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1:6 ~ 11)
그들이 모였을 때에 에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6)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7)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8)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9)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0)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1)
2.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대속의 은혜와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소망을 경험한 제자들은 당시의 팽배했던 사회의 여론에 깊이 젖어있던 생각을 말한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인의 나라가 회복됨이 언제인가를 묻는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알바 아니요"라고 딱 잘라 질책하신다.
이스라엘의 나라의 회복을 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3년여 동안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영적인 무지를 깨닫게 하신다.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와 온 세계의 이방종교를 신봉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함을 말씀하심으로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신다. 오늘을 사는 신자는 매 주일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며 산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말씀을 주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을까?를 깊이 있게 묵상하여야 한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예배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경건의 능력이 있는 예배자로 복음 전파자로 살며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살아야 한다.
3. 묵상(Calvin선생주석)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 사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이 질문이 나왔다고 누가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이런 질문이 생겨진 것이 아니요,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삼년의 세월에 걸쳐 그처럼 완전하고 조심스럽게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마치 그들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한 것 같은 무지를 폭로한 것이었으므로 얼마나 그들이 놀랄만큼 어리석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 질문 안에는 말의 수효만큼이나 많은 과오가 듣어 있다. 그들은 그 왕국에 관해서 묻고 있지만 그것은 지상의 왕국을 꿈꾸고 있는 이야기이다. 지상의 왕국이만 부와 사치와 외부적 평화, 그리고 그와 유사한 축복된 사항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를 왕국을 회복할 시기로 정할 경우에 그들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기뻐하려고 열망한 것이다. 그들이 임명받은 일에 손도 대기 전에 일의 대가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동족 이스라엘에 한정시킴으로써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온 땅 끝까지에 그 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안되는 나라이다. 또한 이 전체 질문 안에는 필요 이상으로 알고 싶어 하는 결점이 있다. 그들은 물론 다윗의 왕국의 회복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말한 바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그들은 가끔 들어 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의 비참한 포로의 상황 속에서 각 사람의 심령이 장차 다가 올 왕국의 희망으로 소생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왕국의 회복이 성취된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오신 것을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이 일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 그들은 그처럼 좋으신 스승 밑에서 별로 진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표명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간결한 대답으로 그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견책하신다. 나는 그 일을 앞으로 멀지않아 지적할 것이다. 본질에서 ‘회복'이란 말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많은 피해로 파괴되고 망가뜨려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다. 그 것은 이새의 마른 그루터기에서 한 가지가 듣아나고 또 처참하게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7. 너희의 알 바 아니요." ; 이것은 전체 질문에 대한 전반적인 책망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숨겨두시기로 원하신 것을 알려고 원한 그들의 불법한 주제 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 하시는 것은 재빨리 배우도록 하고, 우리에게 알리시지 않고 숨겨두시기를 원하지는 일들은 기꺼이 알려고 하지 않은채 그대로 두는 것이 우리가 지혜를 얻는 참된 길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헛된 호기심은 거의 우리 모두가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며, 거기에다 억측이 재빨리 첨가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의 결정을 시정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훈계를 열심히 준수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의도하시는 바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가 하나로 연결시켜 놓으신 두 분을 이해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시기와 계절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밖의 사건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여기서 보편적인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을 우리가 만족하고, 그가 계시하시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은 비합법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그 두 극단 사이의 진정한 길이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자기들의 형편없는 무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숨은 신비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의 전체 종교신앙이 하나님의 숨은 신비와는 전혀 별개의 것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숨온 신비를 전적으로 회피하여야 한다면 그리스도도, 그의 복음도 우리가 멀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한 방안 (方案)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주재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만큼 배우려고 열망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주께서 우리에게로부터 숨겨두시려고 원하시는 것을 알아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지혜로우면서도 절도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한도를 넘어서 더 알려고 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될 때마다 여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너희의 알 바 아니다”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과 명하시지 않는 일을 가지고 애타하지 않는 이상, 이 말씀은 우리의 분방한 마음의 본성을 억제하기에 넉넉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과 계절을 미리 알려는 일에 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정죄하시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라고 한 부분(원문에는 후반부로 되어 있다.-역자주)에 기록되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겨울과 여름 그리고 그 밖의 연중 계절, 추위와 더위, 고른 일기와 불순한 일기를 다 그의 권한 아래 두셨다는 것 (창 1 : 14)은 확실하지만, 계절의 진행은 변치 않는다고약속(창 8:22)하셨기 때문에, 그가 이미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사실들까지 자신의 권한 아래 두셨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나 농부들이 자기들의 숙련 기술이나 학문이나 판단력이나 경험에 의하여 이해하는 일듣은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로는 그들의 손에 맡겨두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것들을 자신에게 맡겨두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견해를 우리는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사항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시기가 올 것인가 하는 따위의 비밀한 과정에는 모르는 채로 있어야 한다. 이 분야에서의 과분한 관심과 호기심처럼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게 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장차 울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비추어서 우리의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장래의 결과를 어둠 속에 두시며 그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여기에서 긴장관계가 전개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일들, 이를테면 미래의 사건들을 지배하시고 음직이시는 일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려 고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생소하고도 괴로움을 주는 고민 속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 일들을 우리들이 가로채는 일을 금하신다· 그런 일들 가운데는 우리의 생각과는 위배되고 우리 마음의 이해력을 초월한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지배하려고 하시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우리가 미리 알려고 하는 일이다.
"8. 너희가 권능을 받고~~" ; 그들의 호기심을 억제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으로 이끄신다. 호기심은 보통 나태에서 혹은 불신에서 생겨난다. 불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하는 것으로 치료된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를、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는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끈기있게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지시하신다.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그 성령에게 속한 특별한 은사를 너무도 조급하게 성취하려고 함을 책망하신다. 그들은 싸움터에 나가토록 소명되었으면서도 안일하게 누워서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는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적당한 시기가 오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을 추구하지 않도록 그들의 연약함을 충고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로 읽을 수 있다. 즉,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을 것이다" 혹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 때 너희가 권능을 받고", 어쨌든 후자의 경우가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실 때까지의 그들 자신의 결함을 그 편이 잘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끌까지" ;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전 세계에 전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임명하실 때에. 그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더구나 그는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견해를 간접적으로 논박하셨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만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위치상으로는 유대의 이웃이면서도 시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마리아도 역시 그들이 거두어 들여야 할 곳으로 증언하신다. 그는 그밖의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아 있는 다른 종교의 백성들도 동일한 은혜에 참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반드시 모여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분리시키고 있는 수렁이 얼마나 큰가는 잘 알려진 일이다(요 4 : 9).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리의 장벽이 무너지고、그들이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들어서 (엡 2 : 14) 그의 왕국이 도처에 세워지도록 명령하신다.
제자들이 경험한 가장 악의에 찬 적들이 가득한 예루살램, 유대의 지명을 주께서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상당한 고난과 어려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들이 조급한 승리를 생각하지 않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많고 포악한 적들의 앞으로, 나아가서 그들의 분노를 일으켜야 하는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조금도 두려움을 주지 않올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유대인을 우선적으로 지정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장자로 보신 것이다(출 4: 22). 그러면서도 일찌기 구원의 소망에 대해서는 소외되었던 모든 국민을 차별없이 부르신다. 이로써 우리는 복음이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명백한 명령을 따라 전파되었고 그것이 마침내 우리들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엡 2:7)
"내 중인이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선언으로써 두 가지의 잘못을 시정하신다. 즉, 그는 그들이 승리를 희망할 수 있기 전에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임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그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은 다시 말하면 농부는 수확을 거두어 들이기 전에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딤후 2 :,6).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의 일을 배울 수 있다. 즉, 우리는 이제 장차 올 생명의 상태에 대해서 쓸데 없는 공론을 하는 대신에 차라리 현재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는 그 길에 우리의 관심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올리어질 때에 그들이 받을 미래의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거기에 이르기 위하여 가야 할 길은 유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세상을 단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즐기게 될 장래의 생명의 성격에 대해서 추론하지만, 한편 그들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되기 위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는다(딤후2 : 11).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모두 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그 길을 따라서 우리 모두 장부답게 늘 끊임없이 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다음에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셨을 때에 또 하나의 정정이 따른다. 그것은 이 말씀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지상의 왕국에 대해서 품고 있는 그릇된 생각을 그들에게 뽑아 버리려고 하신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몇 마디로 지적하신 대로 그 나라는 복음의 선교에서 성립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세상의 부, 쾌락, 권력, 그 밖의 세상에 속한 것을 꿈꾸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선교를 통하여 이 세상 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실 때에 그리스도는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그들은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방식과는 달리 영적으로 지배하신다는 말이 된다.
사도들이 현세적인 나라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은 그들의 전 국민이 공통으로 지녔던 잘못에서 온 것이었다. 그들이 모두 이 점에 있어서 그릇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력이라는 규범에 그것을 맞추어 볼 때, 어떻게 그것이 야비하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짐승처럼 우리 육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감성이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잡힐 수 있는 현실에 매달린다. 그래서 우리는 천년왕국설 신봉자들도 똑같은 과오에 떨어진 것을 알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천년동안 지배하신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현세의 왕국들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묘사한 여러 예언들을 가장 육체에 적합하도록 적응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상 그들의 마음을 보다 높은 것들로 끌어올리려는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똑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전파된 복음을 듣는데 마음을 기울여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배려(配慮)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는다 하는 것은 독자들이 나의 <기독교 강요>에서 배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신앙의 주요 조항의 하나이기 때문에 누가는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실상 주님 자신이 그 사실을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시려고 또 그처럼 공공연히 하늘로 오르시고 또는그밖의 상황으로써 그 확실성을 확증하신 것이다 . 왜냐하면 만일에 그가 남몰래 가만히 사라지셨다면 제자들은 정말로 이 상하게 생각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어디서든지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장소에 서서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 분, 방금까지도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그 분이 하늘로 올리워지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눈이 그의 모습을 추적하여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늘로의 승천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또한 천사들도 나타나 그 일을 증언해 주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계의 아무데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하 늘에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하므로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기록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 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게 되기 전에 구름이 가리워져서 서람들의 시야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보아 온 것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 같다.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서 우리의 마음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최고지점에까지는 올라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이 구름이야말로 지난날 율법시대에 장막 문앞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연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제 넘음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게 하여야 한다.
"10. 두 사람이~~~~~" ; 그는 천사들을 사람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이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제 그 일에 대해서 이쪽이나 저쪽, 어느 쪽에 서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서도 이런 환유는 성서, 특히 모세의 제 1 권에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이 이상 그 일에 대해서 꾸물거릴 생각은 없다. 그들이 입은 흰 옷이란 특별한 구별과 권위의 표시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그것으로써 그들올 보통 사람들과 구별지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그들의 하는 말에 좀더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한 것이요, 또 오늘의 우리들도 그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11. 갈릴리 사람들아~~~~" ;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견해를 갈이 하지 않는다. 즉 천사들이 마치 사도들을 미련하고 우둔한 자들로 여겨 그것을 책망할 양으로 그들을 경멸해서 이런 호칭을 사용했다는 생각이다. 나의 생각에 의하면 그와는 반대로 이제까지 본 일도 없는 천사들이 사도들에게 친히 잘 아는 자들에게처럼 말을 걸어 왔으므로 이것은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듣게 한 호칭이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늘을 쳐다 본 일 때문에 당치않은 책망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늘이 아닌 어디다 본 데서 찾을 것인가? 성서는 거듭 거듭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권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이 하늘을 쳐다 본 것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니요 다만 구름이 그들 사이를 가로 막아 육체적 감각으로는 그를 볼 수 없게 됐을 때에 그들은 그를 육안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으로 본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강림하시기까지 하늘에 오르사 거기에 계시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곧 돌아오셔서 그를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귀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구나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위의 두 가지 욕망 중의 어느 것에라도 매달리는 사람은 흔히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움 때문에 책망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의 위대함에 놀라서 어리둥절하게 되는 경우가 있듯이 그 사실의 신기함에 경탄했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 이 귀절은 두 부분으로 성립되었다. 첫 부분은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돌아오시기로 갈망하지 않도록 그는 하늘로 올리워지셨다는 사실이요, 둘째의 부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위로의 형식으로 즉시,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양부분에서, 또 하나 하나의 각 부분에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의 상징 안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재하신다고 생각하는 교황제도주의자들이나 그 밖의 모든 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확고한 논증을 끌어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울리워지셨다고 말해졌을 때 확실히 공간적인 거리가 지적되기 때문이다. 하늘이라는 말이 여러가지 의미로 이해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때로는 창공으로, 때로는 전체 공간으로, 때로는 하나님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지만 하나님의 존엄이 그 고유한 자리를 소유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로 이해된다. 그런 이유로해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든 하늘 위에 모셨다(엡 I : 21). 그는 전체 세계 위에 계시고. 또 축복된 불멸의 거주지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머리가 되셔서 주관하시는 그 모든 천사들보다 탁월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않는다는 것도 틀림없으며 또 '하늘'이라는 말로써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것도 틀림없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항변을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울리위지신 그 '하늘’은 이 세계의 구조와 대치 (對置)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가 하늘에 계시게 된다는 일은 이 세계의 밖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선 그 천사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우리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하는 바를 보다 완전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탈피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 때문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기까지는 다시 오시는 일이 없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곧 돌아오시리라고 헛되이 기다리지 않도록 그 시기를 지정해 주는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말들이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아라고 누가 깨닫지 못할 것인가? 그를 세상에 모시고 싶어하는 일이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 수 있을 것인가?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께서 보이는 모습으로 오실것이었지만 이제는 날마다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의 궤변으로써 이를 회피하려고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형식이 아니다. 다만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나타나실 때까지 하늘에 그대로 계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침 받고 있는 것 뿐이다. 그의 육체적인 임재를 바라는 일은 어리석고 그릇된 일로 비난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례전에서 육체적 모습으로는 임재하시지 않지만 그의 영광의 몸은 초자연적 방식으로 또는 기적적으로 현존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에 관한 그들의 꾸며 낸 일을 천박하고도 유치한 것이라고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성경적인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들 나름대로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더불어 이야기하실 때에 이미 영광의 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상하고 신비한 능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천사들은 그 후에 그러한 모양으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날까지는 사람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바라는 마음을 우리에게 금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 자신들의 발명품으로 그를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또 그라스도께서 우리의 손이나 혹은 우리의 눈 이외의 무슨 다른 감각기관에 편재 (通在)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그의 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은 무한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은 하나의 어리석은 꿈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도 어려움없이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즉,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채우시기 위하여 승천하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그가 자기의 육체의 본질 (substance) 로서가 아니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써 멀리 어디에서든지 충만하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말씀 안에서 또는 성례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래서 믿음으로써 그의 살과 피를 받는 자는 누구나 참으로 그리스도의 육체와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교황제도주의자들의 헛소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마폼필리우스 (Numa . P~mpilius)가 자기의 쥬피터엘리시우스를 불러 내리고 혹은 마녀들이 자기들의 마법으로써 하늘로부터 달을 불러 떨어뜨리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그런 방식으로 제단 위에 초치招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성만찬에서 우리에게 떡을 주시는 일로써 우리가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하여 생명을 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하늘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의 육체가 그것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것이 아니요, 성령의 신비한 능력에 의하여 그가 자기의 힘을 우리에게도 전입시키시는 것이다.
"그대로 오시리라" ; 내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가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리스도를 잃은 슬품이 누그러져서 아주 제거된다. 그의 오심의 목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속죄주로 오실 것이며 또 우리를 그 자신과 함께 축복된 영생을 누리게 하시려고 곁에 모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호머가 생각해 낸 신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열락에만 관심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놀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는 혜택 없이는 다시 나타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대망하는 일편단심만이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끈질긴 육체적 욕망을 억제하는 일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역경 가운데서 우리의 인내심을 뒷바침 해 주며 그리고 역시 우리의 권태로운 심정을 유화시켜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대망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주로 신봉하는 사람듣에게 그런 효과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도덕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다림이야말로 두려움과 불안을가져 올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들었을 때 아무리 이제는 조롱할지라도, 현재 그의 말씀에 저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 분이 바로 심판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될것이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그리스도께저 다시 오시게 될 때 당시에 그가 입으셨을 것으로 우리가 믿는 그 옷을 그가 입고 계실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어거스틴이 콘센티우스에게 보낸 편지 (제 146편지)에 지적한 것에 대해 나는반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사항은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