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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야고보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1:6)

1. 성경 (약 1:1 ~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2)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3)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4)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5)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6)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7)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8)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9)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0)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열 두 지파에게~~~~~~" ;  열 지파가 포로로 끌려 갔을 때 아시리아 제국은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켰다. 이 제국이 후에 멸망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더욱 더 멀리 산지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유대인들은 사실 상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역만리의 거리 때문에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을 두고 이처럼 글로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미 남들에게서 적절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교의가 아니라 효과적인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상대로 쓰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나 그에 대한 신앙 문제는 다루지 않고 있다.

 

"2.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그의 첫 권고는 여러가지 시련을 그것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드리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거의 극심한 고통에 빠져 있었으므로 누구보다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들이었다. 그들의 종족에 대한 이름은 당시 너무도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는 더욱 비참했다. 그들 자신의 친족이 그들의 가장 지독한 원수였다. 물론 믿음의 확신이란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자들은 언젠가는 그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지상 생활이란 하나의 긴 투쟁이다. '여러가지 시험'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는 여러가지 역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는 신자들에게 이런 시험이 그들을 괴롭힐 때 기뻐하라는 말을 하면서 그 시험을 한가지로 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곧 한 가지 종류가 아니라 모든 종류와 모든 정도의 시험이다. 육신적인 재앙은 육신을 죽일 뿐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끝이 없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련은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더우기 우리는 여러가지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우리는 여기에 대해 다양한 치료책을 가지고 대처하는 것이 당연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이 다양한 것은 사리추구, 탐욕, 질투, 탐식, 이 세상에 대한 과도한 애착,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부지기수의 욕망들을 치료하는 데는 한가지 약만 가지고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은 모든 것을, 신용장에 기입하고 경사의 원인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 우리의 기쁨을 가로막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고 만다. 그는 역경을 침착하게 견뎌낼 것과 믿는 사람들이 왜 역경 속에서 즐거워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깨닫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의 타고난 감정은 어떠한 시험을 받든지 괴로와하고 슬퍼하기 마련이다: 고통이 닥쳐올 때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주저 앉아 울분을 터뜨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충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육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이러한 성령의 지도가 있기에 그들은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도 항상 기 뻐할 수 있는 것이다.

 

"3. 시련이~~~~ 너희가 삶이라" ;  시험이 우리에게 내리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 문장에 대한 설명이다. 쓰라린 체험을 어떻게 달콤한 것으로 여기라는 말인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기뻐해야 하는 이유를 결과부터 말하고 있다. 곧 우리의 고통은 중대한 가치를 지닌 수확, 곧 인내를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살피신다면 그는 우리에게 기뻐할 계기도 마련해 주신다는 이야기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금보다 더 귀하여~~~~~~칭찬과 ~~~~~ (벧전1 : 7)" 하는 말도 똑같은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곧 질병, 기근, 유랑, 투옥, 수치, 죽음을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그것을 악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 구원의 보조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서도 불평을 하거나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애의 보살핌에 자발적으로 내맡기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한 처사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기쁨' (joy)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바울은 '즐거움' (glory)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 : 3). 다음 귀절에서  그는 연단을 세째 자리에 두어 인내의 결과로 취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것을 첫째 자리에 두어 원인으로 취급하는 야고보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해결된다. 곧 바울은 이 단어를 능동적인 의미로 야고보는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의미는 연단을 받는 것은 인내를 결과로 낳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지 않고 태평하게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에게는 담대하게 악을 맞서는 데 꼭 필요한 인내가 없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바울의 의미는 이것이다. 곧 실제로 악을 극복하는 경험을 통해서 위기 상황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도움의 가치를 파악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그 의미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우리는 장래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게 지켜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와 더 접촉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이 굳어진다는 뜻이다. 바울은 소망이 그런 .연단--곧, 신령한 은혜의 체험-- 에서부터 발원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망이란 그런 단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점차 자라는 가운데 힘을 얻기 때문이다. 양자의 교훈은 여러가지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란 역경이 인내를 초래한다는 것을 쉽게 깨닫지는 못한다. 바울과 야고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신실한 자들은 고통의 도장에서 인내를 배우지만 불경건한 자들은 마치 바로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고통에 몰려 더욱 더 광적인 상태에 빠 져 들고 말기 때문이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우리는 가끔 담대하게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기분이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견인이 필요하다. 진정한 인내란 끝까지 견디는 것이라는 점이 그의 지론이다. '온전히 이루라'에서: '이룸' (work)이라는 말에는, 결과의 의미가 담겨 있으니 한 가지 사건에 있어서의 승리만이 아니고 일생에 걸친 끈기이다. 완전이라는 말을 마음의 성실성으로 취급해서 가면을 쓰고서가 아니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룸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을 보면 한결같은 노력으로 해석하고 싶다: 흔히 이야기 하는 대로 우리는 처음에는 영웅적인 체하다가 곧 녹초가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우리가 완전 무결하기를 바란다면 끝까지 버틸 것을 권하고 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는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고 녹초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그의 말에서 곧 설명되고 있다. 초조감에 사로 잡힌 자들은 어디엔가 꽝하고 부딪쳐 끝내 산산조각이 되고 말 것이다.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재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 모든 이해가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지혜를 주십사 하고 기도하라는 부탁이 여기에 실려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지혜라는 말을, 만약에 우리가 교의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 그의 영의 조명을 우리에게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통의 매서운 통증을 충분히 가라앉히는 유일한 생각은 몸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구원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위로를 찾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절망에 굴복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실제로 언제든지 대책을 준비하 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 주실 때,  우리는 당장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을` 그에게 기도로 요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귀절에서는 '지혜'를 모든 재앙에 직면해 있을 때 하나님께 굴복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곧 모든 점을 감안해 보면 그가 만사를 우리에게 유익하게 정리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올바른 이해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왜 '누구든지'라는 말을 써서 마치 모두가 이런 지혜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 는가?  대답은 이것이다. 곧 본성에 있어서는 모두가 부족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분별의 영을 .부여받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역경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므로, 사실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야고보는 이 기회를 빌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 오신다는 점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러한 지혜가 그들에게 허락되도록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경계를 요하고, 이런 기도를 해야 할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조금 앞서 있겠지만 아직 목표에 비하면 훨씬 뒤지기 때문이다. 오직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시작을 위한 기도냐 증대를 위한 기도냐 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고 우리의 궁핍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 여기에 모든 사람이란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은 텅빈 그대로 말라 죽어도 마땅하다. 그러나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기도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참 인상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혜택에서 자신을 고립시켜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직접 그것과 관련된 약속이 따르고 있다. 명령 속에 각자의 임무가 들어 있듯이 이 약속은 그들이 그 약속 성취에 있어서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 76:[7, 11:9)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이다.  '후히'라는 말은 주는 데 있어서 즉각성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역자들의 너그러운 마음을 요구하고 있다(롬 12 8).  또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는 구제를 논하면서 그는 동일한 단어를 서너 번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계시며  어느 누구도 따돌림을 받거나 푸대접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결코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얼굴을 찌프리면서 우물쭈물하는가 하면, 내놓으려던 것마저 도로 집어 넣으며 이걸 낼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장시간에 걸쳐 자신과 논쟁을 벌이는 구두쇠나 불평군들과 전혀 다르시다는 이야기이다.

 

"꾸짖지 아니하시는" ;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에게 너무 자주 졸라대는 그것이 아닌가 하고 겁낼 경우에 대비해서 덧붙여진 표현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제아무리 도량이 큰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이 빈번하게 도움을 요청할 경우에는 지난번 기부금을 생각하면서 다음에 와보라는 식으로 핑계를 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친구가 아무리 관대하더라도 너무 졸라 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비교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이다. 그는 옛 축복 위에 새로운 축복을 ,산적 해 놓고 무한히; 아무런 계산 없이 기다리시는 것이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  기도에는 순서와 방법이 있다는 것이 그의 첫째 교훈이다. 말씀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기 전에는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곧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믿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은혜를 소망스럽게 바라본다는 증거이다.  약속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의 기도란 겉치레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할 것을 당부하고서 곧장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요구하는 바를 받을 것을 확신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는 사랑에 대한 확실성과 어깨를 같이 한다. 여기 διακρνеσθαι(디아크리네스다이)의 본래 뜻은 중재하는 입장에서 어떤 문제의 양면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문제에 있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단번에 주신 약속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의심하는 자는~~~~~~" ;  그는 비교하는 의미에서 믿음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주저하는 지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벌하시는가 하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근심,  걱정으로 자신들을 속으로 괴롭힐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란 하나님의 진리에 정착하기 전에는 잔잔한 바다를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는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우리가 성취할 것이다 라는 자신이 없어도 그저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톨릭의 못된 가르침을 뒤집어 엎는데 가장 훌륭한 귀절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때만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원칙이어야 마땅하다.  물론 우리는 육신의 연약성 때문에 여러가지 덫과 같은 시험의 공격을 받아 우리의 확신을 손상 받기도 한다. 육신의 의기소침과 경악에 영향을 입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종류의 시험은 신앙으로 극복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일단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고 나면, 폭풍이 불어 닥쳐도 흔들리기는 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땅에 밀착되는 것과 같다.

 

"8. 두 마음을 품어~~~~~~자로다" 이것은 위선에 대한 일반적인 단평을 담고 있는 구별된 문장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앞서의 교훈에 대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하나님의 한 마음을 인간의 두 마음과 암암리에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풍요함을 우리에게 차고도 넘치게 주시는 만큼 우리로서는 마음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것을 받아 들여야 마땅하다. 스스로 이런 저런 고리로 자신을 얽어 매는 의심하는 자들을 가리켜 정함이 없는 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사람들은 결코 한 가지 일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육신적인 자만으로 기고만장해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깊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이다.

 

"9. 낮은 형제는~~~~~" ; 바울이  (고전17 22) 종들을 상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단의 속박에서 풀려난 하나님의 자유인인 만큼 자신들의 처지를 침착하게 견딜 것을 권하면서, 그와 동시에 상류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점을 생각할 것을 경고하듯이 우리의 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입양을 자랑으로 여기도록 하면서 부자들에게는 세상의 허무를 발견하여 제 위치로 돌아갈 것을 지시하고 있다.그는 전자가 자신들의 비천하고 억눌린 상태에서 만족하고 후자는 자신들의 교만을 억제하기를 바란 것이다. 우리에게는 천사들, 아니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누릴 비길 데 없는 최상의 영광이 있는 만큼 하나님의 선하심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난, 수욕, 헐벗음, 배고픔, 목마름, 그 어느 것도 그런 사람의 마음에서 이 확신의 힘을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곧, 주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이미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보다 못한 것은 없어도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형제는 하나님의 값없는 입양이 주는 완전하고도 충분한 보상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는 것과 그리고 현재의 가난한 생활을 두고 너무 가슴 아파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 이것은 특수한 것을 들어 일반에게 적용하는 경우이다. 이 경고는 신분, 가문, 기타 외형적인 면에 있어서 이웃보다 뛰어난 사람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는 이들에게 번창이 뿜어내는 헛된 생각을 억제하는 뜻에서 자신들의 낮음과 외소함을 두고 자랑하라고 당부한다. '낮은'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게 될 때 이 세상을 과소평가하게 되며 지금까지 크게 칭송을 받던 것이 실제로는 중요한 것이 아니요, 더없이 하찮은 것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즉 가난한 자들의 교사이신 그리스도에게는 육신의 교만을 아예 묵살해버리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이다. 부요한 자들이 세상의 헛된 열락에 도취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육적인 영광을 상실하는 거기에 그들의 영광이 담겨 있다는 것을 몸에 익히도록 권하고 있다.

 

"풀의 꽃과 같이" ;  나는 야고보가 어느 정도 이사야의 말(40: 6)과 비교해 가면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점까지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선지자의 증거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선지자는 재물의 혜택과 이 세상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체 인간, 곧, 몸과 영혼 모두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관심은 금전과 재산에 대한 전시에 있다. 한 마디로 순간적인 재물에 대한 자랑은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철학이 가르치는 것도 동일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귀를 열어 하늘나라의 영원성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전에는 철학만으로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곧 이 교의의 시발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대열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표준 독법은 '엔 타이스 포레이아이스  :그의 행하는 길에 있어서' 이지만 나는 에라스무스와 함께 이중복모음 없이 그냥 '포리아이스'로 읽어서 '그의 재물에 있어서' 또는 '그의 재물과 함께' 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