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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28:31)

1. 성경 (행 28:23 ~31)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3)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4)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5)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6)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7)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8)(없음) (29)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0)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3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3 일자를 정하고” ; 바울이 중단하지 않고 계속 변론만 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서로 토론을 벌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설만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올 생각할 때 그가 쉬지 않고 이야기만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사도가 복음의 본질을 간략하게 이야기 한 다음에 청중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고 다음에 자기에게 던져진 질문에 답했을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설의 본질적인 특색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누가는 이것을 두 가지로 대변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선지자들이 모두 그처럼 찬양하는' 그들 사회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그들에게 약속된 최상의 지복과 영광의 성격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상태로 꿈꾸며 그것이 안락과 현재의 재물의 풍요에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울바른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이요 그것의 처음은 생명의 새로움이요, 그것의 마지막은 복된 불멸과 하늘의 영광이라는 점을 그들에게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바울은 그들이 약속된 행복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째 ,항목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왜냐하면 먼저 약속된 구속자의 임무에 대한 설명과 둘째 그가 이미 계시되었으며 마리아의 아들이 바로 조상들이 대망하던 그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재시가 여기에 따르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을 유익하고 철저하게 취급한 것으 로볼수없기 때문이다. 사실 메시아가 오셔서 만물을 완성된 상태로 회복하실 것이라는 점은 유 대인들 모두가 인정하고 있던원칙이었다. 그러나 바울온 당시 별로 잘 알 려지지 않고 있던 다론 국면에 주의를 환기시켰는데 그것은 곧 메저아가 약속된 것온 자신의 죽음의 제사를 통해서 세상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며, 영원한 의를 획득하고, 그의 영으로 인간을 중생시키며, 하나닙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며, 그리고 그의 신실한 자들이 자기와 함께 하늘의 생명을 상속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점과, 이 모든 것은 십 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접이다. 그가 이러 한 문제를 취급하자면 유대인들을 형편 없고 지상져인 견해를 떠나 하늘을 바라 볼 것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요 그와 동시에 그는 우리가 하 나님과 화해하는 또 다론 방법이 전무하다는 점을 가르쳤으므로, 십자가의 장애물율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의 증거에 따르자면 바울온 자기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친 모든 소재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취했다는 접을 우리는 유의해야겠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란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다론 것을 그 규범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론 허망한 종교와 그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하나님의 고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의 명령의 지 배만 받는다는 점에서 모든 미개 종파와 그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구약과 복음이 그리스도몰 믿는다는 점에 있어서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동일한 사도가 다른 곳에서 추천하고 있 는 성경의 이중저인 용법, 곧 그것은 전리를 반대하는 자들의 고집을 물리 칠 뿐 아니라 배우려 하는 자둘을 가르치는데 효과저이라는 점(딤후 3: 16, 딛 1 : 9)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어 남을 제대로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의 순수한 원천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내놓지 않는다는 이 한계점을 분명히 설정해야 한다. 그것이 오직 이성만을 가지고덤벼드는 철학자들의 경우와 전혀 다른 것은 그들에게는 순수한 권 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너무 추켜 울리는 로마 가톨릭 역시 나쁜 것온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두고 인간의 두뇌의 고안물, 곧 한낱 우매에 굴복하고 말기 때문이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 누가는 이 논쟁의 결과 모두가 한 가지 가르침에서 동일한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대로 이 사도는 둘맹이타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의 성령의 은해롤 부 여 받은사람이었다• 그러나그는 장시간에-걸쳐서 상당한 변론을했으며 거기에 중거률 덧붙였지만 그는그들 모두를그리스도에게 이끌지는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둘의 불신 앙이 복음의 명 백 한 가르침 을 처 항하며 그리스도의 전리가 한낮의 태양처럼 선명하지만 고집불통으로 남아있는 자 들이 많다 해서 그것을 신기하계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자. 뿐만 아니타 마 치 배우겠다는 마음에서인양 자발적으로 왔던 사람들도 맹목져이요 우둔한 그대로 그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처럼 자발적인 청중 가운데 그만한 오만이 도사리고 있었다면 교만과 빈정맵으로 배가 불쑥한 나머지 고의적으 로 빛을 피하려 드는 사람들이 빈정거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울 신기하계 여길 수 있겠는가. .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 ;. 불신자들의 악의와 사악의 결과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평화요 성스런 연합의 유일무이한 보증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불화의 계기가 되며 전에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누리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끼리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저들의 꼴불견을 보시라 ! 바울의 이 야기 를 들 으려고 모두 함께 모일 때 유대인들은 동일한 것을 생각하고 동일한 것을 이 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하나같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을 공언한다. 그러나 화해에 대한 가르침을 들음과 동시에 그들 사이에서는 분쟁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마침내 그들은 정반대편으로 완연하계 갈라지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불화가 복음전파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전에 그들의 마음 속에 감취어져 있던 적대감이 마침내 그때 부각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대양의 광채가 새로운 색갈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감취어져 있던 차이점을 드려내 보여 주는· 이치와 같다. 그 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하 그의 선택자들을 깨우쳐 주시어 신앙이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그라스도께서 공적으로 제시될 때 사람들은서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반박의 표적(駐7)이요 그 결과 여러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나계'될 것(눅 2 : 34, 35)이라는 시므온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인 불신앙이 불화의 어머니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 처 음에 는 다정 하고 침 착하게 그들을 설득 하려 했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오만불손이 드러나계 되자 그는 맹렬 한 공격을 펴며 하나님의 심판을 업하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단히 알아볼 수 있 는 가르참에 굴복하려 하지 않는 교만한 반역 자들은 이 런 방법 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I우리도 순종적이요 온순한 사람들은 부드럽 계 지 도하되 고집 불봉인 자들온 하나님 의 심 판대 로 소환하는 동일한 방법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지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 으로 말함으로써 그는 이 예언에 대한 확신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의미가 깊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만을 들을것을 요청 하지므로 가르침이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타는 접을 알 경우에 한해서만 그 가르침은 권위를 지닐 수 있다. 다 음으로 그는 거기서 지저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세대 만의 오만 불손이 아 니라 성령의 예언은 장래에까지 확대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26 이 백성에게 가서~~~~~~~~~~” ;.. 이것은신약에서 6회나인용되고있는 유명한 귀절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다몬 문맥에서 서로 다론 목적으로 인용되고 있으므로 우리는 바울의 이것을 이 상황에 져용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정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그는 그것을 불경건한 자들의 견고성을 박살내는 망치로 사용하고자 했으며 다론 한편 아직도 연약하고 깨지기 쉬 운 신자들을 격려함으로써 그들이 타인들의 불신앙 때문에 당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은 과거에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지금 성추]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으며 따라서 버림받은 자들이 스스로 기뻐하거나 신자들이 마치 무슨 생소한 일을 보는 것처럼 소스라칠 이유가 전혀없다. 그러나 비록 선지자가 언급하고 있는 눈먼 상태가 이미 선지자 당시에 시 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요한은(12:40) 그것을 그리스도의 나라에 적용하는 것이 옳다는 접을 우리에게 지져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것을 그가 목격한 복음 멸시에 적용하는 것온 적절하다. 이것은 마치 ‘지금 현재 일어 나고 있는 것치고 성령께서 이미 오태 전에 이사야의 입을 통해 에언해 놓 치 않는 것이 없다’ 하는 이야기와 같다• 비록 복음서 기자들과 바울은 이 문단을 서로 다론 방법으로 적용하고 있 지만 이러한 외견상의 모순은 쉽게 제거된다•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는 그리 스도께 서 백 성 들에 게 어 렵 게 (enigmatically) 말씀하시 고 그들에 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계시하지 않으셨을 때 이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나(막 4 : 11이 포함된 문단). 왜 냐하면 그 때 당시 하나님 의 음성 이 불신 자들의 귀에 부딛쳤지만 그들은 거기서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한도 유대인들이 많은 기져울 보고도 믿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 선지자의 동일한 예언이 성취하기 위한 처사였다는 말율 하고 있다(12 : 37). 그러므로 이 내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의 결과 버림받 은 자들이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선지자가 유대인들에 대 해서 중거한 것을 지적함으로써 아무도 그들의 눈먼 상태에 대해서 이상히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11장 5—8건에서 그는 한 절음 더 나아가 이 눈먼 원인을 하나님께서 그가 은해로 선덱한 남은 자들 에게만 신앙의 빛을 허용하시기 때문이타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사 실 비림받은 자들의 구원의 가르침에 대한 배척은 자신들의 악의에 기인하 며 띠타서 그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접은틀림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원인이 하나님의 은밀한 선덱으로 하여금 인간을 구별하는 가운데 생명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온 믿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감각하게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선지자의 대목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사 실 바울은 선지자의 말을 굴자그대로 옮기고 있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져 에 맞게 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그들의 눈먼 원인을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으로 돌리고 있지만 그는 이것을 그들의 악의로 돌리 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는 그의 청중들의 눈을 닫아버리라는 명령을 받았지 만 여 기 서 바울은 자기 시 대 의 불신자들이 자신들의 눈을 닫아버 렸다 는 점을 들어 그들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그들의 눈업에 대 한 책임이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눈을 감아 버리고 눈이 멀게 되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 양자 는 서로 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 까 함이타" 하는 귀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얼마나 명백한가 하는 점을, 곧 인간이 스스로에게 어둠을 가져 오기 전에는 그 가르침이 모 든 의식을 깨우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3절에서 그의 복음온 공개저(許8)이라서 멸망받기로 내정되어나있고 사단이 눈을 닫아버리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복음의 빛을 못보게 되 는 일이 없다는 접을 지저하고 있다.

“27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 이 모두에게 선언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올바론 마음으로 돌아 오게 하려 는 뜻에서가 아니타 이야기된 말씀이 성령의 효과져인 능력과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의 귀에 울려 퍼집으로써 그들로하여금 변명을 찾지 못하계 하려는 뜻에서타는 접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육신의 교만온 무모하게 하나 딤에 대해서 큰 소리를 치기 마련인데 이것은 우리가 순종할 능력이 없이 부름을 받기만 하다는 것은 모순이라면서 반항하는 사람들에게서 엿볼 수 있 는 그대 로아다. 하나님 께 서 눈먼 자들에 게 나타나시 고 귀 가 어 두운 자들에 계 말씀하시는 이유가 우리에게서 숨겨져 있다해도 모든 정의의 원착인 당 신의 뜻 한 가지가 우리에게 수천의 이유물 대신하는 것이 옳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논 하나님 말씀의 유익한 결과, 큰 건강의 시작이자 사망 으로부터 생명으로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회십을 여기서 유의 하지 않으면 안된다.

“28 그런 즉~~~~-.말라.” ; '그러므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나중에 자기가 아 브라함의 거룩한 종족을 버려두고 이방인들에게 전념할 경우 자기를 변절지로 몰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선자자들이 수 차에 걸쳐서 -주장했던 접, 곧 그들 목유의 아니 최소한 그들에게 우선권이 있던 구원이 바깥 사람들에 게 양도될 수밖에없다는 점을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보내졌다’는 말에는유대인들에 의해서 그것이 거절된 뒤에 있어전 2차저인 일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우리 가 이미 13장 46절에서 상세하게 다 룬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유대인돌은 그들이 마다고 버린 빈자리에 이방인들이 받아 들여진 것을 불평할 건덕지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처회는 또한 들으리타' 하는 말로씨 그는 믿음울 예외 없이 모두 에게 공동져안 것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체험을 동해서 얼먀나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흉측하게 반항했는가 하는 접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아다. 그러나 그는 신자들인 모든 이방인들을 불신유 대인들과 대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질부하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노래에 있는 그대로이다(신 32 : 21). 그와 동시에 그는 그들이 배척하고 있 는 가르침이 다론 사람들에게는 무익하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접을 지 저하고 있다.

“29. 유대인들이 서로 큰 쟁론을 하며.” ; 그는 이 예 언을 그들에게 불리 하계 인용함으로써 불경건한자들의 성미를 더 자국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 떤 그들은 꾸중을 듣고수그러지기는 커녕 더욱더 열을 내며 격렬한 분노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울을 떠나면서 쟁론을 벌인 이유는 대부분 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 지 변론이 있었던 접을 생각할 때 그들 가운데 바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 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믿는 바를 거침 없이 변호하고 주장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분쟁이란 인간들의 옹고집에서 야기될 뿐인데 그리스도의 복 음이 그것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반항해 보았자 헛일이다. 그 필요가 있다.

“30 다 영접하고.” ; 이 거 룩한 사도는 자기 이 야기 를 듣고 싶어 하는 자문 이라면 누구 하나 가리지 않고 모두 허심단회하게 맞아 들임으로써 지조에 대한 훌륭한 본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악의를 붕러 일으키고 있었으며 침묵하는것만이 반대 세력의 증오를 달래는최선의 길이 라는 점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만을 돌보는!소심한 사 람이라면 그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리 스도의 사도요, 감옥에 서 마치 쇠 고랑을 차지 않고 자유롭다는 듯이 복음 을 전파하는 선포자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제공하시는 기회를 소홀히 하는 것을 옳지 못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거룩 한 부르심이 자신의 목숨보다 훨씬 더 귀했다. 그러나 그가 자발져으로 위 험에 빠져 들었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뜻에서 누가는 다음에 그의 ‘담대 항'을 분명히 추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공포를 제쳐 놓고 하나님의 명 령에 충실하게 순종했으며 그 어떠한 난관에 대해서도검을 먹지 않고 만 나는 사람 모두에게 자신의 노력을 계속해서 다 기울였다는 이야기나 마찬 가지이다.

“31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 그는 ‘하나님의 나타'와 ‘그리스도에 관 한것'을서로다른것으로구별하지 않고설명 형식으로덧붙여 이야기항으 로씨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두께서 획득한 속량의 지식에 근거하고 거기에 일치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죄악이 사면 되고 그둔이 하나님께 화해되며 성령에 의해서 새로워져 거룩한 생활에 접 어문-기 전에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나타 밖에서 이방인과 국외자로 남아 있 을 뿐이라는 점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중 보자인 그리 스도께 서 무상의 속최 에 의 해 서 용서 받고 다시 의 로 (to righteousness) 태 어 난 인간들을 아버 지 께 하나로 연 합하실 때 만 하나님 의 나라는 세워지며 성행한다는 점을, 따라서 그들이 지상에서 하늘 나라의 생활을 시 작하는 한편 완전하고 충만한 영광을 누릴 하늘 나타에 이를 것을 항상 열 망하고 있다는 겁을 가르쳤다. 누가는 또한 바울에게 그처럼 많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점을 하나님의 리고사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려면 그를경멸하는 자들과 전쟁을 할 특별한 축복으로 꼽고 있다. 이것은 종교를 싫어하며 그를 처지하려하던 자 들의 묵인이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닫아 버리셨 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바울은 어느 면으로든 자신이 매인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쇠사슬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할만 하 다(립 후 2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