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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야고보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약2:5)

1. 성경 (약2:1 ~ 7)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1)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3)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4)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5)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6)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7)

 

2. 묵상 (Calvin선생주석)

얼핏 보기에 이 권고는 난해해 보이고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인간 사회의 임무 가운데서 세상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문제는 소홀히 다룰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외모를 인정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못한다면 노예들은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바울은 자유인이나 노예를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가 통치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들을 때 이런 문제는 해결된다. 그는 부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만을 일방적으로 지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탄하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모든 것을 사랑의 임무에 포함시키는 귀절에 가보면 더욱 더 분명해진 것이다. 부자는 추켜올리고 가난한 자에게는 상처를 주는 그러한 차별 대우가 규탄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겠다. 문맥을 읽어 보면 이 점이 실제로 드러난다. 물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부자들만 존경하는 것은 이기적이요 헛된 경의이다. 이 세상의 외형만을 생각하다 보면 이기심과 허영이 판치기 마련이다.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자가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취급 받는다는 원칙을(시 15: 4) 우리는 명심해야겠다. 그러므로 부에 대한 존경이 너무 지나치게 된 나머지 악인들에게는 존경을 산적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무례한 자들이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문장만을 따로 떼어서 "자신의 자리를 부자에게 양보하는 것은 조직적 악이다"하는 식으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황당무계한 소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부자에게만 경의를 표하고 가난한 자는 깔보며 창피를 주는 것은 죄악이다"하는 뜻으로 읽을 때 이것은 올바르고 참된 가르침이 될 것이다.

 

"1. 믿음을~~~~~~~시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사람 차별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병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한 몸을 이루며 이몸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집주 광선이 이 세상의 명사들에게만 비추고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 그대로 묻혀 둔다면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징조이다. 나는 에라스무스처럼 '테우스 독세--스'의 뜻을 너희들의 평가에 따라 (in your estimation) 라는 뜻으로 취하고 싶다. 물론 영광 중에 있는 이라는 뜻으로 보는 고대 주석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헬라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관련시켜도 본문의 문맥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우리의 눈이 그리스도의 광채를 대하게 되면 온 세상의 영광은 곧 자취를 감추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의 영광 밖에 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의미도 여기에 아주 잘 어울린다. 재물이나 명성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한, 맨 :윗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한 진리는 억제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존경을 받는 자리라는 뜻이다.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 이것은 긍정문으로도 의문문으로도 받아 들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사실상 동일하다. 그는 그들이 이런 비열한 행동에 만족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의문문으로 본다면 이런 될 것이다. 곧, "너희들 자신의 양심은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며 다른 심판관이 너희들에게 계시지 않을 줄 아느냐? "라는 뜻이다. 또 긍정문을 택한다면 의미는 여기에 너희들에게 또 다른 불리한 증거가 있다. "너희들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너희들의 생각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비열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구나"하는 뜻 이 될 것이다.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  그는 두 가지 논법을 써서 그들이 가난한 자들은 멸시하고 부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추켜 세운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그가 영화롭게 한 자들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고귀하게 여기시므로 이들을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칙에 어긋난다. 두번째는 일반적인 체험에서부터 말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괴롭힌다.그런데 이런 거친 행동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이 가난한 자들, 곧 실제로 우리를 도와주고 해를 끼치지 않는 가난한 자들보다 이런 자들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가난한 자를 택하사" ;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들어 쓰시는 것은 부자들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이다.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7) 이것이 바울의 관찰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에게 그의 은혜를 동일하게 부어 주시지만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신 것은 위대한 자들은 자화 자찬을 그만 두고 비천한 자들의 그들됨을 모두 하나님의 자비의 덕으로 돌리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이렇게 해서 양쪽이 다 같이 온건하고 올바른 자세를 갖도록 연단 되는 것이다. '믿음에 부요하다'는 말은 그들이 믿음이 남아 돌아 갈 정도라는 뜻이 아니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요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고 자신을 후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각각 하나님의 은사를 소유하는 정도는 그들의 믿음의 분량에 정비례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우리의 팔을 벌린다면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듬뿍 안겨 주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나라를 '약속하신'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 약속이 그들의 사랑에 의존한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가 영생을 소망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은 '부름받은' 우리들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 한 가지 조건 하에서이며, 이 목표를 위해서라는 점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뜻에서이다. 주목할 점은 그것이 목표이지 시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6.  부자는~~~~~~아니 하느냐" ;  그는 돈 많은 계층의 부당한 지배를 빗대어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수심을 불러 일으키며 그들에게 행패를 당한 사람들은 똑같이 돌로 치면 돌로 치고, 떡으로 치면 떡으로 치라는 식으로 선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반대하는 원수들에게 항상 선대하라는 명령만 듣고 있는가?  아니다. 이것은 야고보의 뜻이 아니다. 그는 단지 가난한 자들을 처형하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할 필요도 없으며, 자기들 편에 있는 사람들, 아니 적어도 자기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칠 만한 이유도 전혀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을 뿐이다. 특별히 호의를 베풀 이유도 없는데 단지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부자를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허영에 가득찬 노릇인지 모른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부당한 처사와 행패를 당해서 손해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들 앞에서는 여전히 아첨을 하고 아양을 떠는 모습이란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공정과 절도를 지키는 부자, 곧 추잡한 경기를 전혀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 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리고 많지 않다. 전반적인 생활의 체험이 가르쳐 주는 것은 야고보가 말하는 그대로이다. 인간들은 비행을 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힘을 발견한다. 따라서 그런 짓을 많이 행할수록 .그는 더욱 악하게 되고 그 만큼 더 자기 이웃을 혹독하게 다루게 된다.  부자들은 스스로 크게 삼가는 가운데 자기들 계층에 너무도 만연하고 있는 이 오염을 피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7. 그 아름다운 이름~~~~" ; 이것은 그들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고백한 신앙 때문에 신자들을 그렇게 부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령 조상의 이름을 그 후손에게 그대로 불러 주며(창 48: 16) 남편의 이름을 아내에게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사 4 : 1). 다른 말로 하자면 너희들이 자랑하는,  또는 너희들이 영광으로 여기며 불려지기를 바라는 그 좋은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교만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다면 분명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존경을 받기에 부적격한 사람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