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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야고보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2:12)

1. 성경 (약2:8 ~ 13)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8)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9)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0)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1)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2)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

 

2. 묵상 (Calvin선생주석)

이제 요점이 확대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꾸중해 온 이유를 쉬운 말로 밝히고 있다. 곧 그들은 '사랑한다는 명분 때문이 .아니고 부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추잡한 목적으로 부자들을 기쁘게 하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논쟁상의 예변법(prolepsis)을 써서, 상대방의 핑계를 미리 포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무자격한 사람들에게까지 공손하게 자신을 복종한다면 비난을 받을 수 없지 않느냐는 구실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옳은 이야기이다.야고보도 이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웃에게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그들의 핑계의 허구성이 드러난다는 점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말하자면 먼저 우리가 이웃에게 행하는 사랑의 모든 임무가 옳고 칭찬할 만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으로 그는 특수한 사람들만을 이런 수준에서 취급하는 것 은 잘못이라는 점을 논박하고 있다. 

 

그것은 율법의 목적과 전적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의 주요 골자는 '이웃'과 '외모'라는 단어에 담겨 있는데 이것은 마치 "너희들은 위장된 사랑으로 너희들의 행동을 감싸고 있지만 그것은 곧 벗겨지고 말것이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선발된 외모의 사람을 사랑할 아니라 ,우리 이웃을 모두 사랑할 것을 명령 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이웃이란 인류 전반에 걸쳐서 적용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든 자기가 선택한 몇몇 사람만을 상대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포기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Law)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비열한 이익에 순종을 바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낯선 사람들과 원수, 그리고 어떤 의미로든 우리에게 비열해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다같이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다. 사람 차별이란 이 가르침과 정반대이다. 그러기에 이것 '프로소우폴램시안; 외모로 판단함'이 사랑과 상치된다는 야고보의 이야기는 옳다.

 

"8절. 너희가*****최고한 기법을 지키면" ;  먼저 여기에 나오는 법 (law)이란 말을 단순히 원칙 또는 명령과 대등한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지킨다는 것'을 흔히 말하는 대로 '엉터리 수작을 부리지 않고' 정직한 마음의 순정을 바쳐 그것을 지키는 것을 보고 싶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인 순종과 반대된다.  '최고한 법'이라는 것은 꼬불꼬불하고 복잡한 사잇길에 비해 훤히 탁트인 대로를 두고 말하는 표현이다. 더우기 이것은 그들이 이웃에게 꾸밈없는 사랑을 베풀고 자유로운 사람의 신분을, 아니 왕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데도 부자들에게 비굴하게 아첨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그중에서 그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그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을 것이다"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라는 귀절에서 말하는 율법은 본래의 (율법(Law)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동료 인간들을 영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지만 대다수를 제쳐 놓고 소수만을 위하는 자는 더구나 더 나은 사람들 앞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여자들올 우선적으로 취급하는 자는 거룩한 계약을 파기하며 창조의 질서를 의곡하는 자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을 가리켜 범죄자라고 부르는 것은 잘한 일이다.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예외 조항이 첨부된 순종은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우리들 멋대로 그의 율법에서 어떤 항목을 삭제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용되지도 않았으며 단편적인 순종을 원치 않으신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 엄격한 교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마치 이 교의에는 모든 죄는  죄인에게 동일하다는 식의 스토아 학파의 역설이 담겨 있다는 뜻이요, 그리고 이 교의는 일생에 걸친 죄악이나 단 한 가지 과오나 동일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 보면 사도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각 경우에 있어서 그의 동기를 살피도록 해야겠다. 여기서 그의 의도는 이것이다. 곧 우리가 한 항목만 특별히 중하게 여기고 나머지는 소홀히 여길 때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있어서 우리의 임무를 공평하게 행사하지 못하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금이 간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칙은 하나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일관성 있게 유지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나로 묶어 놓으신 것을 떼어 놓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그렇다면 곧 여러분이 하나님께 올바른 순종을 드리고자 한다면 공평하게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시라. 가령 어떤 재판관이 열 명의 도둑을 처벌하고 한 사람은 놓아 준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이 비뚤어졌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요, 죄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곧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정죄한 것을 어떤 사람에게서는 용서하는 것이다.

 

이제 야고보의 논리를 이해하겠는가 ?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중에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을 예외로 접어 둔다면,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순종한다해도, 그 하나 때문에 율법 전체를 범한 것으로 정죄를  받는다는 말이다. 이 결론은 여기서 다루는 상황에 적합하도록 내려진 것이지만 일반적인 원칙,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활의 원칙을 규정해 놓으셨는데 이것을 우리는 도끼로 찍어 내 버릴 수 없다는 것과 관련된다.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 21)"는 말씀이 율법의 한가지 항목을 두고 한 말일 수 없는 것은 율법은 전체적인 순종에만 그 보상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콜라 학자들이 소위 말하는 부분적인 정의나 도덕에도 공로가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 귀절과 다른 많은 귀절이 보여주는 것은 율법의 전체적인 준수를 떠나서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11. ~~~~~ 하신 이가 또한"  :이것은 앞 귀절에서 말한 것, 곧 우리는 개별적인 계명보다는 율법 제정자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 속에 한 몸을 이루어 담겨 있다. 율법의 한 가지 항목을 범하는 그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의를 파괴하는 자이다. 더우기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부문에서 뿐 아니라 특별한 조목에 있어서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고자 하신다. 어느 한 조목이라도 범하는 자는 율법(Law)의 범죄자이다. 이것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27p 26)는 말씀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에게 있어서 율법에 대한 범죄는 모든 조목에 있어서 죄를 범하는 것과 동일하다.

 

"12. 너희는~~~~말도 하고" ;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법정으로 소환하고 있다는 것이 한 가지 해석이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의 심판이 닥쳐오지 않는다 해서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사면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므로 모든 언어 행동이 바로 이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것 이라는 경고의 구실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환은 듣는 자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자유의 율법'이라는 말을 써서 그 엄격성을 제한하고 있다. "무릇 율법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로 있나니" (갈 3:10)하는 바울의 말을 명심해 보시라. 율법의 심판은 그 자체가 영원한 사망에게 율법의 대한 선고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우리가 어떤 가혹성에서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는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아고보는 다른 요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곧 너희들이 율법의 가혹한 벌을 당하지 않으려면 너희들의 이웃에 대해서 더 이상 잔혹하게 나오지 말아라 하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의 율법이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 시켜 주는 하나님의 사면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장과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연약성에 대해서 관용을 보이라는 한 문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식의 논법은 아주 타당하다. 곧 우리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율법의 가혹한 적용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므로 우리도 같은 길을 밟아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과격하고 잔혹하게 배격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에 가서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자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3. 심판이 있으리라" ; 이것은 야고보가 마지막 문장을 자기 주제에 적용시키는 것이요 내가 제시한 두 번째 주석을 확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인 만큼 .우리로서는 이 자비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는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그는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인정과 친절한 행동에 대한 훌륭한 자극제이자 우리가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롭게 나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러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자들------이들에게 하나님은 자비롭고 사랑스런 아버지가 되고자 하신다 ----- 이 땅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 36)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도에서,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 보여 줄 것을 원하신다는 뜻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배척을 받는 것보다 더 가혹하고 무서운 일도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인간은 용서에서 도피처를 찾지 않을 때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되고 만다.

 

"긍휼은~~~~~자랑하느니라" ; 우리는 "또, '우리를 심판의 공포에서 구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자랑한다' 는 말은 승승장구하고 탁월하다는 뜻이시다 자비가 가져 오는 위로가 없다면 세상은 사망선고 아래 놓여 있게 된다. 여기에 자비라는 특성 속에 그 것을 베푸는 사람이 암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난해한 억지 해석이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심판의 공포가 사라질 때 승리를 가져오고 한 손으로 그 나라를 차지하는 하나 님의 자비이다. 물론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말하자면 그의 자비에 자리를 비켜주고 전자가 가져 온 포위를 후자가 풀어버리는 것을 볼 때 이 순간부터 우리의 확신과 자랑(boast)은 시작된다는 점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