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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야고보서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약3:11)

1. 성경 (약3:1 ~ 12)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1)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3)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4)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5)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6)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7)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8)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9)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0)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1)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1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  이 귀절을 가리켜, 가르치는 임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할 위험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직업에 대해서 큰 열심을 가지는 것을 억제하라는 귀절이이라고 보는 주석이 통례요, 또 이론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의 숫자는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선생들'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권리를 악용해서 남을 욕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이들은 곧 도덕 선생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비평가들이다. 이 '선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헬라어나 라틴어나 똑같이 '헐뜯는 눈초리로 남을 내려다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많이' 라는 말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뜻이다. 남을 깔보고 자신의 위신을 내세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행동의 악 영향은 곱절로 나타난다. 곧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적고 제 멋대로 배운 것을 혼란시키는 사람은 많게 되는 것이다. 오직 소수만이 진정한 관심을 보이고 나머지는 자신의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위선과 야망에 따라 충동을 받을 뿐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성령이 우리에게 그처럼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다정한 권고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추구와 교만에 따라 자기 동료를 헐뜯고 욕하며 무슨 해를 끼칠 것이 없나 하고 눈을 부라리는 격 정을 정죄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비평가들일수록 남의 비행을 수색하는 권리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큰 소리치기 마련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이런 지나치게 오만한 행동을 삼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남에게 그처럼 가혹한 자들은 더 무서운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의 언행을 극단적으로 가혹하게 처리하는 자들은 스스로 에게 준엄한 표준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곧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 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가 우리 형제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면 하나님의 가혹성을 자초할 뿐이라는 이 교훈을 늘 명심해야겠다.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  이 귀절은 양보적인 의미로 곧, "자 보라.너희들은 너희 형제들을 헐뜯지만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누구든 한 가지 이상의 잘못이 있지 않은가? 너희 혀는 그렇게 추잡하고 비위에 거슬리는데도 자신을 그렇게 완전하다고 생각하는가 ?" 하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야고보는 이 논리를 사용해서 우리에게 보다 더 너그러운 태도를 권하는 것 같다. 곧 우리 자신이 부지기 수의 약점 투성이가 아니냐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용서를 적용하면서 남에게는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 만일 사람이 범죄 할 경우에 온유한 심령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면서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갈6 1)는 바울의 말을 여기에 참조하라.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  여러 가지 면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을 말하고 나서  그는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비판적인 언사가 얼마나 혐오스러운가 하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혀로 실수를 범하지 않는 자를 가리켜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말조심이 탁월한 덕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남의 문제에 있어서는 잘못을 낱낱이 뒤적거리지만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목을 움츠리는 자들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자신을 돌아보아 무엇보다도 탁월하고 중요한 죄악, 곧 타인에 대한 독설을 깨달아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하는 지나친 비평가들의 위선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남을 혹평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완전한 성결을 요란하게 위장하지만 사실 완전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혀에서 부터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_혀를 자제할 능력이 없으며,  아니. 자신들의  호통과 공박은 ,자신들의 거짓 경건에 대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만큼, 누구보다도 제일가는 덕을 무시한 죄로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들이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제자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다.

 

"з. 우리가 말을 ~~~재갈 먹여" ;  이 두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진정한 완전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혀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려는 뜻에서이다. 이것은 그가 우리는 전 생애에 걸쳐서 이것을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그대로이다. 먼저 그는 혀를 고삐에, 다음에는 배의 키에 비교하고 있다. 말 타는 사람이 고삐 하나로 거친 말을 자기의 뜻에 따르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을 제어하는 혀의 능력 역시 이에 못지 않다는 얘기다. 그 큰 배와 광풍을 이겨내는 배의 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작은 지체인 혀가 인간의 생활을 조절하는데 있어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4. 사공의 뜻대로~~~~ (사공의 '충동; RV)" ;  에라스무스는 '욕망'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호르매' 를 충동이 라고 보는데 나는 '경향'으로 생각한다. 물론 헬라어에서는 이 단어가 이성에 굴복하지 않는 격정으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야고보는 단순히 조타수의 선택 능력을 두고 말하고 있다.

 

"5. 큰 것을 자랑하도다" ; '메갈라우케인' 이라는 헬라어는 '스스로 과시하다' 또는 열병하다' (parad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는 허세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혀가 큰 효력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마지막 귀절에서 우리는 앞서 두 비교가 그가 다루는 교훈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쓸데 없는 자랑'이란 말은 배의 제어와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그는 혀가 우리는 큰 영향력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그는 무절제한 언사에서 오는 어려운 점을 제시함으로써 그 어느 쪽으로든 혀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의 혀가 절도를 지킨다면 우리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한 고삐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무례하고 난폭하게 되면 온 집을 불사르는 한 개피의 성냥이 되고 만다. '어떻게 작은 불이'라는 말은  혀가 작다고 해서 광범위 하게 해독을 끼치는 것을 방지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불의의 세계'라는 말은 '대해'나 '심연'이라는 뜻을 효과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계의 무한한 공간과 혀의 작음을 잘 비교하는 표현이다.]

 

"6.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  여기서 '세계'라는 말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곧 혀의 오염은 생활의 온 구석에 퍼진다는 뜻이다. 아니면 그 것은 불에 대한 비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곧 그것은 온 몸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는 곧 이어서 "불이 생(자연)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생활의 과정이 바퀴에 비유되고 있다. '게네신'은 자연에 대한 표현이다. 곧 철이 바뀌고 해가 바뀌는 데 따라서 다른 악은 교정되지만 혀의 악은 갈수록 생의 각 단계에서 무르익어간다는 뜻이다. '불사름'이란 처음부터 거침없이 번져가는 잔혹 마차의 갈기갈 한 충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호레이스(Horace)는 이것을 경주에서 속력 때문에 불타는 바퀴'에 비유한다. 이렇게 되면 혀는 사람을 기 찢어놓는 거친 말과 같다는 뜻이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  이 말은 혀의 횡포가 바로 지옥의 불길과 같다는 말이다. 세상 시인들은 악인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그 횡포 의 타는 불길 때문이라고 잘 묘사하고 있듯이, 지상에서 여러가지 시험의 부채질을 받는 온갖 종류의 악에 사단이 불을 지피고 있다는 얘기는 참된 표현이다. 야고보의 의미는 혀가 가장 쉽게 사단의 불을 지피며 그 그불을 번 지게 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지옥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해 서 번지게 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다.

 

"7. 여러 종류의 짐승~~~~~" ;   이것은 지금까지 말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혀는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그는 사단의 혀에 대한 지배가 얼마나 주효한가를 증명하면서 여기에 여러 가지를 비교하고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즉,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고 물고기도, 그처럼 민첩하고 날쌔 새도, 인류의 원수인 뱀도 때에 따라서는 길들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혀가 아무런 제약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지옥불의 숨은 근원이 들어 있음에 틀림없다. 짐승, 뱀 등의 피조물에 대한 비유는 그 자체로서 무슨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은 제 아무리 난폭한 짐승도 복종시키고 만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뱀도 훈련시킬 수 있는 것이 사람의 기술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와 과거의 시제를 다 사용하고 있는데 전자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능력을, 후자는 관습과 체험의 교훈을 암시한다. 혀에 치명적인 독이 가득하다는 그의 결론은 여기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먼저 본 귀절의 문맥과 연관지어져야 하지만, 즉 사람들이 가장 악독한 죄악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남의 선생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겠지만, 우리의 생활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지체인 혀를 통제어하는 데 무엇보다도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9. 이것으로~~~~~~ 찬송하고" ;  이것은 그 독의 치명적인 힘에 대한 훌륭한 묘사로서 황당무계하게 변덕을 부려가며 변형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척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부음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업적을 두고 그에게 찬송을 돌린다면 특별히 그의 형상과 영광을 빛나게 보여 주는 사람을 두고 찬송을 돌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위선이다. 악한 말이 우선권을 차지하게 되면 우리의 찬송의 말은 당장 소멸되고 마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할 수 없다. 형제들을 헐뜯는 혀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그에게 마땅한 경배를 드리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이 독설을 삼가해야 한다.

 

그러나 야고보의 강조점은 이것이다. 곧 점잔 빼시는 우리의 심판관님들께서 한편으로는 그럴싸하게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을 불허하는 그런 욕을 형제들에게 퍼부어 대는 거기에 그들 자신의 판단의 맹독성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이다. 인간 본성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제거된 것이 아니냐고 반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비참하게 변형되었지만(deformed) 그러나 그 형상에 대한 특정한 모습은 아직 남아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의, 공평, 선을 추구하려는 자유, 이러한 것들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많은 은사가 우리에게 남아 있으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짐승보다 우월한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상대로 욕을 퍼붓는 일을 삼가하기 마련이다.

 

"11. 샘이~~~~~~" ; 이 비유를 첨부한 것은 저주하는 혀는 자연 질서에 있어서 특이하고 생소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질서를 평가는 데마다 .파괴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는 뜻에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대되는 것을 완전히 구별해 놓으셨기 때문에 무생물계마저 우리로 하여금 이중 거래를 하는 혀의 혼란과 모호성을 피하도록 설득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