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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야고보서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5:16)

1. 성경 (약5:7 ~ 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8)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9)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0)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1)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12)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3)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4)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5)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6)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7)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8)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19)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2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7. 그러므로 ~~~~~ 길이 참으라" ; 이것은 지금까지 부자들을 두고 말한 모든 것이 당분간 폭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 대한 위로라는 점을 명백히 드러내 보여준다.. 부자들을 위협하는 재앙의 ,이유로서 그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교만하고 매정한 지배를 설명하고 나서, 그는 곧장 부당한 처사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자인 만큼 그들이 인내해야 할 진정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라는 말의 의도는 바로 이것이다. 곧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혼란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 는 것은 주님께서 오심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의 질서를 바로 잡고야 말 것이 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을 다해서 기다려야 한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약속의 본질은 보편적인 회복이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날을 가리켜 심판의 날로서', 그의 백성에게는 도움과 은혜가 계시되고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징벌이 드러나는 날이라고 자주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이 귀절을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문맥으로 취하고 싶다.
 
"보라 농부가~~~~" ; 바울도 이와 동일한 비유를 디모데후서 2장 6절에서 이야기하면서 농부는 '추수하기 전에 먼저 수고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야고보는 이것을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농부의 오랜 인내를 묘사하고 있다. 곧 그는 씨앗을 흙에 묻고 나서 아무 걱정 없이 ,추수 때까지 기다린다. 그는 땅이 당장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추수기인 주님의 나타나시는 날까지 우리의 씨 뿌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가운데 기다려야지 너무 초조해서는 안된다. 
 
"귀한 열매~~~~~" ;  '귀한'이라는 형용사가 여기에 덧붙여진 것은 자양분, 곧, 생명을 유지하는 힘을 표현하는 뜻에서인 것 같다. 야고보의 의도는 이것이다. 곧, 농부가 자기에게 귀중한 씨앗이 땅 속에 묻혀있는 것을 허용하며 추수기까지 자기의 욕망을 참을성있게 억제하듯이 우리도 침착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속의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너무 성급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이 비유에 있어서 나머지 부분을 상세하게 낱낱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이른 비와 늦은 비~~~~" ;  이른 비란 파종 후에 오는 비요, 늦은 비란 곡식이 영글 때 오는 비를 말한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언제 비가 내릴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할 때 사용했던 언어요, 모세가 약속한 것이기도 ,하다(신28:12, 욜 2 : 23, 호 6 : 3 참조), 야고보가 이 두가지를 다 기록하는 것은 농부들이 그처럼 오랫만에 오는 비를 두고도 실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역력히 보여 주려는 뜻에서이다.
 
"8. 마음을 굳게 하라~~~~~" ;  구원의 시기가 너무 오래 지연되지 않느냐면서 반박하지 않을까 해서 그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곧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어 소망을 견디지 못하게 할지도 모를 연약한 마음을 굳게 바로 잡으라는 말을 하고 있다. 시간이 너무 오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더 나은 근원에서, 곧 주님의 가까운 강림에 대한 소망에서, 아니 실제로 가까와 오는 그 광경을 보고 힘을 얻어 굳게 지켜야 한다.
 
"9. 서로 원망하지 말라~~~~~" ;  우리 주변에는 항상 자기들이 남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라는 이 야고보의 교훈을 두고 설령, 남들이 더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 해도 남들을 시기하거나 당황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주석은 다르다. 야고보는 지금까지도 온건하고 화평한 사람들을 주물러 쥐어 짠 독재자들의 비참한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신실한 자들로 하여금 서로를 동일한 위치에서 취급할 것이요 잘못을 용서하는 가운데 관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계속적인 논리의 흐름은 이것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다. "서로 다투지 않아야 모두가 심판을 면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설혹 우리에게 고통스런 불행이 닥칠 때 원망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원망은 서로 불평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상대로 대드는 원망이다.

 

이러한 결과는 모두가 저주받게 되는 일 뿐이라는 점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사실 자기 형제를 헐뜯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불평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차례로 서로 서로를 욕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에게든 상처를 입히지 않는 흠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게 되며 하나님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심판관이 되실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인 결과는 자기들이 남에게 저주한 심판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일이다. 모든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통곡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똑같은 재앙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아무도 남에게 재앙이 내리도록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그런 무분별한 행동을 중지시키려는 뜻에서 그는 심판관이 문 앞에 서 계시다는 점을 그들에게 기억시켜 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가운데 더 없이 하잖은 실수를 보고도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소서 하고 요청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몰지각한 기질을 억제하는 데는 우리의 저주가 허공에서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심판이 문앞에 다가섰다는 생각으로 고삐를 잡아매는 것이 상책이다.
 
"10. ~~~~본을 삼으라" ;  그가 여기에 적용하는 위로는 "거지에게는 거지가 도움이 된다"는 속담의 수준은 아니다. 그는 고통을 받는 동료로서 우리가 그 대열에 끼고 싶어하는 자들의 이름을 대고 있다.  이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구걸일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금까지 당하지 않았던 고포통이 우리에게 1977년에 닥칠 때 우리는 큰 슬픔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고통은 그들이 당한 고통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거기에 아니, 그들이 메고 갔던 그 동일한 명에를 우리가 메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거기에 큰 위로가 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욥 5 1) "거룩한 자들을 돌아 보게, 어느 누구하나 자네같은 사람이 있는가? " 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그를 절망에 빠뜨리려는 사단의 음성이었다. 이와 반대로 성령께서는 야고보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력한 소망을 채워 주시고자 한다.

 

곧 그는 앞서 간 성도들 모두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들의 본을 받아 동일한 고통을 견뎌낼 것을, 아니, 이겨낼 것을 권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있다. 인생이란 누구나 괴로움과 고통을 받기 마련이지만 야고보는 전반적인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휩쓸려, 멸망하고 말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을 예로 보여주고 있으니 그들과의 교제는 축복이다. 비참한 감정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몰락하게 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불운으로 여기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큰 위로 가 아닐 수 없다. 육신의 이해로서는 이것이 생소하겠지만 신실한 자들은 그들이 여러 가지 시련으로 주님의 단련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축복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의 요점을 강조하는 뜻에서 '선지자들을 예로 들면서 그들의 고통의 결말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있다. 고통을 반고 있는 현장에서는 슬픔과 비애, 그리고 갖가지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마치 칠흑같은 구름과 광풍만이 기승을 부리는 속에서 시달리는 가운데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을 다른 데로 돌려서 더 맑은 하늘, 잔잔한 하늘을 찾아 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 어느 누구도 복된 그들을 비참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 본을 보여 줌으로써 무슨 시련을 받든 인내와 소망을 상실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이것을 깊이 생각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고통을 받은 선지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인내로 이겨냈기 때문이라는 원칙을 그는 여기서 제시하고 있다. 우리도 고통을 받을 때 동일한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겠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 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인준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고통을 면해 주는 것이 유익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받지 않게 지켜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곧 이 고통이 신실한 자들에게 유익하다는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들이 선지자들의 고통을 본 받고 거기에 인내를 덧붙여 생각할 것을 원하고 있다. 이 인내는 우리의 순종에 대한 진정한 증거요 그는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요구하고 있다.
 
"11. 욥의 인내~~~~~" ; 지금까지는 선지자들을 전반적으로 알지만 이제는 그들 가운데 뛰어난 모범이 되는 사람을 예로 들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어느 누구도 그처럼 가혹하고 다양한 고통을 받은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그 깊은 심연에서 빠져 나왔다. 누구든지 그의 인내를 본 받는다면 마침내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을 구원하러 오는 것을 틀림없이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가 기록된 목적을 고찰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을 인내로 이겨낸 그의 종들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이처럼 어느 누구의 인내도 무의미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겠다. 그러나 혹자는, 아니 무엇 때문에 지독한 재앙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상당히 인내성 없는 표정을 보였던 욥을 그 사도는 그렇게도 칭찬했는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비록 연약한 육신 때문에 실망하는 가운데 실제로 혼자서 끙끙거렸지만, 그는 결국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하였으며 그의 견지하는 팔에 자신을 내어 맡겼다. 그 러므로 가끔 그의 인내가 부족한 면이 보이지만 그는 칭찬을 받을 만했다.
 
"주께서 주신 결말~~~~~" ; 고통은 항상 그 결말을 보고 평가되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고 사단은 제멋대로 우리에게 겁을 주는가 하면 우리의 육신은 우리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만큼 우리는 더 먼 곳을 내다 보아야겠다. 그리고 주께서 :주신 결말'이라는 말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역경을 '행복한 결말로 뒤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하고 인내하는 임무를 다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마치고야 말 것이다. 우리 편에서 소망을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고통을 일반는 동안 내내 그처럼 가혹해 보이고 엄격해보이던 하나님께서는 끝에 가서 '오히려 더욱 더 자비롭게 나오실 것이다.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 이유없이 또는 무분별하게 맹세하는 것은 거의 모든 세대에 걸쳐서 공통된 죄악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생각은 악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하는 것을 극악한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공경할 것을 엄숙하게 명령하고 있는 만큼 사람들은 벌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여러가지 위장된 맹세를 고안해 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명확히 들먹이지 않는 한 해로울 것이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그들이 늘 쓰는 수법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한 것이 아닌 만큼 그것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항상 잔꾀를 부리며 하나님 앞에 연막을 치는 자들은 사실 하찮은 구실로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리석음을 마태복음 5장 34절에서 호되게 꾸짖은 바 있다. 거기에 따라 '야고보는 자기 선생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이런 저런 귀절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맹세하는 것을 삼가라고 권하고 있다. 사실 무슨 말로 분장을 하든 쓸데 없이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들먹이면서 맹세할 수 없듯이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거기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유를 제시하시고 있 다. 곧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에 새겨져 있으며 그의 빛은 모든 곳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들먹이는 대신 하늘 이나 땅을 들먹이면서 맹세하는 것은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하 는 것은 결과적으로 피조물의 조물주를 들먹이는 처사이다.

 
'무엇보다도 '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라는 뜻이다. 재세례파 사람들은 이 귀절을 핑계로 모든 맹세를 정죄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야고보는 넓은 의미에서의 맹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양자는 사실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지목하지 않고 맹세하려는 마음에서 율법을 기만하려고 고안해 낸 잘못된 주장을 반박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율법의 금지 사항과 정반대되는 처사이다.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는 말은 이 점을 아주 명백하게 만든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이런 표현에서 그치고 말겠는가?

 

그리스도와 야고보의 말씀 속에는 우회하는 한, 아무리 맹세해도 곤란한 지경에 빠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꾸중이 담겨 있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야고보의 내용을 제대 로 이해하려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는 율법의 가르침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적합한 용법은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해 주고 있다. 율법이 정죄하는 것은 빙 둘러가면서 말함으로써 그 이름을 남용하려는 처사이다.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 위에 언급한 상황을 교정하 는 데 있어서 제시한 처방은 아주 효과적이다. 그것은 모든 말을 할 때 진실을 말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습관은 인간생활의 허영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평범한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데서 야기된다. 우리의 말이 정직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런 모든 불필요한 맹세는 쓸데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신뢰성의 결여, 그들의 모순이 타락한 맹세의 습관을 불러 일으키는 근원이다. 그래서 전자를 제거하려면 후자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이다. 질병의 치료는 그 원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에는 "너희 말이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가 되게 하라"하는 식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번역한 것이 올바른 독법이요 실제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말에 있어서 진실되고 일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를 '아니오'로 바꾸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시작한 그 동일한 주장을 고수했노라고 증거하고 있다(고후1:17-18).
 
"정죄 함을 면하라" ; '아포크리신' 과 '휘포크리신'의 비슷한 발음 때문에 여러가지 독법이 생긴다(2). '심판으로'나 정죄에로 읽는다면 그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불러놓고 벌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위선에'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솔직한 거래가 성행한다면  진부한 맹세는 필요 없게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말에 있어서 신실과 일관된다면 무모한 명세의 원인인 핑계가 사라지고 말것이다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부르지 않는 때가 없다는 뜻이다. 고통을 받을 때는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고 번영을 누릴 때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은 어찌나 타락 했던지 자신들의 번영을 즐기다가 하나님을 망각하게 되고 말며 고통을 당할 때는 완전히 절망 상태에 빠지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마땅하다. 곧 우리로 하여금 때때로 하나님을 잊게 하는 번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언할  수 있는 소지를 찾아야 하며 고통을 받을 때는 기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찬송하다' 는 말은 속되고 타락한 자들을 하나님께로 결코 인도하지 못하는 그들의 저속한 환락과는 대조를 이루는 말이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  당시에는 아직도 신유의 은사가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병들었을 경우 이 방법을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모두가 치유된 것은 아니요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때에 한해서 이 은혜를 허락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기름을 바르는 일도 무분별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나을 가망이 확실히 있는 경우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사역자들은 치유 능력과 함께 이 상징을 남용하지 않도록 분별력을 받았다. 아고보의 유일한 의도는 당시 신실한 자들이 받아 누릴 수 있었던 이 하나님의 은혜를 추천함으로써 그것을 멸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가운데 그 혜택을 상실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장로들(presbyteros)을 청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도유는 성령의 초과적인 작용에 국한되어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소위 말하는 종유() 의 비적()이란 것을 팔아 먹으려고 이 귀절을 잡고 늘어지면서 법석을 떤다. 야고보가 말하는 옛날 의식(institution)과 그들의 타락한 변형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취급할 것이 못된다. 독자들은 <기독교 강요>에 보면 이것이 취급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넘어 갈 점은 이 귀절을 어리석게 곡해()하는 나머지 '종유의 비적이니, 또는 성사의 의미를 갖다 붙이며 이것이 교회에 영원히 남아야 할 것처럼 이야하는 것은 잘못이 라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거기에 성례적인 성격이 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그렇다고 기름을 약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 이 상징의 진정한 효력은 그 시대를 지나서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상징은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 점은 명백하다. 허망한 것을, 그리고 더 이상 그것이 상징하는 본질을 제시하지도 않는 것을 가리켜 성례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있을 수 없다. 신유의 은사가 일시적이었다는 점을 다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여러 사건 그 자체가 확증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그것의 상징 또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도유식'을 오늘날 여러 성례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백년 전에 세상에서 거둬 가신 그 효력을 가져 오지 못하고 있는 만큼 그들은 사도들을 본받는 자들이 아니라 원숭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도유가 언제 성례로 취급된 적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 사회에서 사용될 수 있는 방법으로 주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하는 본질은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이 확실한 만큼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겠다.
 
"교회의 장로들" ;  이것은 교회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목사들만 장로 (presbyteri)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질서를 바로 잡도록 선택 받은 감독관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각 교회마다 믿을 만하고 온전한 인품의 사람으로 구성된 준 의회가 있었다. 탁월한 은사를 부여 받은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그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뛰어나게 작용하던 장로들을 초청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어떤 사람을 두고 기도하는 예식의 목적을 말하자면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상황이 잘 맞아 들어 갈 때는 기도에서 큰 힘을 얻기 때문이다. 엘리야(왕하 4 34), 바울(행 20 10), 그리고 그리스도(요11 : 4142), 이들 모두는 이런 행동으로 기도의 열정을 불러 일으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칭송하고 있음을 비교해 보시라. 야고보가 어떻게 기도에 약속을 더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기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 1장에서 보듯이 주저하는 간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올바른 태도도 아니요, 구하는 바를 받을 자격도 없다.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는 자는 자기가 헛된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야고보는 단지 외적인 의식을 한가지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올바른 도유식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다. 가톨릭 교도들이 행하는 도유식이란 사실 무근한 것이요 거기에 무슨 은사가 포함된 것도 아닌 만큼 그들의 습관은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 점이다.
 
"15.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  이것은 하나님께서 환자에게 신체의 건강 이상의 큰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질병이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 부과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그는 사죄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질병의 원인이 제거될 것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병마에 시달릴 때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지 않았던가?  그가 당하는 고통에서 자신의 죄책의 결과를 깨닫고서,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것을 그만 두실 때만이 자기의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보지 않았던가 ? 인간들이 자신들의 비행의 죄책에서 해방될 때 질병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가르치는 교훈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병마와 기타 불행에 대한 가장 적절한 치료책은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면서 사죄를 받는 것과 자기반성을 하는데 있어서 열심을 다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16. 서로 고하며" ; 여러 사본에 '이러므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적합하다. 설령 이것이 빠져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장로들이 위해서 기도한 환자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앞절에서 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형제들에게 들추어 내는데 있어서 따르는 혜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용서를 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귀절을 흔히들 과오의 화해로 해석해서 화목하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그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쌍방이 서로 자신의 경우만 고집하고 불화하다 보면 악 감정이 뿌리를 내리고 더욱 확고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야고보가 여기서 상호 죄를 용납함으로써 형제로서의 화목을 다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가 설명 했듯이 그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다. 그는 상호 간의 기도와 상호 간의 고백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백의 이점이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우리 형제의 기도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데 있어서 소극적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이해하는 자들은 당장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귓속으로 속삭이는 고해성사라는 그것을 기억에서 추리해 내는 가톨릭의 어리석음, 아니 이것은 사악이 아닌가? 에 대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야고보의 말을 오직 사제들만이 고백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억지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 간의 혹은, 무지하게 말하자면 전항의 고백은 자신들의 죄악을 고백하면서 반대로 남들의 고백을 들을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사제들은 그들만이 이 임무를 가지고 있으며 이 고백은 오로지 그들에게 지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들의 허황된 생각은 그것을 반박하느라고 시각을 허비할 만큼 가치가 없으므로 내가 제시한 진실한 주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이 말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여기서 가르치는 고백은 오로지 우리의 고통을 아는 자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펴는데 적극적이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이다.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남들이 우리를 위해서 올린 기도가 무익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는 뜻에서 그는 기도의 효용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기도를 가르켜 의인의 간구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접근 태도는 선한 양심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가치성에 의존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들을 제시하려면 먼저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의인들과 신실한 자들이 우리를 위해 드리는 기도에는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혜택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 맨 마지막 단어 '역사하는' (in its working)이란 무슨 뜻인가? 이것은 필요 없는 단어처럼 보인다. 기도가 우리에게 크게 보탬이 된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것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옛날 주석가들은 이것을 '꾸준하게 힘쓰는'으로 번역하지만 이것은 억지 의미를 나올 뿐이다. 야고보가 사용하는 헬라어 .'에네르구메네' 에는 글자 그대로 '작용', '역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이 기도의 문제를 이렇게, 곧 그것은 "효과가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의 기도가 좌절되거나 무익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원칙에서 시작되는 논법이다.
 
이 기도가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아주 타당한 논리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본 문맥에 한정시키고 싶다. 곧 우리가 어떤 비상 상태에 직면해서 진지한 태도로 기도 드리게 될 때 우리의 기도는 작용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는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죄악을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올 확보하려고 온갖 힘을 기울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기도를 드리게 된다.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의 기도에는 그러한 효력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인에 대한 일반적인 근거가 아니라 앞 문장의 논리와 밀접하게 연관 지어져야 할 것이다.
 
"17. 엘리야는~~~~ 사람이로되" ;  성경에는 자기가 입증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실 예가 수 없이 많지만 야고보는 여기서 아주 특출한 것을 한가지 골라 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주시느라고, 말하자면, 하늘을 그의 기도의 통제 밑에 두신 것은 특이한 사건이었다. '엘리야는 그의 기도를 통해 3년 6개월 동안이나 하늘 문을 닫아 버렸다. 그 후에 그는 다시 그 문을 열어 큰 비가 쏟아지게 하였으니 우리는 여기서 기도의 기적적인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친근하고 유명한 귀절이요 열왕기상 17장과 18장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거기에는 엘리야가 기도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가뭄과 비는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허용 되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례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검토해야겠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가뭄을 주십사하고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다 해서 우리도 그런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야고보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무분별한 열심은 몰지각하게 선지자를 본받아 이런 기도를 드릴 수도 있다. 우리는 기도의 원칙, 곧 기도는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이것이 바로 그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모범이다. 곧 엘리야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면 우리도 올바르게 드린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기도에는 한가지 법칙, 한가지 약속이 있으며 따라서 한가지 효력이 따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지 않는 점, 반신반인일까해서 야고보는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유한한)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 옛날 성도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이거나 영웅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모범에서 혜택을 입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확신을 얻지도 못하게 되고 만다. 아고보는 이런 이방적인 미신을 완전히 타파하는 뜻에서 성도들 역시 약한 육신을 입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들의 기도의 효력으로 돌릴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서 성도들의 음성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던 만큼 그들의 유전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라는 가톨릭의 변덕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가 하는 점이 드러난다. 그들의 변론은 이런 식이다. 곧 그는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기도의 응답을 받았으므로 그는 죽은 후에 지금도 우리에게 최선의 수호신이 될 것이다 라는 식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궤변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있다. 야고보의 이론은 그 반대이다. 곧 그들의 기도에 그런 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마찬가지로 그들의 본을 따라야 하며 그렇 게 될 때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20. 너희가 알것은" 원본은 '기노스케테', '너희는 아느냐' 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경우에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야고보는 형제들을 바로잡는 문제를 그 결과에서부터 시작하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열성껏 추구하게 하고 있다. 영혼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내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더 바람직한 일은 또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못하는 형제를 바른 길로 인도할 때 성취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귀한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것, 물론 이것도 그리스도께서는 귀하게 여겨주시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육체의 생명보다 영혼 구원이 훨씬 더 귀중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계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구속한 영흔들이 우리의 부주의로 멸망하고 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 서는 그들의 구원을 어느 정도 우리의 손에 맡겨 두셨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구원하시고 보존하신다. 어떤 사본에는 영혼으로 되어 있는데 어떻든 의미는 동일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더 크게 강조하는 다른 독법을 택하겠다.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  이것은 솔로몬의 말에 대한 직접 인용이 아니라 간접적인 인용이다. 솔로몬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 12) 하고 말하고 있다.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서로를 훼손하려는 욕망으로 불타고 있지만 사랑하는 자는 서로간의 많은 문제를 눈감아 주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죄악을 덮어 준다. 야고보의 의미는 한층 더 깊다. 곧 이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도 제거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죄악을 덮어 주는 것이 사랑의 열매라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지만 '가장 유익하고 훌륭한 덮음은 하나님 앞에서 그 죄악을 완전히 제거하도록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경고를 통해 죄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때 발생하는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온 힘을 끊임없이 기울여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