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 15:1 ~ 13)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1)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3)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4)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5)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6)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7)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 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 (8)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 한지라 (9)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0)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1)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2)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13)
2. 묵상 (박윤석박사 주석)
삿 15:1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 창 38:17 참조. 삼손이 그 아내를 떠나 자기 고향으로 갔으므로 그녀와 얼마 동안 떨어졌었는데 물론 그 책임은 그 아내의 배신 행위에 있었다(14:16-17). 그런데도 그가 솔선하여 그녀와의 화목을 도모하는 의미에서 그녀를 찾아 간 것이다. 남자가 화목 운동에 솔선하는 것은 언제나 남자다운 관대한 처사이다.
삿 15:2,3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생각한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 (2절 상반) 이것은, 삼손의 장인의 일방적인 처사요, 삼손에게 대한 배신 행위이다.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2절 하반) 삼손은 그 장인의 이와 같은 제안에 전연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 틈을 이용하여 블레셋 사람을 치고자 계획하였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 (3절) 삼손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사사이지만 그의 역사(役事)는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백성들을 재판해 준 일이나 혹은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한 사실이 없다. 그는 개인 단독으로 이곳 저곳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사람들을 해롭게 한 것 뿐이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정의감으로 움직였다.
삿 15:4,5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 삼손은 그에게 고통을 준 개인(그의 아내와 장인)을 해하려 하지 않고 블레셋 민족 공동체(共同体)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신자들은 이것을 모본하여 대국적(大局的) 견지에서 문제를 보아야 되며, 또 그것을 해결해야 된다. 우리는 개인들의 허물을 보고 그 개인들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죄악의 원천이 되는 마귀와 및 그 왕국에 대하여 도전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다(엡 6:12).
"여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우와 이리의 중간형 동물을 이름인데, 이 짐승은 몇 백 마리씩 큰 떼를 지어 다니며 팔레스틴에 많다고 한다. 삼손이 이 짐승들의 꼬리에 횃불을 달아 매어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과 감람원을 태운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곡식 밭의 곡식을 파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할 것이 있다. 곧, 삼손의 이 행사는 수수께끼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사자를 죽인 후 그 사자의 사체(死体) 속에서 벌꿀을 얻은 사건이 그러했다(14:14). 그러므로 이번 사건에서도 우리가 특수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우"로 번역된 그 짐승은 땅굴 속에 거하면서 썩은 것을 그 식물로 취한다. 그것은 부패한 성질의 소유자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꼬리에 횃불이 매달린 것은 부패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 심히 부패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강퍅한 그대로 고집하다가 그 진노 가운데서 멸망한다. 그 짐승들의 꼬리를 맺아놓고 거기에 횃불을 붙였으니, 그 짐승들이 발광하며 날뛰는 바람에 곡식 밭은 전부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회개할 소망이 없는 블레셋의 망동과 그 멸망을 비유하기도 한다.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이 취한 자 같이 발광하다가 망한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예언하였다(사 19:14, 24:20, 29:9, 49:26, 51:21; 렘 48:26, 51:7, 39:; 나 1:10; 계 17:2).
삿 15:6-8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과 감람원을 불태운 사건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아본 후 그의 아내 되었던 여자와 그 부친을 불살랐다(6절). 그들이 이렇게 행한 것은 삼손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삼손을 늘 미워하였다. 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분노에 이끌려 이성(理性)을 잃은 상태에서 폭발된 잔인성이었다. 이것을 본 삼손은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게 되었다. 삼손의 행동은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블레셋 민족에게 대한 징벌로 나타났다. 그는 이 때에도 사사로운 혐의로써 어떤 개인을 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代行)하는 원리에서 공의롭게 움직였다.
삿 15:9-12
유다 사람이 3000명이 삼손을 체포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 주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삼손은 그들을 대항하려 하지 않고 고요히 그들에게 결박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어디까지나 자기 사명대로만 행동하기 위한 순종의 태도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명을 받았으므로 그들을 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 때에 유다 사람들의 행동이 가증스러웠으나 그는 그들을 아꼈다.
3. 사사기 15장 대강
전장(前章)은 아내의 배신으로 인해 수수께끼 게임에 진 삼손이 크게 분노한 채 아비 집 소라 땅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났었다(14:19). 그런데 이제 본장은 삼손이 아내에 대한 연정을 품고 다시 블레셋 땅 딤나로 돌아왔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것에 분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1-4절). 그리하여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로 블레셋의 논밭을 불사르며(4,5절) 자기 처가집을 해안 블레셋인들을 크게 도륙(屠戮)한다(6-8절). 그리고 자기를 잡으려는 것에 맞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쳐죽이는 대활약을 펼친다(9-20절).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삼손의 행동은 다음 두가지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인간들의 감정 대립에서 야기되는 온갖 비참한 인간사(人間事)의 저변에도 구원자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섭리가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고 한 말씀을 근거로 한 해석이다. 즉 한갖 여인에 대한 연정(戀情)으로 인해 폭발해 버린 삼손의 복수극은 단순히 삼손 자신만의 복수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복수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을 욕되게 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삼손을 통해 징계하신 것이다.
둘째, 문란한 사생활로 부도덕하게 보이는 삼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민족을 향한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다는 것이다(3절 ; 14:4). 그러기에 삼손은 본장에서도 자신이 당한 모욕을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블레셋인들과 격전을 벌인 것이다. 이로 볼 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다'(14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삼손을 강요하여 구원의 도구로 사용한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설령께서는 결코 사람을 돌이나 막대기로 취급하지 않으시며 도덕적 인격체로 대우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혹자들이 생각하듯이 삼손을 고대의 신화속의 초인적 인간이나 21세기의 초능력 소유자와 같이 만드셔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령은 인간의 지성을 깨우치고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의 의지가 하나님의 선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작용하시며 거기에다 육체적인 능력까지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자들을 오직 믿음의 사람들, 즉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을 가진 사람들 뿐이라고 하겠다. 히브리서 11:38에선 이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런 사람은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평하고 있다.
1. 삼손의 보복적 활동(15:1-8)
장인이 자기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준 것(14:20)을 단순히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응징하는 장면이다. 먼저 분노한 삼손은 여우를 이용하여 블레셋인의 곡식단과 밭을 불사른다(1-5절). 그러자 블레셋인은 도리어 삼손의 장인과 처를 죽임으로써 보복을 가해 온다(6절). 이에 극도로 분노한 삼손은 블레셋인을 크게 도륙하고나서 에담 바위틈으로 피신한다(7, 8절). 이상과 같은 본문은 부정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긍정적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이제 이를 생각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2. 동포의 손에 포로가 된 삼손(15:9-13)
삼손으로 인하여 블레셋으로부터 크게 위협을 받게 된 유다 사람들이(9, 10절)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장면이다(11-13절). 즉 앞서 삼손이 블레셋인을 크게 도륙한 데 대하여(8절) 원한을 품은 블레셋족은 유다 사람을 상대로 삼손을 결박, 그들에게 넘겨 준다. 이로 보건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압제하에 있었으나 굳이 그들이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략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현실 도피 또는 무사 안일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민 의식을 망각한 결과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식민지로서 허덕이게 되었는데(13: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진취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함으로 40일 광야 길을 40년 동안 헤매인 것과 유사하다(출 16:2, 3).
또한 본문은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종을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를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겼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특별한 선민 의식이 없는 그들에게는 삼손과 같은 지도자의 필요성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단적인 중거가 된다. 즉 그들이 실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21:25) 행한 자들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르기 위해 단합심을 보이기 보다는 뿔뿔이 자기 이기심을 좇아갔던 것이다. 그결과 삼손과 같이 민족 의식이 살아있는 사람은 오히려 동족에 의해 이방대적에게 넘기워지게 되었는데 이는 무룻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 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아와같이 동족의 손에 잡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가는 삼손의 모습은 일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모습을 예표해 준다(사 53:7). 그리고 죄로 인하여 올바른 신앙적 양심까지 상실한 채 굴욕적인 삶을 끝까지 고집한 간사는 유다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죄의 사슬에 매여 안일한 삶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어라석은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해 준다. 따라서 과거 얽매였던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삼손과 같은 깨어있는 의식하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엡
2:1-10).
3. 삼손의 승리(15:14-20)
동족의 손에 의해 결박당해 대적 앞에 끌려간 삼손이 밧줄을 끊고서 마침 주위에 있던 나귀 턱뼈 하나를 주워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쳐죽이는 장면이다(14-17절). 그리고 그로 인한 피로와 심한 갈증을 호소함으로써 삼손이 새로운 구원을 체험하는 장면이다(18-20절). 이라한 번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삼손을 결박한 굵은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끊어졌다는 것(14절)은 죽음의 밧줄을 끊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망의 권세가 잠시 그리스도를 결박할 수는 있었으나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눅 24장).
(2) 삼손은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했을 때 사슬에서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었다는것이다(14절).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요 16:7-13). 즉 구원은 진리 가운데서 성령이 인도 하시는 자유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삼손이 나귀 턱뼈 하나로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15, 16절)도 하나님의 능력과 자유 안에서 가능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들어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고전 1:27).
(3)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손이 정작 그 자신은 갈증으로 목말랐던 것(18절)은 각 성도 개개인의 진정한 구원 체험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즉3, 7절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구세주처럼 사기가 등등했고, 16절에선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삼손이지만 정작 목마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체험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이 구원이 여호와에게서 비롯된 것인 줄 깨닫게 된다(18절). 그리고 그의 기도에서도 자신의 죽음보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 것을 염려하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보여 준다(18절). 이와 같이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만이 그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후 1:9, 10).
민족주의와 신앙의 관계 - 본서에서 삼손은 바록 개인적으로는 문란한 사생활의 일각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지만(14:1 ; 16:1, 4)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당대의 큰 위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신앙인으로서 보여 준 그의 민족적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주의와 신앙의 바른 관계에 대한 깊은 교훈을 안겨 준다. 그리고 과거 3.1 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우리로서는 참된 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손에게서 그에 대한 몇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한 민족 안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극복해야 된다는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삼손과 다른 유다인 간에는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즉 유다인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인들에게 넘겨 준 것(11-13절)은 그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삼손과의 이견에서 나온 충돌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손은 자신의 견해를 동포들에게 고집하므로서 내부의 분란을 야기시키기 보다는 그러한 의견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행동함으로써(14-17절) 장차 동족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한분이시고 성령도 하나이시고 교회도 하나이듯 민족을 향한 마음도 하나로 뭉쳐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결실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진정 신앙 운동과 병행함으로써만 민족주의와 신앙을 서로 접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앞서 언급한 첫번째 요소만을 생각한다면 누구든 신앙인으로서의 민족주의자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18절) 이후 주체적 의식하에 20년 간이나 민족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20절).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민족주의적 운동은 우선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부름받은 그분의 일꾼이라는 자각 의식에서 시작될 때 비로소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