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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28:15)

1. 성경 (행 28:11~22)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11)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2)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3)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14)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5)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6)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7)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8)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19)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0)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1)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1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 ;  이 말은 첫번 배가 침몰 되었거나 너무 파손되어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 파선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을 로마로 호송하는 ‘알렉산드리아 배' 에 「카스토오와 폴룩스의 기호가 분명히 펄럭이고 있었다는 점을 기록함으로써 바울에게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항해할 선택권이 주어쳤던 것이 아니라 두 우상에게 바쳐진 배에 억지로 승선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옛날 시인들은 카스토오와 폴룩스를 쥬피터와 레다(Leda)의 자손으로 상상했으며 그 결과 헬라어로는 그들을 '디오스구로' 라고 불렀는데 누가는 바로 이 이름을 이 귀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쥬피터의 아들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시인들은 그들이 12중(十二宮)의 제 3 쿵인 쌍동이 좌 (Gemini)인 것으로이야기했다. 선원들사이에서 성행하고있던 또 다른 미신은 바로 이 둘이 폭풍우 속에서 나타나는 뜨거운 증발 기체 (exhalation)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 전부터 이 둘은 바다의 신으로 여겨졌으며 오늘날 니콜라스(Nicholas) 클레멘트 같은 이름과 마찬가지로 기원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태고적 오류가 이름만 바뀌었을 뿐, 로마 가톨릭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오늘날 그들은 성 헤르메스(Saint Hermes)나 성 에루므스 (Saint Ermus)라는 이름 밀에 저 증발기체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증발기체가 하나뿐이면 불길한 징조요, 둘이라야 성공저인 항해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플리니의 이론에 마타 알렉산드리아 선원들은 카스토오와 폴룩스 의 상칭을 배에 매달아 이 둘이 자기들에게 호의롭게 나올 것을 바랬다. 그러므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배는 그들의 불신앙적인 신상 모독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바울은 자발적으로 그 배를 택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거기 서 아무런 불결을 타지 않았다. 물론 일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다지 말해서 신실한 자들은 그 물건들을 합법져으로 그리고 무조건 사용할수 있다는이야기이다. 사단이 그의 여러 기만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더럽히려 하는데 사용하는 모든 더러운 것들은 오직 정결한 양심에 의해서만 깨끗하게 되고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인 자들은 그들의 부정한 접촉으로 그 자체로서는 정결한 것들을 오염시킨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한 마디로 아덴의 신전을 바라 보는 것이 바울을 더럽힐 수 없었듯이 이 배의 승선 자체가 그를 더럽힐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은 정결하고 온갖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머지 이방 세 계의 모든 거룩한 것들이란 한낱 환상(illusions)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익 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도 그가 이 세 속저인 오류와 전혀 무관하다는 점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 에 카스토오와 폴룩스를 경 배 하도록 압력 을 받았다면 차라리 백 번 죽는 편 을 택했을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기 때 문에 그는 부담없이 이 배에 울타 탔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마땅한 경의 가 쓸데없는 우상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서 가슴 아파했음에 틀림 없 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항해 체임을 맡은 자들이 스스로를 우상의 지배 아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배를 이 둘의 보호와 빠려에 우]임한 바로 그 자들이었다는 점은 그를 단련하는 것 가운데 한 가지 사실로 포함 시키지 않을 수 없다.

 

"12―14절 수라구사에 대고~~~" ; 누가는 나머지 항해로써 그들이 먼저 시실리에 기항했다가 바다의 큰 물결' 때문에 이태리로 건너간 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가 여기서 지명하는 항구는 시실리에서 가장 유명한 항구요 메시나(Messina) 항보다 이태리 해안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으며 메시나항 맞은 편에는 누가가 기록하는 레기온'항이 있다. 그리고 레기온은 부루티안 족들(Brutians)의 영토요 보디올은 캄파니아(Campania)의 한 도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보디올 형제들이 바울을 7일씩이나 영접했다는 사실에서 백부장이 얼마나 그를 친절하고 후하게 대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람은 틀림없이 정한 시간에 돌아올 것을 백부장에게 약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백부장은 그의 정직성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을 엽려가 전혀 없는 것으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디올에 교회의 형태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귀절에서 당시 복음의 씨앗이 흩뿌려져 있었던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15 거기 형제들이……듣고" ;,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복음을 더 적극적으로 변호하도록 재촉하는 뜻에서 형제들과의 이 회합을 통해서 그를 격려 하셨다. 다른 한편 형제들이 바울의 도착 시간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를 마중 나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의 열성과 경건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고백으로 말하면 미움을 살 뿐 아니라 그들의 생명에까지 위대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악명은· 교회 전체가 뒤집어 쓰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한 두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실패할 경우 겁쟁이요 배은망덕한 자라는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임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를, 특별히 공동적인 구원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그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들에게 편지를 쓴 바 있으며 그쪽의 요청없이 자신의 봉사를 제공했으므로 그들이 그에게 형제로서의 선의로 답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친철한 행동을 통해서 형제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을 증거한 셈이다. 그리고 바울의 진지한 마음이 더욱 더 불타 올랐던 것은자신의 꾸준한 노력에 대한 보답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 그는 불굴의 정신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인간들의 도움에 의존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백성을 격려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

 다른 곳에서 불평 하듯이 (딤후 4 : 16) 후에 그가 감옥에 내버려졌을 때도 그는 낙심한 것이 아니라 마치 막강한 대군을 이끌고 진두하는 사람처럼 용기 백배하게 그리스도위 깃발 아래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에는 충성스럽지만 아직 연약한 형제들이 많았으며 이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기가 보냄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마중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 큰 격려가 아닐 수 없었다. 다시 그의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때 바울이 형제들의 모습을 보고 힘을 얻은 것이 전혀 이상할 수 없는 것은 그는 자신의 신앙고백이 많은 결실을 맺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그들의 수고의 성과를 어느 정도 보여 주실 때마다 마치 채찍을 가하듯 그들을 자극함으로써 더욱 더 임무에 적극적으로 계속하도록 하신다.

 

"16 백부장이 죄수들을……넘겨 주었댜" ; 이것은 바울의 상황은 다르고 특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다론 사람들보다 더 대우를 받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다른 죄수들은 공적인 감옥에 구금되었지만 그는 자기에게 딸린 경비병과 함께 개인 집에서 살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것은 집정관의 호위병단의 사령관이 베스도의 공문을 통해서 바울에게는 아무런 범죄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추측컨대 백부장은 바울에게 유리 이야기를 상세하게 그에게 보고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자신의 종의 구금을 완화 하신 것은 그의 고통을 덜어 줄 뿐 아니라, 산실한 자들로 하여금 더 자유롭게 그를 만날 수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신앙의 보화가 감옥의 담벼락 속에 국한되는 것 보다는 그것이 공개된 채로 있어서 사방 사람들을 풍성하게 하는 편을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쇠고랑을 차지 않을 정도로 개인 집에서의 구름의 자유를 누린 것 은 아니었다.

누가는 집정관의 호위병단의 사령관을 '스트 라토페다르케스', 곧 ‘야영대의 장’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그 직무가 그에게 속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대로이다.

 

"17 사흘 후에……" ;바울의 온유성은 확실히 놀라웠다.  말하자면 그는 동족에게 그처럼 괴로움과 모욕을 당했는데도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들에게 자신을 변명함으로써, 제사장들이 자기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그들이 자신의 소송 사건을 꺼려하는 일이 없게 하고 있다. 물론 그가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섰다 해도 사람들 보기에 그에게는 결코 정당한 변명이 부족할리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해에 걸쳐서 그리고 여러 곳에서 한결같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했어도 그들은 더욱 더 분노할 뿐이었으며 그는 아시아, 그리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분노를 누그려뜨리려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령 그가 그처럼 수 차에 걸쳐서 체험한 대로 절망적인 옹고집의 소유자들인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났다 해도 모두들 그를 정당하게 용서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의 백성으로 입양하신 약속을 성취하려고 자기 스승(Master)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일꾼(롬15 : 8)이 되게 하셨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조금도 지겨워하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가르치는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던 만큼 그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수고의 열매가 박탈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음으로 그가 그들이 자신의 소송 사건에 대한 증오심에 이끌려 교회를 괴롭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계기가 엄청난 파멸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그들이 그들의 통상저인 광기에 빠진 나머지 아주 못된 불을 붙이는 횃불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

 

"내가……배척한 일이 없는데·…·" ;  마치 배신자들이 자신들의 배신을 통해서 안그래도 이미 잔혹한 자신들의 노예살이를 가중시켰듯이 그가 동족의 안녕을 해쳤으며 하나님 예배를 모독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유대인들 사회에서 그에게 불리한 악의를 조장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 유대인들이 조상들의 기치를 벗어났으며 그들 사회의 종교는 여러가지 오류로 타락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율법과 성전 예배에 대해서는 크게 경의를 표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온 자신이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이 미신적으로 얽매여 있는 의식을 탈피해 버렸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뒤집어 쓸 수도 있던 배교의 협의를 스스로 벗어버리고 있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규모' 란 자신들의 신앙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모세의 제자들이 마땅히 나머지 민족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관례를 두고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율법의  핵심(Soul)이자 완성인 그리스도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결코 조상들의 관계를 훼손하는 일일 수 없었던 것은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이것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19 절 ••••••내가 마지 못하여 ...... 호소함이요." ;  이 ‘상소’ 를 모두가 싫어했던 것은 첫째 자신들의 법에 따라 살고자 했던 유대민족의 정의와 자유가 무모하게 멸시를 받는 것처럼 보였으며 둘째 그의 변호에는 전체 백성에 대한 수치와 상처가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그의 원수들의 고집 때문에 이런 피난처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들어 이 반론을 제거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에게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수단이 달리 없었던만큼 상황의 필연성이 그를 변명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변명으로써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제시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유대 민족을 공격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건을 변명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20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우리는 누가가 생략하고 있지만 자기 가 이야기한 내용을 분명히 반복한 그의 대 답-유대 인들이 ‘이 단' (the sect) 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으로 말하는―에서 알수 있듯이 누가의 이 짧은 절 (節)에는 단어 이상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 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없는 율법과 성전이 아무 소용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것은 그분 안에서 입양의 연약이 확증되었고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이 왕국 성취가 메시아의 도내에 의촌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신 하고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들의 여 o라하고 절망저인 상황은 그에 대한 소망과 바램을 더욱 더 증대시켰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하는 바울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정당화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영적 왕국을 바라보는 자들의 소망만이 올바른 것이라는 점을 이 귀절에서 알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경건한 자들의 소망을 그리스도 안에 둠으로써 다른 모든 소망을 명확히 배제하고 있다. 

 

"21, 22 절 우리가 .....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울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던 것은 그들이 그에 대해서 상냥하게 되었거나 그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침묵은 그가 멀리 가버리게 되자 그를 박살낼 만한 수단이 쉽게 떠오르지 않은데서 오는 치욕 내지는 절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이태리에 간다는 것은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한 국내에서 편하고 거만하게 어론노릇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설령 이야기를 들으러 온 유대인들에게 전혀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온 사방에서 배척받고 있는 이 가르침에 대한 변호를 거절하지 않고 들으려 한 그 점에서 어느정도 배우려는 욕망을 보여 주고 있다. 특별히 일반이 배척하는 것은 들어 줄 가치가 없다면서 자신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문제를 남의 의견에 덩달아 춤을 추면서 정죄하는 이 조급한 결정 (pdor decision) 때문에 스스로 길을 봉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와 동시에 앞서 말했듯이 그들에게 비난이 없지 않은 것은 그들이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악의를 조장하거나 불리한 의심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사야 8장14절에서 이미 오태 전에 하나님께서 만민에 게 ‘거침돌이’ 될 것이라는 접을 예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