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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9:4)

1. 성경 (행9:1 ~9)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1)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2)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3)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4)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5)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6)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7)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8)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9)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사울이~~~~" : 누가는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 바울의 유명한 회심 이야기를, 곧 그가 야수와 같이 미쳐 날뛰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지배 아래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그를 완전히 다론 새 사람으로 만드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기념할 만한 행동에 어울리는 순서에 입각해서 기술하고 있으므로 그의 본문을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매 단계를 검토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말은 그가 일단 무고한 피로 얼룩지고 나서부터는 그 후로 동일한 잔인성을 계속 발휘했으며,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서 기록된 불길한 시초부터 계속 미칠듯이 피에 굶주린 교회의 원수였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가 그처럼 갑자기 유순하게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나운 이리가 양으로 변할 뿐 아니라 그가 하나의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눌라운 손길은 명백하계 드러난 셈이다.
 
"2절" ; 그와 동시에 바울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을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데려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았다는 것은 그에게 상처를 끼칠 무장과 권세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에 ‘여자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피를 쏟계 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점을 보다 더 명백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전쟁의 도가니 속에 있는 무장 군인들마저 흔히 구별하기 마련인 남녀의 성을 무시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우리에게 횡포하게 행동할 특권을 부여 받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자를 닥치는대로 죽이고 집어 삼키는권세를 부여받은 하나의 포악한 짐승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마치 칼을 손에 든 미친 사람과 같았다. 나는 당파(secta)로 번역하는 말을 누가는 도(道; via)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은유법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신실한 자들을 전부 잔인하계 파멸한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살하는 데 있었다.
 
"3 사울이 행하여" ; 그가 제사장에계 공문을 청했다는 점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미칠 듯이 덤벼든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순종을 강요받고 있다. 어찌나 열렬했던지 스스로 파멸을 향해 곤두박질하던 사람이 자신의 마음의 의도와 반대되는 구원으로 부름받은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비상한 자비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주님께서는 그가 그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시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무슨 일을 실천하시는데 있어서 얼마나 정확한 순간과 올바론 시기를 선택하시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경건한 자들을 더 일찌기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더라면 그는 물론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막 양의 우리에 들어서려는 이리의 벌어진 아가리를 꼭 다물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중재를 더없이 명백하계 드러내 보여 주시고 있다. 또한 우리가 아는 대로 인간들의 오만은 그들의 하는 일의 진전과 함께 증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볼 때 바울은 이제 자신의 광기를 어느 정도 진척시키는 가운데 더욱 더 오만 불손하게 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심은 그만큼 더 어려운 것이었다.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그러한 교만을 제지하고 그러한 야만적인 충돌을 꺾으며 그러한 격정, 곧 비뚤어전 열성에서 나오는 맹목적인 격정을 내리누르고 마지막으로 재갈을 물리지 않은 야수를 잡아 끈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상대할 자는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을 바울이 깨닫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위엄에 대한 상징을 어느 정도 보여 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를 낮추는 문제도 개제되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즉각 성령의 쉬운 멍에를 멜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그의 흉맹이 과격하계 꺾여지기 전에는 그러한 온순한 대우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 방법을 종종 달리 하시기 전에는 인간들의 이해력이 그리스도의 신령한 영광 그 자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시되 바울에게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자신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표적(specimen)을 허용하시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할 때 벌 벌 떨기 마련이지만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능력을 깨달은 바울이 체험한 공포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4절" ; 누가는 그러므로 그가 땅에 쓰러졌다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깨닫고 압도될 경우 당황한 가운데 넘어져 거의 무(無)로 전락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그의 말 위에 걸터 앉아 있을 때 멸시하던 그리스도의 바로 그 음성을 통해 가르침을 받기로 다짐하는 겸손의 시작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 누가는 온 사방에서 바울에게 쏟아진 빛을 번개(fulguri ; 柱2)에 비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공중에 번뜩거린 섬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두를 박살내기 위해 격한 어조로 발하신 이 음성을 일종의 낙뢰(落雷; fulmen)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음성을 듣고 그는 나가 넘어져 쩔쩔매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으며, 그 결과 지금까지는 복음을 타도하는 권리로  으시대며 뻐기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자신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드러나계 되었기 때문이다. 이 귀절에서 누가가  "사울아 사울아" 하는 히브리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 가 당시 백성들이 흔히 사용하던 방식으로 말씀하셨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주여, 뉘시오니까 ~~~~" ; 이제 우리는 말하자면 길들여진 바울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 중에 하나는 아니었다. 그의 속에 있던 교만이 꺾이고 광포가 누그러졌지만 그는 아직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건전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것은 큰 소리를 지르며 수 없이 하나님을 모독하던 사람이 지시사항을 수행할 준비만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안이 벙벙해져 대경 실색하며 당황한 사람이 하는 질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그러한 징조를 보고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외침은 주저하고 불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더욱 다그쳐 회개하게 하고 있다. "나는 예수라" 고 하는 말씀은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는 이 음성을 듣고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손길의 임자이신 그 분을 상대로 계속 반역했다가는 결국에 가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당장 순전하게 굴복했음에 들림없다. 그리고 이 귀절에는 특별히 유익한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가치는 참으로 다양하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이 자신의 대 목적 (cause) 이요, 그는 이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선언하심으로써 그가 얼마나 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없듯이 이 복음의 변호를 결코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복음 증거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할 때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들과 함께 이 십자가를 분담해 주신다는 소식을 말하자면, 그가 그 짐의 밑에 그의 어깨를 들이 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 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가 친히 우리와 함께(t'n persona nostra) 고난을 받고 있으며 마치 복음의 원수들이 우리를 통해서 그의 옆구리에 상처를 낸 것과 다름 없는 같은 아픔을 받고 있다는 점을 우리들이 실제로 확신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은 결코 공연한 말씀이 아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신자들이 오늘날 복음의 변호를 위해서 당하는 모든 박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골 I : 24). 더우기 이 위로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우리의 고난이 그와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하늘에서부터 선포하시는 그 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모든 불행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소망하도록 하는데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핍박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무시 무시한 심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알수있다. 그둘은 마치 거인처럼 하늘을 향해 돌격하고 창을 휘두르지만 그 창은 곧 자신들의 머리를 향해 되돌아오고야 만다. 그렇다 그들은 하늘을 괴롭혀 봐야 하나님의 진노의 벼락을 자초할 뿐이다. 여기에는 또한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부당한 상처를 입힘으로써 그리스도를 공격하거나, 열성을 핑계로 무모하고 맹목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진리를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경고도 담겨있다.
 
”가시채를 뒷 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許 I 참조) ; 이것은 소나 말이 그들을 모는데 사용하는 막대기에 찔릴 경우거기에 발길질을 해봤자 더 쿡쿡 찌르는 막대기에 곱절의 아픔을 맛볼 수 밖에 없는 장면에서 따온 격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이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 아주 적절한 것은 싫든지 좋든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때에 기를 쓰고 그에게 반대해 봤자 인간들은 곱절의 상처를 자초할 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기꺼이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자들은 그에게서 아무런 찔림을 받지 않고 그 안에서 이미 마련된 모든 상처에 대한 치료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독침을 그에게 쑤셔 넣으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은 자기들이 채찍에 내맡겨진 노새나 소와 다름없다는 점을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는 의지할 토대이지만 그에게 돌격하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가 그 경고함으로 그들을 박살내는 돌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복음의 원수들을 두고 사용된 것이지만 그 경고는 우리들에게도 확대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무슨 일을 할 때 재갈을 이로 물고 날뛰면서 무슨 일을 성취할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지 말고 유순한 말처럼 그의 손길에 따라 돌라면 돌고 가자면 가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설령 그가 우리를 채찍으로 때리실 경우에는 즉각 그의 채찍에 반응을 보이도록 하자. 그래야 고집 센 말과 나귀가 난폭하게 굴지 못하도록 그물의 턱을 단단한 재갈쇠로 봉해버리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 32 : 9) .
 
그 외에도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시면서 날마다 베푸시는 그 은혜에 대한 보편적인 형태를 대하게 된다. 물론 모두가 그 처럼 강포하게 복음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반역은 우리 모두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천성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은 우리의 본성에 반해서 하나님의 기적적이요 은밀한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다. 물론 로마 가톨릭에서도 우리의 회심을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으로 돌리지만 그들은 우리가 협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직 일부분에 있어서만 그렇다. 그 러나 사실온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죽이실 때 우리를 바로 바울과 똑같은 방식으로 제지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교만이 꺾인 다음 우리가 그를 따르기에 적합하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하기 전에는 바울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한 치도 순종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심의 시작이란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부르거나 찾지 않았지만 그가 먼저 방황하고 곁길로 가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꿋꿋한 욕망을 바꾸어 놓아 우리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다. 더우기 이 설화는 마음의 가르침을 확증하는데 큰 가치가있다. 만약에 바울이 항상 그리스도의 제자였다면 불경건하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은 그가 그의 선생의 것으로 말하는 중거의 권위를 약화시켰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가 처음부터 천성이 유순하고 고분 고분했더라면 우리는 인간적인 것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치명적인 원수, 복음의 반역자, 자신의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배가 부르고 전정한 신앙에 대한 중오심으로 불타는 사람, 위선으로 눈이 어두우며 그 진리를 파괴하려고 굳온 결심을 한 사람인 그가 갑자기 비상한 방법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번화되는데, 곧 이리가 양으로 변할 뿐 아니라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으로 하늘에서부터 파송된 천사를 공공연하게 이끌어 내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다소의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하늘에서부터 그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시려고 새로 창조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6 절" ;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바울의 완악함을 꺾는 뜻에서 그가 세차게 얻어 맞은 징계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혐오하던 분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가 된 사람으로서 자신을 바치고 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그는 그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버림받은 자들도 하나님의 위협을 받을 때는 겁에 질린 나머지 그에게 억지로 경의를 표하고 그의 명령을 순복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불평하는 일과 마음 속에 오만을 가꾸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낮추시되 그의 마음 속에서부터 효과적으로 작용하셨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바로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한 것은 그의 본성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바로는 마치 모루(anvil)와 같아서 자신의 견고성 때문에 자기에게 와 닿는 하나님의 채찍이 마치 두들기는 망치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에 굴하지 않고 되튕겨 버리고 말았다(출 7 : 13).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거기에 본래 없던 부드러움이 성령에 의해서 허용되자 갑자기 쇠 (iron)에서 살(fles~)로 변했다. 우리 역시 이 동일한 사실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다. 곧 그는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꾸중하고, 위협하고, 겁을 주며 심지어는 매를 들기까지 하시지만 하나님의 영이 속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기 전에는 아 무도 이러한 보조 수단을 통해서 좋온 열매를 맺지 못한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 바울은 자신의 무쇠 목율 그리스도의 멍에 밑에 들이 밀고 난 다음부터 그의 손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경주장 트랙으로 우리를 데려 오실 경우 그는 출발점이나 도중에 우리를 내팽개쳐 버리시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목표를 향해 인도해 주신다.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어놓고 나서 그에게 지시사항을 전달 했다는 점을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도의 계속적인 면을 묘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해 사람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해서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자신의 일을 완성하신다 해도 그 권위와 능력은 여전히 자신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열심히 들을 자세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말하자면 가르침을 받아 먹으려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배우라고 보냄으로써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대답하겠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바울을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배우도록 보내신 것은 마치 당신께서 그와 친밀하게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교만하게 멸시하고 그렇게 가혹하게 박해했던 그의 종들에게 보내시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께서는 그의 겸손 (modesty)을 시험하고자 하셨다. 우리도 그의 본을 통해서 검손한 자세를 배워야겠다. 곧 그리스도께서 바울같은 사람을 평범한 제자의 교훈을 받도록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임명을 받은 교사, 곧 실제로 그의 일군임을 입증하는 자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을 아나니아에게 보낸 것은 교회의 사역에 대한 영예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천성적으로 속되고 거짓말과 허영에 빠져 있는 입술의 주인공들인 우리들 가운데서 형제 둘을 뽑아 당신의 성스러운 말씀을 소리쳐 외치게 하자는데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크나 큰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세상의 수치스러운 배은·망덕은· 다시 고개롤 쳐드는데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 하시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천사들이 직접 자기들에게 날라와 주었으면, 하늘이 당장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게 거기서부터 드러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이 따위 극악한 호기심은 교만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불경건한 경멸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것은 수없는 공상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치며 신자들 간의 상호 일치점을 부숴 드린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을 그의 뜻으로 선언할 뿐 아니라 자신이 세우신 제도(order)를 추천하고 그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로듣는 것이요"(눅 10 : 16)라는 말씀 역시 이것과 관계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경의를 확보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치는 직무에 관한 한 아나니아에게 당신 대신 행동할 것을 임명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당신께서 자신의 권위를 그에게 양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복음의 충성된 일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을 배우고, 일군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자신 뿐이라는 이 지침{moderatio)을 항상 견지하도록 해야겠다. 그러나 우리는 사역자들이 이러한 귀한 기능을 핑계삼아 교만하거나 그들의 천한 상황이 하늘의 지혜를 훼손하는 잘못이 없도록 경계해야겠다.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 누가가 여기서 바울의 동료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이 환상의 중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바울이 제22장에서 말하는 것과 약간 다른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거기 바울은 그의 동료들이 빛올 보고 당황하게 된 나머지 그 음성을 듣지 못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잘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여기의 부정어가 필경사의 무지 때문에 잘못 기재된 것으로 본다· 그려나 그들이 음성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또는 무슨 애기가 오고 갔는지 몰랐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나와 함께 있는사람들이 나더러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하는 말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그것이 애매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음성으로 둘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 귀절에서 누가는 음성온 들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음성이 사람이 낸 소리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발 하신 음성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적을 동해서 믿음을 확립하는 뜻에서 바울의 동료들은 번개와 같은 빛을 보고 바울이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지만 그와 동시에 바울 혼자서만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 여기서 누가는 바울이 혼자서 일어 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려 쓰러졌을 뿐 아니라 당분간 지력까지 박탈 당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의 예리함을 망각하게 되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라고 하는 대목은 그의 눈이 비늘 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다는(18절) 대목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귀절의 의미는 그가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이 글자 그대로 눈먼 상태였으며 이 시력의 상실이 사흘간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9절" ; “사흘 동안을~~식음을 전폐했다"는 누가의 주장은 기적의 일부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물론 동양인들이 우리보다 더 허기를 잘 참는다지만 우리는 그들이 음식이 전혀 없거나 어떤 강압적인 상황에 말려 들지 않고서 그처럼 사흘간에 걸쳐 금식을 했다는 어떤 기사도 읽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사흘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보통 이상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