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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야고보서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약..

1. 성경 (약4:1 ~ 16)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1)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2)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3)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4)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5)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6)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7)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8)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9)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10)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1)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2)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3)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4)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5)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6)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17)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싸움이 어디로~~~~~쫓아 나느뇨"; 그는 화평을 논의하면서 평화가 유지 되는 방향에서 악을 제거하라는 점을 지목한 바 있다. 이제 그는 그들 스스로를 분열시켜 놓고마는 분쟁을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싸움은 정의에 대한 관심보다는 무절제한 욕심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점을 설명하고 있다. 각자가 서로 조심하면 우리는 서로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갈등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더욱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다스리는 악은 공격 부대와 같아서 싸움을 거는 게 일이다. '지체'란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을 의미하며 '정욕'이란 상대편에게 손해를 입혀야만 만족을 얻는 사악하고 애타는 욕망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이다.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 이것은 인간이 일단 사악한 욕망에 빠지면 지칠줄 모른다는 이야기 같다. 사실 그렇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고삐를 풀어 주고 나면 그의 갈망에는 끝이 없다. 아니 온 땅을 다 주어도 또 다른 세계를 차지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상상 이상의 잔혹한 고통을 스스로에게 가하는 셈이다. '시실리 독재자들에게는 질투보다 더 잔혹한 고문이 있을 수 없었다' 는 호레이스의 말은 옳다. 어떤 사본에는 '포뉴에테 : 너희가 죽인다' 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프쏘네이테 ; 너희가 시기하다' 로 읽어야 마땅하다. '죽이다'라는 단어는 본문의 문맥과 아무 상관이 없다.

 

"너희가 다투고"이것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투가 아니라 서로 남의 머리에 올라 서려고 경쟁하는 말다툼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그는 그들의 무분별한 경쟁때문에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선의 창시자로 인정하지 않는 만큼 하나님께서 이들을 좌절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원칙적인 수단 이외의 것을 동원해서 싸우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사단의 은총을 받아 보겠다는 심산이다. 그들의 노력이 허사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승리란 하나님의 축복만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  그는 계속해서 그들이 구하기는 하지만 거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망의 대리자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기도에 있어서 마져 자제할 줄을 모르고 다른 사람과 입에 담기에 창피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요청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플리니(pliny)는 하나님의 귀를 충격적으로 모욕하는 무례한 언동이라고 말하였는데 옳은 말이다. 하늘의 교사에게서 기도의 지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것이 더욱 더 용납할 수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양심마저 부정하는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히 요구하려 든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 두려움, 감사는 전혀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우리가 우리의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의도'이다. 그리고 이것을 억제하는 방법은 이것을 하나님께 굴종시킴으로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합당한 소원만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열한 논쟁, 기만, 그리고 온갖 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 나는 이 문장을 앞의 문장과 하나로 본다.  간음 하는 자들이란 이 세상의 허영으로 타락한 나머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 진 자들을 두고 사용한 단어로서 '타락한 자들'이라는 말을 여기에 쓸 수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거룩한 혼인 계약을 맺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숙한 처녀'로 남아 있기를 원하시며(고후 11:2)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부정한 애정으로 손상을 입는 것은 바로 이 정절이다. 이것이 야고보가 세상에 확대한 사랑을 간음과 비교하는 이유이다. 그의 말을 이런 식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본문의 문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를 이 세상과 결속시키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게 하는 인간의 욕망을 공격하고 있다. 

 

"세상과 벗" ;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타락한 면에 중독이 되어 노예가 되는 인간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부조화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인간이 세상을 향해 내딛는 한 발자국은 그만큼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세상을 부정하라는 명령이 반복되고 있다.

 

"5. ~~~~~~~ 줄로 생각하느뇨" ;  이 귀절은 성경에서 직접 인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귀절은 커녕 비슷한 귀절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을 곡해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그러나 세상과의 우정이 하나님과 적대적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것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교훈이다. 그는 그의 사상의 흐름을 보다 간명하게 하는 뜻에서 대명사를 생략하고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 그다지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주목하게 될 것이다.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  어떤 사람들은 이 영을 가리켜 인간의 영혼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이 귀절을 긍정적으로 읽는다. 곧 인간의 영혼은 악의적이요 시기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애정을 질투로 얼룩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영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은 주석이다. 우리 속에 거하도록 주어진 분은 그분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성령으로 보며 이 귀절을 의문문으로 택한다. 그는 시기심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나 더욱 큰 은헤를 주시나니"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시 역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질투는 악의의 징조이지만 하나님의 영은 여러가지 풍성한 은사를 통해서 너그러운 면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시기보다 그분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천박한 욕심이 판치고 서로 싸움질이나 시키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지배할 수 없는 것은 인간들에게 더욱 더 새로운 축복으로 채워 주는 것이 성령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다른 주석도 많은데 거기에 대해 논박하느라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성령께서  시기심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난해한 억지이다. 또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하는 말씀을 성령께서 시기를 바로잡는다는 뜻으로아들인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령의 은혜가 실제로 우리에게서 앙심과 질투를 제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계속적인 의미의 접속사 '데'에는 반의적인 '알라'  또는 '알라 게'의 의미도 있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아니, 그러나" 로 옮겼다.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그가 여기서 천거하고 있는 점은 겸손한 마음의 순종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 순종이 아니라 겸손하고 평화스러운 자들에게  거하는 하나님의 영을 보고 자기를 낮추라는 요청이다(사 57 15). 관계 접속사의 의미는 이 문장이 앞 내용에 대한 추론이라는 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은 풍성한 은혜를 베푸는 데 있어서 너그럽다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우리의 시기심을 제쳐 놓고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중간에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는 귀절을 집어넣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 사본도 많이 있는 만큼 에라스무스는 그것이 어떤 학자의 주였는데 후에 그것이 본문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야고보의 사상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능히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베드로에게서 인용된 것으로 보는 가운데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데 이것은 쉽게 해결된다. 나는 이것이 경구적인 표현에 속한 것으로서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널리 알려지고 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시편 18편 28절에 있는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는 말씀 그대로이다. 그 밖에 다른 귀절도 많다.

 

"마귀를 대적하라" ; 이제 그는 우리가 참여해야 할 전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살과 피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투에 가담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바울의 태도와 같다(앱 6 :12).. 그러므로 야보고는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제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사단을 우리의 원수로 제시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사단이 피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 생활의 체험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가 더 용감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예리하게 그의 압력을 받기 마련이다. 사단은 우리가 제 아무리 저항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저항하는 동안 그는 실제로 그의 능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그는 한 쪽에서 얻어 맞으면 다른 쪽에서 금방 다시 일어날 정도로 교활하다. '피하리라'에 대한 나의 대답은 '폐망하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 아무리 사단이 우리를 공격한다 해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도망할 수 밖에 없다.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  우리가 하나님께 기회를 허용하는 한 그 의로움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우리에게 또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서 떨어져 가고 있으며 그의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명분을 지켜 주신다면 우리가 실패 할 것처럼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물론 이 귀절에서 보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활동이요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따른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처럼 사도의 의도와 거리가 먼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지만, 그렇다고 그럴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명령한다고 해서, 우리를 통해서 그의 명령 한 바를 성취하는 하나님이나, 그의 능력이 훼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이고보의 유일한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기 전에는 그는 우리를 돕는 일에 있어서 결코 실수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가령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식탁으로 데려 가거나 목 마른 사람들을 우물로 데려가는 사람의 태도와 같다. 오직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의 발이 실족 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것의 방향과 도움이 하나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고보가 하나님의 접근을 이차적으로 말한다는 점을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태도에 부차적인 이것이요 전자는 후자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궤변가들이 있는데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접근 이전에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를 더욱 부요하게 하신다.

 

"손을 깨끗이 하라" ;  이 간청은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 여기서 그는 두 계층의 사람들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 두 마음을 품은자들을 예로 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편없이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죄인들로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신다"(요 9: 31)는 말씀이나, 죄인인 한 여자가~~~~~(녹: 7: 37) 하는 말씀, 또는 복음서 기자들의 "예수께서 죄인과~~~~ 함께 잡수시다"(막 2:16)하는 말씀에서 우리가 보는 그대로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마음이 타락해 있으며 생활이 천박한 사람들, 곧,  범죄자들에게 그는 마음의 순결과 생활의 청결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회개의 방법과 성격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곧 회개는 외적인 생활을 바로 잡을 뿐 아니라 영혼의 청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이요, 내면적인 회개의 열매가 건전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9. 슬퍼하며 애통하며~~~~~" ; 그리스도께서 웃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애통올 요청한 것은 일종의 재앙의 말씀이었다. 야고보도 똑같은 의미에서 바로 뒤에서 부자들에게 슬퍼할 그것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다루고 있는 그것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는 구원하는 (saving, sorrow)이다. 그가 외치고 있는 상대는 자신들의 마음이 혼미한 나머지 하나님의 판단에 대한 의식이 전무한 자들이다. 하기야 이 심판에 대한 의식의 결여 때문에 그들은 악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을 이러한 치명적인 무감각에서 일깨우는 뜻에서 그는 그들이 애통할 것을, 다가오는 패망을 보고 슬퍼하는 가운데 자화자찬을 중지할 것을,  소리쳐 외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웃음'이란 '불경건한 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마련하는 쾌락추구'로 취급해야 한다. 곧 그들은 사악한 유혹에 도취된 나머지 하나님의 판단을 망각하는 것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교만한 야망을 포기한다는 판단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서 우리를 일으킬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시기, 질투하는 것은 우리가 높아지고자 하며,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또 있 을 수 없다. 낮은 자들, 특별히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들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은 하나님만의 뜻이다. 너무 높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력을 통감하고 스스로 겸손해질 정도로 비천하게 되어야 마땅하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나무는 그 뿌리를 깊이 뻗어야 높게 자랄 수 있듯이 겸손에 영혼의 뿌리를 뻗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높음이 자신의 패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좋은 말을 남겼다'

 

"11.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얼마나 끈질기게 혹평에 대한 욕망을 꾸짖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위선자란 항상 교만하며 우리는 본성 상 모두 위선자로서 언제나 남을 창피하게 하고 회생시켜 가면서 자신을 앞세우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생각처럼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 모두가 타고난 또 다른 질병이다. 바로 여기서 야고보는 그런 오만한 자세를 꾸짖고 있다. 곧 우리는 감히 우리 형제들에게 생활 법칙을 강요하려 덤비는 것이다. 비방이란 모든 종류의 중상모략, 경멸적인 언사등 앙심을 품거나 비뚤어진 생각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명예훼손의 악은 그 퍼지는 범위가 넓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냉혹한 표현이 마치 타인의 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의 언행에 대해서 건방지게 내뱉는 우리의 판단이다. 곧 우리는 우리의 귀에 거슬리는 것은 무엇이든 부드럽게 나무라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논리는 그가 비평하고 있는 것이 이 자만심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 ;  이것은 우리가 우리 형제에 대해서 율법의 기능을 횡령하는 만큼 율법은 손상을 입는다는 말이다. 율법을 비방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존중한다는 것과 반대되는 말이다. 바울은 물론 다른 주제 밑에서지만 꼭 같은 논리를 로마서 14장에서 펴고 있다. 거기에 보면 어떤 음식에 대해서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나머지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남의 행동을 지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바울은 주님은 한 분이요, 우리 모두는 그의 명령에 따라 넘어지거나 일어서는 사람들이요, 또 우리 모두는 그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할 사람들이라는 점을 그들에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께 귀속된 기능을 스스로 갈취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야고보는 .스스로 평판을 얻을 목적으로 형제들을 저주하는 자들을 꾸짖고 있다. 곧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변덕을 신성한 율법의 위치로 올려 놓는 셈이다. 이것은 실제로 바울과 같은 이유에 입각한 꾸중이다. 곧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모두를 한 사람 예외없이 동일한 수준에 두고 보는데, 스스로 우리 형제의 생활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우리의 오만한 행동에 대한 정죄이다. 판단은 하나님의 율법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다같이 명심하자.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  이 귀절의 의미는 이것이다. 곧 네가 하나님의 율법보다 더 우월한 검열관으로서의 권위를 자처한다면 너는 율법의 지배에서 자신을 제외시킨다는 뜻이다. 이처럼 뻔뻔스럽게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의 멍에를 내팽개치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공통된 생활법칙을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 준수와 인간들이 율법의 권위와 의미를 자신들의 어리석은 의견과 일치시키는 이런 오만한 상태는 정반대이다. 따라서 그의 논리는 역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히 울법의 가르침에 의존할 때만이, 그리고 선악에 대한 구별을 짓는 데 있어서 다른 방법을 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실제로 율법을 준수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혹 어떤 사람이 성도들은 세상을 판단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한다면 (고전 6 : 2) 이런 영광은 자신들의 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남아 있는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그들이 율법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보다 높은 재판관이라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심판관이요 만민의 심판관인 하나님께 순종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리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을 율법의 준행자 로 여겨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마치 개울물이 그 근원에서 발원하듯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궁한 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12. 입법자는~~~~~하나이시니" ; 생사의 권능을 율법자의 기능으로 돌림으로써 스스로 율법 제정권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전반적인 위엄을 갈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그들의 법으로 강요하는 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취급하고 있는 것은 통치자들의 법령과 법이 문제시되는 외적인 정치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위를 차지하는 영적 통치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손에만 영혼의 구원과 멸망이 달려있는 만큼 모든 양심을 자기 손아귀에 통할하는 것은 옳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필연의 올무를 지는 인간적인 계율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여가서 배울 수 있다. 교황은 뭇 영혼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대등한 법 정자 행세를 하는 데도 우리가 그를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말을 부드럽게 하라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 귀절의 논리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올무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를 유한한 인간으로 보고 또 그를 자기들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지체들임에 틀림없다. 나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무엇에 영혼의 통차에 대한 법제정자로서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을 악마의 편을 드는 거짓 순종이라고 부른다.

 

"너는 누구관대~~~~" :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자신들에게도 잘못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본다. 곧 그들 역시 스스로. 반성하는 가운데 남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점을 발견하고서 너무 엄격하게 나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단지 인간들의 상황을 눈에 그려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바라는 위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롬 14 4)라는 뜻이다.

 

"13. ~~~~~에 가서" ;  여기서 그는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을 지탄하고 있다. 마땅히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야 할 사람들이, 마치 장차 모든 과정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한 순간에 대한 확실성도 없으면서 자신만만하게 장차의 계획을 공포하며 장기적인 정책을 운운하는 경우 가 많다. 솔로몬은 이러한 어리석은 자만에 대한 표현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 1)라는 말로서 재미있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의 혀로 결정할 수도 없는 목적을 성취할 것처럼 오판하는 것은 몰지각한 처사이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그들의 말하는 태도를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약점을 망각하는 마음의 우둔을 꾸짖고 있다.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도, 그들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무작정 이것을 하겠다, 저것을 하겠다고 덤비는 경우가 있 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래에 대한 약속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하는 표현과 함께 말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 이 옳고 유익하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물론, 나는 이런 표현을 생략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치하게 나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보는 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동의없이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있었지만 장차 일을 말하는 데 있어서 이런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뜻하신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하는 표현은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조심성 있는 습관이라고 본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무관심한 자들을, 한 순간에 대한 능력도 없으면서 일년씩이나 길게 잡는 자들을 그들의 무관심에서 일깨워 주고 있다. 곧 이들로 말하면 먼 장래의 이득을 스스로 장담하지만 발 밑의 땅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4.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  그들의 갖가지 설계에 대한 이들의 광기를 억제하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논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해내겠다고 덤비는 이 교만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좌절시키는가 하는 것을 날마다 보고 있다. 그러나 '누가 내일의 생명을 약속하더냐? 네가 죽어도 네 자신만만한 계획을 성취하겠느냐?' 하는 이 한 마디로 충분하다. 우리가 짧은 인생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만용은 스스로 누그러지며 너무 먼 장래의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된다. 세속인들이 그처럼 정신 없이 나서는 것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점을 아예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개 라는 비유는 우리의 의도가 얼마나 순간적이요, 생명의 무쌍한 변화에 좌우되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15. 주의 뜻이면"여기에는 두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때까지 살아 남는다면,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하는 조건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주위에 우리가 결정 내린 것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장래의 결과는 우리에게서 가리워져 있다. '뜻'이라는 말 속에는 율법에 표현된 것 뿐 아니라 . 그가 만물을 통치하는 그의 경륜도 포함된다.

 

"16. 이제 너희가~~~~~자랑하니" ;  우리는 이 말에서 야고보가 탈선된 말 이상의 것을 가지고 꾸짖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너희가 허탄한 사랑을 자랑하니"라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의 지배권을 박탈하고서 완전히 자긍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자만으로 더 없이 들뜬 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하나님 위에 올라섰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헛된 의견에 대한 허영심이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최소한의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뜻에서이다. 속인들은 이런 종류의 경고를 경멸하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즉각적인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곧 이들은 모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는 그들의 이러한 깨달음을 지적하는 가운데----그들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들의 죄는 무가지 아닌 멸시에서 온 죄인만큼 더 악독하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