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4)

1. 성경 (행 27: 1 ~ 26)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1)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2)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3)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4)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5)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6)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7)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8)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9)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0)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1)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2)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3)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4)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5)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6)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7)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8)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19)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0)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1)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2)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3)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4)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5)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  ;누가가 우리에게 바울의 바다 여행을 설명해 주는 주요 목적은 그가 놀랍게도 하나님의 손길에 따라 로마까지 인도를 받았으며 실제 여행 중에 도 그의 말과 행동등 여러가지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뚜렷하게 드러나서 그의 사도직을 더욱 더 확증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데 있다. 그는 틀림없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이동되도록 인수되었지만 후에 여호와께서는 그를 그와 함께 쇠고랑을 차고 있던 범죄자들과 엄연히 구별하셨다. 뒤에 보면 지휘관이 그를 풀어주면서 죄수들 가운데 자유인 취급을 하고 있다. 누가가 아구사도대로 말하는 대대 (cohort ; 大lit)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혹시 그것은 황재들 통치 이전의 ‘집정관 호위병단’으로 불리던 부대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누가는 분명히 그들이 아드라뭇데 노 항구 소속의 배에 승선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논데 이것은 그들이 아시아 연안을 따라 항해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드라뭇데노는 이올라(Aeolia)의 한 도시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어느 항구에서부터 출발했는지 확실히 이야기할수없다(許3). 왜냐하면 지도가 크계 잘못되어 있지 않는 한(topoqraphicae tahulae; E:4) 분명히 시돈, 방향은 직선거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들이 거기까지 데려 와진 것은 다른 곳에서는 아무데서고 배를 발견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이미 언급된 바 있는 죄수들을 그 지역에서 태워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2 .. …·함께 하니라." ;  누가는 얼핏 다른 사람들을 지탄하는 뜻에서 한 사람의 불변성을 칭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따라 예루살렘까지 갔지만 여기서는 겨우 두명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선한 이유에서 다른 사람들은 뒤로 물러섰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울이 그들의 봉사를 거절했을 수 있으므로 나는 그 어느 쪽도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비록 그가 많은 사람 가운데 남은 한사람이었지만 누가가 그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특별히 칭찬하는 것은 결코 모순된 일이 아니다. 침작컨대 그는 3년간이나 집을 떠나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었음에 를림없다. 앞에서 읽은대로 데살로니가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유력한 가문이 많았는데 (17 : 11) 누가는 그 중에 아리스다고와 세 군도가 바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그와 동행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20:4).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하고 유일한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곧 거룩한 인내의 모범이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는 것은 아리스다고가 어떠한 불편이나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바울과 같은 운명을 감수하며 2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서 로마에서까지 그를 보살피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여행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에게는 많은 사람들의 의욕, 가정과 재산상의 피해, 그리고 많은 경비의 손해를 감당해야 했을 것 이다.

 

"3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 바울은 이 큰 해안 도시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언에 따라 묶여전 사람이었으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백부장은 그를 코를 찌르는 배 밀에 그냥 남겨둘 수도 있었지만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도록 동정심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명을 해쳐 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에만 집착할 수도 없었거니와 그래서도 안되었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의 이해심이 우리 실수로 그들에게 해롭게 되는 일이 없어야겠다. 독자들은 지도를 펴 놓고 누가가 기록하는 항로를 찾아 보도록 하라. 여기서 다만 지적할 점이 있다면 이 모든 점을 기록하는 주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시돈항을 떠나 말타 근처에 이르는 동안의 항해가 폭풍우때문에 어려웠으며 후에 선원들이 장시간에 걸쳐 역풍을 거슬러 분투하다가 마침내 더 큰 폭풍을 만나 파선당하고 말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9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 ; 이 말은 바람이 역풍이었을 뿐 아니라 시기도 일년 중 부적 당한 때 였 다는 이 야기 이 다. 그리 고 그는 ‘금식 ' 이 지났다는 말로씨 이 점을 더욱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 생각에 이 단어는 늦가을을 나타내는 뜻에서 설명 형식으로 덧붙여지고 있는 것 같다. 누가가 여기서 지시하는 금식 절기에 대해서 백부장이나 나머지 선원과 선객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해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온 누가는 유대인의 습관에 따른 절기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때가 가을철 금식기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기간 이 후 스스로 제정한 (슥 8 : 19, 7 : 5) 네 금식 기간 중에 하냐 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떤 세번째 것 역시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지켜지지 않고 있는 만큼 누가가 이것을 언급할때 어떤 특징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넘어갈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그달랴의 죽음과 나머지 백성의 패망 때문에 제정된 날이었다(왕하 25: 25). 다음으로 나는 이 습관이 포로기간 이후 백성들에 의해서 지켜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 그보다도 추측컨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7일간(社9) 괴로와하도록 명령하신 바 있는 속죄절인 것 같다. 이 날은 사실 제7개 월 열흘째 날부터 시작했는데 (레 16 : 29) 이것은 오늘날의 9월과 10월 사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미 10월에 접어 들고 있었으므로 ‘항해'가 당시에 위험스러웠다는 이야기는 아주 타당하다. 그러나 음식 부족을 여기서 그 이유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긴지 알아 들을 수 없다. 왜냐하턴. 그 배에는 아직 밀이 풍성하게 쌓여 있었으며 그들은 배가 고플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왜 그는 자발적인 금식의 시기가 지난 것으로 말하겠는가? 그리고 겨울이 닥쳐 오고 있었으므로 항해를 중단하라는 바울의 경고에서 우리는 이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겨울의 혹한은 대개 바다를 폐쇠하기 마련이다. 물론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배를 조정하실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께서 무모한 서두름으로 시험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11  백부장이 •••.••"  ; 누가는 여기서 백 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은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마땅히 취할 행동은 무엇이었는가?  왜냐하면 그는 비록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바울에게 충고를 들었지만 그는 그에게 항해 기술은 전혀 없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명하고 온건한 사람답게 훈련과 경험이 있는 자들의 말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 항구는 겨울을 지내기에 부적당한 곳이었으므로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선장은 배를 깊은 바다에 끌어 내자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인근 항구로 갈 것을 충고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어렵지 않게 겨울동안 정박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는 공연히 이런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바울은 성령의 조력을 받아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 문제의 거장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충고를 하는데 있어서 그가 은밀한 영감을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예언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나중에 그를 추천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13절) 가다가 마침내 정반대 방향으로 이끌려 가계 되었다는 누가의 기록에 대해서 아손(JuuoJ..1; 駐10)이라는 부사에서 도시의 이름을 지어내는 얼빠진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의 동역자인 베자(Beza)는 잘 지적하고 있다.

 

"15 배가 밀려~~~~~" ;  여기서 누가는 과도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흔히 일어나는 사건을, 곧 그들이 바람에 자신들을 내어 맡긴채 이리저리 끌려 다녔 다는 점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처음 얼마동안 순풍을 탔을때 선원들은 자신들의 계획과 욕구가 실현되는 줄 알고 바울의 충고를 비웃었음에 틀림없다. 지각없는 사람들은 행운이 자기들에게 미소지어 보이는 동안에는 교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 밀리게 되면서 이들은 너무 늦게 자신들의 오만에 대한 벌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그들은 섬 가까이 꿀려 다니고 있었으므로 앞에서는 전복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지만 이제는 배가 파선되지 않을까 하고 전전궁궁하게 되고 말았다. 누가가 이 모든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폭풍이 어찌나 거셨던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지속했던지 계속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뜻에서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파선을 예방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끊임없이 펴는 가운데 화물과 기구까지도 아낌없이 바다 속에 집어 던졌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위험이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에 결사적인 수단을 강구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가는그들이 모든 것을 다시도했으나 허사로돌아가자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사실 저 칙칙한 하늘은 무덤과 같았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는 뒤에 있을 구출의 은총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고자 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그의 종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 말하자면 이젠 끝장이구나 싶을 정도의 단계 이전에는 그가 천사를 통해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의 몸이 폭풍우 속에 뒤척거렸을 뿐 아니라 그의 영혼 또한 격렬한 시험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그가 믿음을 굳게 지켰으며 절망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사실 누가는 그의 기도를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후에 가서 그는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의 한 천사’가 자기에게 나타났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점을 볼 때 모두 다 하늘과 땅을 대고 저주를 퍼붓고 있었지만 그는 위를 향해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선정하신 일을 침착한마음으로기다렸던 것 같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는 누가의 관점이 아니라(ad eius sensum) 인간적인 수단에서 그러했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태가 너무 뒤범벅이 되었기 때문에 볼 때 그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출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나 마찬 가지이다.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누가는 선원들과 군인들의 행동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바울을 그들과 구별하는 가운데 그가 ‘가운데 서서’ 그들의 낙심한 마음을 일으켜 주었다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다. 격려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끈질기게 요동하지 않고 모범을 보이는 사람 뿐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들 모두가 거의 죽음의 밥이 되기까지 이 권면을 보류했다. 불신자들이란 처음에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소동을 벌이며 그 소요의 열기 속에서 온건한 소리는 무시하고 마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울부짖음과 요동에 지친 나머지 벼락을 맞은 사람들처럽 나딩굴고 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좋은 충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그들이 반 죽음 상태에 있는 것처럼 축 늘어지게 되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만사가 잘 되어가고 있을 때, 특별히 그에게 항해기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사실 자기도 자신의 무지를 잘 알고 있었을 때, 자신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을 들어 그들을 탓하 고 있는데 이것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란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제 정신을 차리는데 있어서 얼마나 더딘가 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꾸중은 실제적으로 유익한 것이었다. 맨 처음에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만사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되고 말았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바울이 제 아무리 섣득해도 듣지 않을 그들이었다. 물론 위로가 따르지 않는 꾸중은 잔인하다. 그러나 거기에 처방이 따른다면 그것은 실제로 약의 일부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바울은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그들에게 실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의 말을 신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가르친 다음에 그들에게 용기를 가질것을 권면하며 안전율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작 그의 말을 들었어야 옳았다는 이야기는 비상한 확신에 찬 이야기가 아닐 수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자기가 결코 무모한 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음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다시 밀해서 그때 그에게 특별한 계시가 그에게 주어 졌는 기록은 없지만 그래도 그는 성령의 은밀한 지도를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영을 안내자로 삼고 있던 그는 자신만만하게 권고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앞에서 내가 지적한 점, 곧 바울이 처음에 이런 식으로 선객들의 관심을 일깨우는 것은 그가 앞으로 말하려는 사항에 그들이 더욱 더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해주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똑같이 파선율 당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을 것이다.

 

"23  내 곁에 서서……" ;그가 모두에게 그처럽 거침없이 안전을 약속한 것을 가리켜 너무 경솔하다는 비난을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하나님을 증인과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환상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단의 기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거짓말의 아비로서는 계시를 주는 척 하면서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수가 종종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시거나, 그의 천사를 통해서 나타나시거나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뚜렷한 징조를 보여 주어 온갖 의심을 제거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분별의 영을 허락하심으로써 기만의 여지가 전혀 있을 수 없게 해 주신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깨우침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이 유대에서 예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도그를 예배하는 자 가운데 한명이라는점을 그들에게 알려 주려는 뜻에서이다. 이미 그들은 그가 감옥에 갇힌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게 되자 그의 명분이 하나님의 인준을 받고 있다는 점이 쉽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복음에 대한 찬사가 깔려 있는 셈이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쇠고랑을 차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일꾼과 하나님의 해설자가 된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있다.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  바울은 이미 신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구출의 영광율 잘못 자신들의 우상에게 돌리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일부러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올바론 신앙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사실이 자신들에게 직접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건전하고 울바른 충고에 귀를 막아 버리고 곧장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악성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하는 점, 그것이 자기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아니, 그것을 보지 못하고 눈치체지도 못하는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가 예언의 발표는 효과가 없지 않았다. 제 아무리 배은망덕 했다 할지라도 이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했다.  다른 한편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한다는 고백은 경건한 자들을 크게 격려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 말을 통해서 그들은 그가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하기 위해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증인이요,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하게 되었다.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 누가의 이 말에는 얼핏 바울의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를 하나님께서 파선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위해서 이야기도 했다는 뜻으로 이야기하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확실히 추측컨대 그는 공동 위험을 깨닫고 있었던 만큼 자신의 생명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駐12) 자기와 같이 동일한 위험에 관련되어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등한시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편에서 자발적으로 바울의 기도를 예상하고 미리 서두르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신실한 자들과 뒤섞여 있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확대되는 것은· 결코 금시초문의 일은 아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소돔에 의인 열명만 있었더라도 그곳을 멸망시키지 않으려 하셨다(창 18 : 32).여기서, ‘성도들의 정직성이 불경건한 자들에게 어느 정도로 혜택을 끼쳤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먼저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경건한 사람들 때문에 축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후자는 자신들의 공로에 의해서 세상을 위해 구원을 취득하는 중보자들인 것으로 상상하는 로마 가톨릭의 미신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이 묘사를 죽은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직 죽은 자들을 생각하셔서 산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따라서 죽은 자들을 그들의 수호자로 택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엉터리가 아 닐 수 없다. 그들의 성도들의 공로를 극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하심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접어 두도록 하자.

 이제 앞서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간략하게 이렇게 생각해 보도록하자. 선인과 악인은 함께 뒤섞여 있는 만큼 해로운 일과 좋은 일이 구별없이 양자에게 내려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살려 두실 때 그는 그들과 함께 당분간 불경건한 자들을 남겨 두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음으로 그가 신실한 자들을 생각해서 악인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축복하시는 이유는 많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생각해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은 (창 39 : 5) 그의 마음을 감화시켜 거룩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당신께서 바울에 대한 그의  은총을 많은 사람들을 다치지 않은채로 구원해 주시는 방향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은 당신께서 그의 경건성을 중거하고, 그 결과 복음의 위엄이 광채를 발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에게 선뜻 내주시는 모든 축복은, 신실한 자들이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받는 처벌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듯이, 최종적으로 그들의 파멸을 조성할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동시 에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가 어느 정도 몇 방울 우리에게서 타인에게 흘러 넘치게 하시는 것은 그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훌륭한 보증이 아닐 수 없다. 

 

"25  나는… .• 하나님을 믿노라." ;  바울은 또 무엇 때문에 바다의 그 무수한 횡포의 심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두 항구에 도착할 것이라는 점을 거침없이 주장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나오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될 것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은 믿음의 성질을 잘 설명하고 있는데 믿음과 하나님 말씀 사이에 상호 관계가 설정될 때 그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여러 가지 시험의 공격을.막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배에 탄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을 통해서 믿도록 격려할 뿐 아니라 말하자면 보증인(sponsor)의 역활을 담당함으로씨 그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게 하고 있다. 다음에 곧 이어지는 점'에 대한 설명은 이 사건이 끝났을 때 이 항해에 불확실성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줄 징조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이 도망할 방향을 알아 봤자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약속하신 안전을 특별히 구별함으로써 그것이 결코 우연히 된 일처럼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 서 그들의 마음을 불안한 상태에 그냥 놓아 두신 것은 한편으로는 당신의 종의 신앙을 단련하고 한편으로는 어느 인간의 마음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바울이 성령으로부터 배워 알았다는 접을 모든 사람에게 알 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누가의 본문은 그들이 그러한 관계에서 바울이 얘기한 것을 믿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선원들은 자기들이 육지 (al3)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집작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섬에 내릴 것이라는 약속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쓰라린 체험을 한 그들이지만 결국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믿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