이었다. 왜냐하면 삼손이 자신을 실족케 하는 눈과 육체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자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환난을 통하여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다(마 5:29, 30).
이와 같이 스스로는 무능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시고,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참모습을 영안으로 보게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역사인 것이다. 그 결과 삼손은 자신의 육체를 버리면서까지 헌신하여 마지막에 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28-31절). 이에 대하여 본서 기자는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30절). 결국 이로써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고 한 여호와의 사자의 예고도 그 내용상 온전히 성취된다.
(2)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인간의 범죄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와를 꾀어 하나님과 인간 간의 언약 관계 및 인간과 인간 간의 유기적 연대 관계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망치려 했다(창 3장). 그런데 그러한 사단의 책동(策動)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은 거짓 선지자를 선동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어그러진 길로 가게 하는데(마 24:24) 삼손이 여인을 보고 미혹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단의 계교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사단이 인간들을 범죄의 도가니에 빠뜨릴지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이는 최후에 삼손이 회개할 뿐 아니라 그러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 블레셋을 응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의지는 창 3:15, 요 19:30., 히 9:28 등에도 선명하게 표명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날 사단의 책동은 망가지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단번에' 성취되고 말았다. 즉 이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섭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구속에 동참케 된 것이다(엡 1:3-14).
1. 삼손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벌(16:1-22)
앞서 딤나 여인(14, 15장)에 이어 재차 삼손을 궁지에 몰아넣는 음란한 두 여인에 관계된 기사이다. 그증 먼저 1-3절에는 가사 출신의 기생이 등장한다. 삼손은 이 기생을 보고 정욕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그 집에 들어갔다가 블레셋 사람들의 포로가 포로가 될 뻔한다(1. 2절). 그러나 이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신앙적인 양심을 소유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은 때라 가사의 성문을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옮기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된다(3절). 그렇다고 해서 본서 기자는 이에 대해 특별한 주석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데 아마 그 까닭은 이 일이 삼손 타락 사건의 전초(前哨)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4-22절에 등장하는 여인은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이다. 삼손은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윤리적 차원의 범과를 넘어 나살인으로서의 규례를 어기고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4-17절).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무할례자에게 조롱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삼손이(15:18) 블레셋 인들로부터 지독한 수치와 곤욕을 당하기까지 한다(18-22절). 따라서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사단은 항상 성도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블레셋 방백들과 음모를 꾸민 들릴라는 삼손을 곤고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는데(6., 10, 13, 15, 16절) 이러한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욥을 유혹하던 사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욥 1, 2장). 한편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사단의 유혹과 인간적인 약점에 대한 공격은 쉴새 없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고 단정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죄에 개한 두려움에 떨므로서 사단에게 공격의 여지를 보여줄 것이 아니라 신앙의 담대성을 기르며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성결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것이다(골 3:9 ; 벧전 1:5).
(2) 사단은 항상 자신의 행위를 미화시키고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낟는 것이다. 블레셋 방백들이 처음 들릴라를 찾아와 은 일천 일백 세겔을 내어 놓으면서 제안한 말은(5절) 단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인 즉 단지 그를 곤고케하여 그외 교만을 꺽어 놓으려는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들릴라가 그들의 제안을 쉽게 수락한 것은 돈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이러한 제안을 그렇게 위험하게 보자 않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들릴라의 유혹으로 인해 삼손이 당한 고난은 상상 밖의 것으로 엄청나게 잔인한 것이었다(21절). 이와 같이 사단은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성도의 생명을 위협해 오는 것이다(마 7:15).
(3) 사단의 유혹은 자주 음녀의 유혹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실 삼손과 같은 장정이며 독신인 기자는 음녀로 해서 많은 사람이 상하여 엎드러지게 되었나니 그녀에 의해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잠 7:26)고 했고 또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잠 6:26)고 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돈에 혹한 자나 권세에 혹한 자에게는 돈과 권세가 바로 음녀와 같은 작용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4) 신앙 양심은 끝까지 고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들릴라의 재촉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삼손은 급기야 진정을 토하면서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17절)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런데 실상 그러한 비밀은 지금까지 삼손이 지켜 온 마지막 신앙의 보루였었다. 따라서 만일 삼손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주신 나실인이라는 신앙적 자부심과 이에 대한 신앙적 양심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그의 종말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집사를 세울 때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9)를 집사로 세우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믿음의 비밀'은 곧 성도들의 삶을 지켜주는 신앙의 최후 보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의 비밀을 굳게 지니면 지닐수록 성도의 신앙은 더욱 곤고해지고 어떠한 사단의 시험이라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세속적 사랑의 본질 - 본문에는 삼손이 세속적인 여인 들릴라와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4절). 이와 관련 우라는 세속적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자는 세속적 사랑의 종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만일(if)의 사랑'과 '때문에(because)의 사랑'으로 보고 있다. 이제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1) 만일(if)의사랑 : 이것은 미래적인 번영이나 가능성을 전제한 조건부의 사랑이다. 사단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마4:3, 6)이라는 말로 두 번 시험하였고, "만일 내게 엎두려 경배하면:(마 4:9)이라는 말로 한 번 시험하였다. 전자는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조건부적인 사랑을 묻는 시험이었고 후자는 사단에 대한 조건부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시험이었다. 여기서 세속적인 사랑은 반드시 주어질 어떤 좋은 결과에 좌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에 대하여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라고 말씀하셨다.
(2) 때문에(because)의 사랑 : 이것은 현재에 주어진 결과에 만족하여 갖게 되는 사랑이다. 이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이 사랑은 현재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언제든지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이기적인 사랑이 된다. 본문에 나오는 들릴라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들릴라는 현재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사랑의 증거를 요구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순간순간 자기에게 주어지는 만족한 결과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15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들릴라는 삼손이 자기가 요구하는 것에 만족한 결과를 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라고 반문하게 된다. 여기서 '때문에의 사랑'은 주어지는 결과에 따라 언제든지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종류의 사랑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손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도 바로 들릴라의 '때문에의 사랑'에 만족함을 주려고 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17-21절). 즉 이러한 사랑은 항상 요구하면서도 결코 그 만족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심지어 삼손의 목숨까지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세속적인 사랑의 본질과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상과 같은 세속적 사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이다. 즉 상대방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하등의 이유와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랑이다. 이의 전형(典型)은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사건에서 극치를 이룬다(요 3:16). 따라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를 적극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명하고 계신다.
성령의 떠남을 결과 - 본문에는 삼손에게 임재해 있던 하나님의 권능이 떠나므로 말미암아 그에게 일어난 비참한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 즉 삼손은 머리털을 깍이므로 나실인의 상징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떠나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과 능력을 잃었던 것이다(19, 20절). 이처럼 평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던 자에게서 성령이 떠났다는 것은 그 자의 완악함이 절정에 달했음을 의미하는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공통된 현상이 나타나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성려이 그사람에게서 떠나면 그 사람은 불신자들보다 더욱 심각한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마 12:43-45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처음에 더러운 귀신 하나에 매인 바 되었던 자가 나중에는 더 악한 귀신 일곱에게 매인바 되어,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경우가 언급되어 있다(삼상 16:14). 그리고 베드로는 당시대의 타락상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벧후 2;22)에 비교하였다.
(2) 성령이 떠나면 성도는 불신자들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구별되는 형식이 요구되었던 만큼 타락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형벌도 더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손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데 실로 그는 두 눈을 뽑히우는 것과 같은 극한 형벌을 받았다(21절). 그러나 삼손은 그러한 형벌 중에 회개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일상적으로 범하는 숱한 죄악 속에서 버림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지만(시 51:5 ; 롬 3:23) 날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결된 삶과 믿음의 경주를 다할 때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다(잠 26:11 ; 빌 3:13).
2. 삼손의 최후(16:23:31)
극한 환난 중에 빠져 있던 삼손이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권능을 회복, 블레셋인들을 멸하고 장열한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의 감동적 장면이다. 즉 들릴라와 공모하여 삼손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그를 사로잡은 블레셋인들(4-22절). 그러자 원수의 조롱을 받
으며 온갖 굴욕 가운데 처해 있던 삼손은 하나님께 통렬히 회개하고 도우심을 간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을 얻은 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곳에 모인 블레셋인들을 압사(壓死)시키고 자신도 더불어 장열한 죽음을 맞이한다(28-31
절).
이처럼 본문에는 블레셋인과 삼손의 죽음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두 죽음은 전혀 상반된 성격을 띤다. 그중 블레셋인의 죽음은 악인의 죽음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시 73:12)라고 했으나 이 시의 후반부(19절)를 보면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猝地)에 황폐되었는가"라고 기록하고 있어 악인의 번영이 얼마나 일순간적이며 그들의 파멸이 얼마나 임박한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삼손은 죽음은 사단의 권세하에서 해방된 성도들의 일반적인 죽음이다. 일찍이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여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73:14)라고 했다. 이러한 탄식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일스록 더욱 자주 있어 왔는데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하면서 죄의 고통을 탄식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격국운 영적 싸움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복된 죽음이다(히 11:13-16). 그러기에 삼손도 깍인 머리카락이 다 자라는 날까지 원수의 조롱과 후욕(后縟) 속에서 지내는 동안 지난 날의 허물과 불충을 통절히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덧입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함으로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삼손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숙고해 보게 된다.
(1) 고난 속에서 성장한 삼손의 신앙은 단순한 개인적인 보복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한 장면을 이루는 업적을 이루었다.
(2)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
(3)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 삼손의 역사에서 사단의 왕국을 파괴하고 암흑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견하게 된다(40)
결론적으로 삼손의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 국가 시대에 하나님을 진정한 주권자로 따르지 못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징계하시며 인도하시며 구원하고 계시는가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