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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야고보서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약5:1)

1. 성경 (약5:1~6)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1)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2)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3)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4)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5)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들으라~~~~~~" ; 야고보가 여기서 부자들에게 회개를 권면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이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전격적인 선언으로서 그들을 완전히 공포로 사로잡아 사죄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절망적이다. 그는 마음의 변화를 요청하는 그런 말투로 이들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는 사실 믿음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로 하여금 부자들의 비참한 멸망을 주의 깊게 보고 그들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우기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현재 받고 있는 상처를 복수하실 것이라는 점을 알고 침착한 마음으로 견뎌야 한다. 그가 배격하는 것은 어느 한 부자가 아니라 탐욕스럽게 그들의 길에 놓인 것을 모조리 삼키며, 전횡적인 횡포를 구사하여 타인을 괴롭히는 그러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문맥에서 드러날 것이다.

 

"울고 통곡하라" ;  회개에는 슬픔도 따르지만 이 때의 슬픔에는 위로가 뒤따르고 있기 때문에 비통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하늘의 잔혹한 저주는 부자들에게 너무도 소름끼치는 것이라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화 있을진저!'  하는 식이다. 실제로 그의 언어 형식은 다분히 예언적이요 불경건한 자들에게 뒤따를 형벌을 당장에 그 자리에서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들 자신은 그들의 행운을 기반으로 온갖 기쁨을 상상하면서 좋아하고 있지만 야고보는 그들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처참한 고통을 말해 주고 있다.

 

"2. 너희 재물은~~~~~" ;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곧 그들이 자신의 행복의 근거로 삼는 재물이란 덧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어리석은 자만에 대한 조롱으로 보는 면이 그 하나요, 다른 한 가지 면은 재물을 산적하는 결과는 그것이 아무에게도 혜택을 주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불굴의 대욕에 대한 꾸중이라는 표정이다. 후자가 더 타당해 보인다. 사실이지 부자들이 의복, 금, 은 등의 덧없는 재물에 대한 자랑은 정신나간 처사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자신들의 영광을 좀이나 녹에 내맡기는 결과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부정한 이득은 쉽게 빠져 나간다." 또 이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저주하셔서 흐트러 놓고 말기 때문이다.

 

악인들이나 그 후손들이 마치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듯이 폭력으로 탈취한 재물을 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지만 여기서 야고보는 부자들이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는 여러 악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부자들의 극심한 욕심에 대한 비난으로 볼 수 있다. 곧 그들은 무엇이든지 온 사방에서 긁어 모아 놓고는 산더미째 썩게 내버려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써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용하도록 창조하신 것을 파멸시키는 자들이요, 따라서 인류의 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여기에 정죄된 악이 각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사치스럽게 사는데 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호화스런 전시를 하는데 중점을 두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회 정의를 무시하고 비열한 수전노처럼 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여러가지 잘못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고는 부당한 재물을 축적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재물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야고보의 현재 토론은 플라우투스의 유클리오(Euclio)처럼 인색하게. 재물에 매달리는 사람들 뿐 아니라.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후자는 자신들의 산더미 같은 재물이 다른 필요한 일에 사용되기보다는 자기 눈 앞에서 탕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성격상 햇빛이나 맑은 공기를 남과 함께 즐기는 조건조차. 배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3.~~~~~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  이것은 바로 내가 앞에서 설명한 점을 확증한다. 하나님께서는 금이 녹이 슬거나, 옷이 좀먹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인간의 생활을 보살피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탕진한다는 것은 소유자의 비인간성을 여실히 증거하는 셈이다. 금이나 은의 부패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을 자초하는 가운데 그들을 그 열기 속에서 태우고 말 것이다. *너희가 ~~~~재물을 쌓았도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곧 부자들이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세상 끝날까지 살 만큼 재물을 모으는 데 여념이 없다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한 가지 해석은 그들이 최후의 날까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산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두번째 해석을 택하겠다.

 

"4. 보라~~~~~ 삯이~~~~~"그는  '대욕의 불가분한 친구인 '잔인성'을 여기서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한 가지를 지목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것 보다 더 추악하기 때문이다. 인정이 후하고 공정한 사람은 자신의 육축의 생명도 돌아보는데(잠 12: 10) 인간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의 피땀흘린 노동의 대가를 착복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야만 행위인지 모른다.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품군의 노임을 주지 않고 그 날을 넘기지 말 것을 엄격히 경고하고 있다(신 24: 15). 더우기 야고보는 그저 일군들 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을 기하는 뜻에서 농부들과 추수군들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빵을 제공하는 자들에게 굶주림과 기근을 주는 것보다 더 악독한 일이 또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무서운 일이 회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온 인류가 자신들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독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들의 '앉이 소리지르며' 라는 말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사기나 폭력으로 착복할 경우 그것은 틀림없이 쟁쟁한 소리와 함께, 재앙을!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의 우는 소리' 가 하나님의 귀에 들린다는 것은 이러한 손해가 보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당한 압력을 받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참도록 해야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남에게 손해를 끼칠 능력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피하도록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수호인이요, 후원자이신 하나님의 벌을 자초하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만군의 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어 그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  이제 그는 다른 악, 곧 호화스런 생활을 다루고 있다. 보통 이상의 재물을 가진 자들은 거의가 자신들을 억제하지 않고 그들의 풍성한 재물을 사치스럽게 허비한다. 나는 앞에서 그들의 풍요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굶어 죽는 부자들도 더러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진수성찬을 차려 놓은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 배고파하는 탄탈루스(Tantalus)에 대한 시인의 묘사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 수많은 탄탈루스가 있어 왔지만 여기서 야고보는 이 모든 사람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부자들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탐식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당신의 공급을 받아 풍족하게 살도록 허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사치스런 생활을 피하고 검소하게 살도록 해야겠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시켜서 상아 가구에 파묻혀 잠들고, 귀한 향유를 물 쓰듯이, 퍼쓰며, 악단의 연주를 들어가며 식도락을 즐기는 자들, 사실상 좋은 목장의 배부른 소나 다름 없는 자들에게 통렬한 경고를 주시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피조물의 안락에 대한 안목을 갖도록 하려는 뜻에 있다. 방종은 하나님의 은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이 말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고 정도 이상의 만족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는 여기서 도살의 날에 라는 말을 써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의식적인 제사의 날에는 다른 날보다 더 제 멋대로, 홍청거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자들이 자신들을 삶을 하나의 끝없는 환락의 도가니에 빠진 .축제로 허송한다는 뜻이다..

 

"6. 너희가~~~~~~정죄하였도다~~~~" ; 여기에 또 다른 형태의 잔인한 행동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부자들의 연약한 자들에 대한 압박과 파괴 활동이다. 그는 비유적으로 의인들이 그들의 죽임과 정죄를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목을 조르지 않고 심판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권위의 힘으로 정의를 결과 무고한 자들을 파멸하는 여러가지 일에 휘두름으로써 사망과 운명의 첩자 노릇을 하는 셈이다. "옳은 자를*****!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하는 말은 부자들이 박해하고는 사람들이 전혀 무력한 그만큼 그들의 오만한 죄는 더 커진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가난한 자들이 무방비 상태에 있는 만큼 하나님의 재앙은 더욱 신속하게 내릴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의로운 사람이 저항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그 상처를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그가 힘이 없고 인간적인 도움이 없기 때문에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뜻 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