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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행26:1)

1. 성경 (행26:1 ~ 23)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1)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2)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3)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4)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5)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6)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7)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8)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9)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0)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1)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2)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3)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4)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5)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6)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7)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8)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19)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0)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1)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2)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 3절" ;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청중 앞에 서게 된 목적을 언급한바 있다. 그것은 곧 베스도가 아그립바와 다른 사람들의 충고에 일치하는 내용의 굴 을 황제에게 쓰려는 목저에서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단순한, 또는 일상저인 변명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연실을 가르치는 면에 치중하 고 있다. 물론 누가는 번호형식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온 가르침에 찰 어울리는 그러한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베스도가 율법과 선지자 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뿐 아니타 그것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대 종교에 결코 낯설지 않은 왕에게 돌 아서 서 그가 경 청 해 줄 것 올 바라고 있 다. 그리 고 지 금까지 는 소 귀 에 경 만 읽 고 있던 그였으무로 그는 이제 이미 알고 있으며 체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대하게 된 것을 자못 흐뭇해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그립바가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재판관이기 때문에 그를 칭송하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더 참을성있게 들어줄 것을 그에게 요청하는 것 온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무관심과 증오심을 변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 이다. 문제(question)란 종교를 너무 오밀조밀하게 파헤치던 서기관들이 혼히 다루던 교의의 핵심을 두고하는 말이다. 그리고 풍속이란 이스라엘 민족전 체에게 공통적인 의식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아그립바가 율법의 가르침이나 의식에 대해서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미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바 있지만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 기를 바라옵나이다'하는 결론은 우리가 성경 지식에 발전운 볼수록 우리는 신앙 문제에 대한 토론이 지행될 경우, 그만큼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우리를괴롭히는법은 없기 때 문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예배에 대해서 관십을 갖되 그것을 설명하는 말 을 듣기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 특별히 우리가 이미 원칙을 알고 있을 경우 우리가 거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 이다. 

 

"4,5절 생활한 상태틀·… " ;  그는 아직 소송사건의 내용을다루지 않고있다. 그러나 그는 여러가지 허위전술로 수치를 당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무죄성을 주장함으로써 아그립 바 왕으로 하여 금 사람에 대 한 증오심 때 문에 자신의 문 계에 대해서 져대감을 갖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좋지 못 한 의심이 자리 잡을 경우 모든 감각은 폐쇠되고 어느정도 받아 들여질 수 없게 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짓 소문으로 시작해서 뭉쳐진 구름과 같은 못된 견해롤 먼저 몰아냄으로써 아직 귀가 맑게 소제된 자듣에 게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움이 자기 가전에 지내온생활을 추천하게 된 것은 소송내용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타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방면에 장시간을 소비하지 않 고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접을 지적하고서 곧장 죽은 자의 부활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서 가장 엄한 파타는 말은 더 거룩한 생활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가르침의 보다 순수한 전실성이 거기에 남아 있었으며 보다 많 온 지식이 거기서 특충하게 드러났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요컨대 그들 온 자신들에게 성경에 대한 은밀한 이해가 있다면서 뻐기던 자들이다. 사 두개인들로 말하면 비목 자신들이 직역 주의자들(literates)이라는 점을 자 랑으로 여겼지만 성경의 빛을 여지없이 꺼버리고 철저하계 수치스러운 무지에 빠진 자들이다. 에센파로 말하면 금욕 생활로 만족할 뿐 가르침의 연 구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바 리새인들이 성경을 가장 악독하게 곡해하는 자들로 비난하고 있는데 이것이 여기에 대해서 반론이 될 수는 없다(마 23 : 13). 왜냐하면 성경을 은밀하 고 숨겨 진 의 미 에 따라서 (ex arcano et recondito sensu) 해 석 하는 권 리 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바로 뻔뻔스럽계 변화와 변혁을 일삼는 근원이 되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이점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랐었기 때문 이 다. 그러 나 바울이 그들이 그처 럼 무모하게 고안해 서 가혹하게 강요했 던 그 조작물들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오직 죽은 자들의 부활 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비록 여러가지 면에서 율법을 곡해했지만 참된 신앙을 보호하는 떤에 있어서 는 본래의 순결성에서 훨씬 빗나간 다른 파의 사람들 보다 그들의 파의 영 향력이 더 컸던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지금 비교 져 미미한 지식에 대한 외형적인 전시를 중시하는 일반 대중의 견해를 피력 하고 있을 뿐이다. 

 

"7 이 약속은." ; 이제 그는 소송 내용으로 돌아가서 그가 전체적인 신양 의 핵심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비 목 부활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논 그 가 보다 머 근본적인 원리로부터 시작했으며 복음의 신앙에 관한 것을 거기 에 또한 포함시켰을 것이타는 점울 문맥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조상 에게 약속하신 소망'을 확고하게 주장했다면서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다는 점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변명의 시작, 아니 핵심은 하나님께 서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이 영원한 구원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 대인들의 관심이 하늘을 지향하지 않고 또 그들이 새 생명의 근원인 그리스 도에게 시선율 둘리기 전에는 유대인들의 종교는 무가치하다는점이 이 변론 의 본질이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지상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 자기들만을 선택하셨다는 점을 시끄럽게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된 중보 자에게 의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바타보지 않는한 그들의 입양온 무 용지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의 표면적인 기록 이상의 것을 이해하 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 설화에는 오직 한 가지 의도만 담겨 있는데 그 것은 바울이 무슨 주제를 다루었는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무엇이었으며 무슨 말을 사용했는가 하는 접을 언급하겨 않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 간략한요약에서, 좀더 침착하게 이야 자유롭고 솔칙하계 진행된 이I 논쟁 기할 기회가 허용되자 아그립바 앞에서 에 속한 문제를 엿볼 수 있다.

 

"우리 열 두 지파가 .." ;•.. 그는 아그립바 앞에서 교회의 상황이 어찌나 타 라했던지 제사장들이 신실한 자들의 공통적인 소망에 대항해서 싸움을 벌이 고 있다는 접을 실토하고 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엄격하계 하나님.:.울 예배 하며 밤낮으로 신앙의 임무에 헌신하는 처 사람들을 보십시요. 그들이 그 처럼 자기들의 기도를 정성껏 울리는 것은 마침내 영생을 얻으려는1목적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읍니까? 그려나 나의 모든 가르침의 목표독 바로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속의 은혜를 제시하는 것은 하늘 나라의 문을 열 어제치는 것이나 다름 없읍니다. 그리고 나는 구원의 주님께서 죽은 자 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움을 받았다는 접을 전파함으로써 그의 이름으로 (in His Person) 복된 불멸의 첫 열매률 바치고 있는 셈입니다'하는 식이다. 이처럼 그는 조상에게 맺어전 약속을 공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가르 침에 대한 첫 확증을 하나님 말씀에서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교회 의 협의 내용을 덧붙이 고 있다. 신앙의 교의를C 확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의 권위를 앞세우고 다음에 교회의 인준사항을 지적하는 것이 올바론 순서이 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자신의 모법을 동해서 가르 치고 있듯이, 참 교회를 현명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떤 그는 제 사장들이 그에 게 가짜 교회 (ecclesiae larvam)의 형 의 를 뒤 집어 씌 우고 있었지만(社2) 그는 전지한 하나님 예배자들은 자기 편에 있으며 자기는 이 둘의 지지로 만족하고 있다는 접을 거침없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댜 다시 말해서 그는 열두 지파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야곱으로1부터 태어난혈족 을 마구잡이로 싸잡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에 대한 진정한 열 성을 견지하고 있는 자들만을 뜻할 뿐이다. 요컨대 하나님 경외가 극소수의 무리들 가운데서만 성행하고 있었는데 구별없이 민족 전체를 칭찬하는 것은 합당한일이 아니었을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인간의 의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매장해 버리며 아 무런 수치십이나 변명도 없이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 밑에 무식하고 불신앙 적인 인간들의 얼룩덜룩하고 무가치한 잡소리를 구별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적롯된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참된 교회와 일치하고 있다는 겁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선지자들과 사도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으며 그 다 음에 경건성이 넬리 입증된 사람들을 덧붙여야 한다. 설령 교황과 그의 교 최자단이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로서는 크게 신경 쓸 바가 못된 다. 그러나 전정한 신앙적인 태도는 지조와 열정 (許3)으로 입증된다. 그리 고 이것은 특별히 유대인들이 비참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을 때 귀한 가치를 발휘했다.

 

"8.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 나는 룰림없이 그가 이론 과 증거가 되는 성경의 본문으로 부활과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 확증한 것으 로본다• 그러나그는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 지켜 중으로써 그들이 이 문제를 자신들의 이해도에 따라 평가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 완전히 무로 전락하 고 만 상황에서 그것이 장차 새롭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간에게 주지시키는 것처럼 또. 어려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신비는 인간의 마음으 로 이해하기엔 너무도 오묘한 것이므로 신실한 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자 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광대한 능력이 얼마 나 넓게 미치는가 하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동일한 바울이 빌 립보 3장 21철에서 경고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대시 말해서 그는 우리의 비 천한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지 적 하면서 그는 .. 만물을 자신에 게 복종시 킬 수 있 는 효과적 인 능력 (efficaciam) 에 따라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팔이 자신들의 이해 이상으로 더 멀리 뻗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타는 인간들은 통상 하나님께 불 평을 토로하며 불성실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 수 있는한최선을 다해서 천지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광대 무변한 일을 자신들의 좁은 지성에 국한시키려든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할 것을 명령하며 그 결과 이 제상의 수준 올 벗어나서 우리의 지성의 연약한 연량이 아니라 그의 전능(全能)에 따라 부황의 신양을 포착하도록 하고 있다. 

 

"9. 나도~~~~~" ;. 바울이 누가가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것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연설은 연관성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이것온내가 앞서 지적한 정, 곧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직무와 은혜를 다뤘으며, 이것은 상황이 요구했던 그대로라는 점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리 고 그는 여기서 그의 회심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경솔에 대한 비난을 제거할 뿐 아니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으며 하늘 로부터 행동을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점울증거하려는뜻에서이다. 말하자 떤 그가 갑자기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이리에서 양으로 변화된 접을 생각할 때 그러한 전격적인 변화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성을 얻는데 더없이 유 효적철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대적해서 상처를 입 혔던 자신의 적극성과 요지부동했던 억쳐스러움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그리스도의 신앙을 먹고 자란 사람이었거나, 다몬 사람 의 가르침을 통해서 아무런 처항을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소명이 개인적으로는 확실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제는 벌로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지부동하게 격렬했으며, 어 떠 한 인간의 설득도 불사하던 이 사람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을(novam m,entem induerlt) 때 그가 하나님 의 손길 때 문에 굴복했 다는 점 이 분명 하 케 되었다. 그러므로 이 대조가 중요한 것은 그는 사악한 자만심에 들뜬 나 머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인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정을 상기시켜주고 있으며 그가 그리스도의 한 제자가 된 것은 결코 자신의 지성의 성향에 따라 이루어전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이것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바 울이 멍청하계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시도하떤서 뿌리 뽑아 버리려고 결 심했던 복음에 대한 전반적인 공적 고백으로 보아야 한다.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 그는 실제 행동을동해서 보다더 강력한 힘이 그를 휘어 잡아 발걸음을 뒤바뀌 놓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는 꽁 격하려던 열성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타 그. 의 원수들도 그의 이 열정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그의 변화가감 작스러운 것이었다는 점은 쉽게 증명될 수 있었다. 그가 만약에 무자비하계 박해를 가하지 않았더라면 제사장들은 그 입무를 그에게 말기지 않았을 것 이요, 그.문의 분노를 만족시켜 주기위해서라도 담대하게 나울 수밖에 없었 던 그였다. 1.러나 여기서 주목할 정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 한 죄가 얼마나 십각했던가를 고백함으로써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 내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것을 부끄럽없이 실토하고 있다는 점 이다. 그가 맹 목적인 열성에 사로 잡힌 나머지 하나님을 섭기려는 자들에게 억지로 참담 한 모독을 내뱉계 하고, 선하고진실한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을 끼치며, 최 없는 자의 피를 훈리도록 찬성두표를 던지고 마지막으로, 하늘 율 상대로 의기양양하게 덤비다가 마침내 땅에 나딩굴게 되었다는 사실온 어느 모로 보나 그에게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거기 서 더욱더 뚜렷하계 비차는한그는자신의 인격을개의치 않고자신의 수치 를 낱낱이 들추어 내그 있다. 따라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아무런 요청도 없었는데 온 백성의 칭찬과 인정을 받던 일을 나열함으로써 스스로를 고소하고 있는 판에 아무도 그의 연설을 미십적은 것으로 볼 수 없 었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남들이 귀하게 여겼던 자신의 광적인 열성을 정 최하고 있다. 이 사실은 자신들이 무지나 실수로 저지론 잘못마처 간단히 고백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의 허영십이 얼마나 꼴사나운 것인가 하는 접율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히 변명하려 들지는 않지 만 비통해 하고 눈물을 훌리며 용서를 빌어야 마땅한 문제를 극소화 하거나 얼버무리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온 자신이 현명한 사람이타는 평판 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미치광이였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 누가가 여기서 사용하는 단어는(駐7)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참람한 말을 하 도록 강요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멘처음 신자들 가운데 쓸모없는 사 람둘, 곧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고백해 놓고 나서 겁이나 매가 무서워 연약 해전 나머지 그를 부인할 뿐 아니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욕한 사람들이 많 았다는 점을 알수 있다. 실제저인 부정에는이미 무서운 모독이 포함되어 있 는 셈이다. 

 

"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이것을 말하는 목적은 아그립바 왕으로 하여금 그것이 결코 공연한 환영 (apparition)이 아니었으며 그것이 자신의 의 식과 판단력을 박탈할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었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하는데 있다. 말하자면 비록 그가 공포에 압도되어 땅에 나가 넘어졌지만 그 는 분명히 음성을 듣고, 그 목소리 임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며, 거기에 따른 대답을 이해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이 질서 정연한 상태에 있다는 징 조이다. 여기서 그는 우연히 변화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고의적으로 반역을 계속하지 않는 뜻에서 하늘의 음성에 마음을 다해 충심으로 순종했다 는 결론이 나온다.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 ;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땅에 쓰러뜨린 것은 그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를 일으켜 제우며, 용기를 가질 것을 권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날마다 그의 음성을 듣고 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를 더 없이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목저에 서이다. 그러나 그가 쓰러 뜨린 사람은 그가 곧 다시 친절하게 일으켜 제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의 광적인 행동, 그가무참하게 가한 매진, 성 도들에게 가한 흡혈귀 같은 선언과 괴로움, ,그리고 복음에 대한 불신앙져인 반대에 대한 처벌을 여지 없이 부과하는 복수자로서가 아니라 그의 봉사륭 활용하고자 하며 그에게 영광스러운임무를 맡을 자격이 있다고생각하는자 비로운 주님으로서 나타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저찮은 판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환상온그리스도께서 하늘을지배하신다는점을가 르쳐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그를 더 이상 몰지각하게 무시하지 않고 그가 하 나님의 아들이요 약속된 구속자타는 점을 이해하계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다른 계시도 받았다(고후 12 : I). 

 

"17 내가 너를 구원하여……" ;여기서 그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모든공포 륜 이겨낼 수 있는 무장을 받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십자가를 질 자격을 구 비받고 있다. 하지 만 주님께서는 곧 이어서 바울이 가서 눈먼 자들을 깨우치 고, 하나님과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들을 화해시키며 잃어전 자들에게 구원을 회복할 것이타는 점을 덧붙이떤서 그런 특이한 축복을 받는 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그를 즐겁고 기쁘게 환영할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지 않는 것 온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세상의 배은망덕이 암시되고 있는데 세상 은 영생의 일꾼들에게, 마치 정신병자가 자기 의사에게 적대적인 공격을 가 하듯이 정반대의 보상으로 다시 갚기 마련이다. 그리고여기서 바울은~그가 어 디 를 가든· 그가 위 해 서 혜 덱 을 베 풀려 고 안간 힘 을 쓰는 사람들의 대 다수가 그에게 적개심을 풍을 것이요. 그의 파멸을 꾀할 것이타는 경고를 받고있다. 한편 바운은 그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증인 노릇을 하도록 임명 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구별없이 쌍방에 공통적으로 건하는데 대한 비난을 받 올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자기들과 똑 같이 취급되는 것을 분개하면서 바울에게 그처럼 극렬한 증오심을 풍었다. 그러나 설령 그들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맺으신 언약이 이방인 들에게 양도됨으로씨 속화되는 것을 막는다는 핑계로 그처럼 극성을 부리는 처하겠지만그들을몰고다닌 것은순전히 사리사욕 뿐이었다. 왜냐하면그 둘은 자기들만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나머지 모든 민족은· 서열상 뒤에 오기 를 바랐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한사람을 동해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되 인간들의 악의 때문에 하나님의 온혜를 비참한 사 람들, 그들이 제 아무리 무가치 하다 해 도, 계 속적 으로 베 푸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격려를 받고 있다. 

 

"18. 그 눈을 뜨게 하여 ....." ;. 바울은 얼핏 하나납께 마땅히 속한 것을 자기 자신의 일로 자화자찬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연 인간의 마음의 눈 온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깨우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률 사단의 횡포 에서 낚아 채어 내는 유일한 해방자는그리스도 뿐이요, 우리의 최를 밀한 다 에 성도들의 몫을 받도록 맞아 주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그러나 흔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만 돌아가야 마땅한 영예를 그의 일꾼들에게 양도하시 는데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자신에게서 취해가도록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가 그들 속에 제시하는 그의 영의 효력을 천거하는 뜻에서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들이 가서 낡은 도구가 되거나 연극 배우가 되타고 파송하는 것이 아 니라 그가 그들의 도움으로 강력하게 역사할 수 있도록 하는 뜻에서 파송하 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전도의 효력은 ‘모든 것들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 사하시며' (고전 12 : 6) '자타계 하시는' (고전 3 : 7) 문의 은밀한 능력에 의존 할 뿐이다. 그러므로 교사들의 파송은 그들의 빈 말을 허공에 뿌리거나 쓸데 없는 소리로 사람들의 귀만 시끄럽계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타 눈먼 자에게 생명을 주는 빛을 가져 오고,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를 심어주며, 그리 스도의 죽음으로 이 루어 전 구원의 은혜 를 확증하려 는 뜻에 서 오늘날 이 루이 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가운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모든 일을 하나도 수행할 수 없 다. 따라서 결과가 그분에 게 서 오기 때 문에 모든 찬양온 그분에 게 만 돌아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성경이 외형적인 사역을 크계 칭찬하고 거기에 영광을 돌 릴 때마다 이 외형적인 사역은 마치 영혼이 있어야 몸이 살아나듯이, 거기 에 생명을 불어 넣는 성령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겠다. 다론 귀절에 보면 성경은 인간의 활동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며(注8) 그 것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밍고 물주 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의 일이다(고전 3 : 6 이 하). 그러나 자신들의 무지와 악의 때문에 방해를 받아 복음에서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결실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우리는 비길데 없는 보화를 우 리 눈 앞에 간략하고 멋있게 제시하는 이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려 므로 복음의 목표는 우리들이 정신저 눈이 먼 것에서 구출된 다음에 하늘의 빛에 참여하며, 사단의 지배를 탈피해서 하나님께 돌아 가며, 죄에 대한 값 없는 용서를 받아들여 성도들과 함께 영원한 상속을 누리도록 하는데 있다. 복음 안에서 전전을 보고자 하는 사람온 마땅히 거기에 자신들의 모든 의식올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복음의 참된 용법을 이해하지 못한 다면 그것을 날마다 우리에게 전파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와 동시에 여기에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완전한 방법이 묘 사되고 있다. 모두들 구원 받고 싶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 을 구원하고자 하시는가 하는데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그 러므로 그 방법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귀절은 마치 하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뿐만 아니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의 복음에 대한 신 앙을 동해서 획득하는 것으로 선언하시는 처 축복을 온 인류는 태어날 때부 터 박탈당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할 펼요가 있다. 따라서 모두가 눈이 먼 것 온 그들이 신앙으로 깨우침을 받기 때문이요, 모두가 사단의 종인 것은 그들 이 신앙으로 그의· 횡포에서 해방되기 때문이요, 모두가 하나님께 원수요 영 원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기 때 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인간에게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신앙이 없 는 것 보다 더 비 참한 노릇도 없 다. 여 기 서 또한 명 백 하계 드러 나는 것 은 인 간의 자유 의지와 공로에 대한 여지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이제 몇 가지 내 용을검토해 보도록하자. 깨달음이 하나님 지식에서 오는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통찰력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전리를 통해서 우리에 게 바춰주시기 전에는 한낱허사요, 질은 혹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는'일은 우리가 ‘심령으로 새롭게 될, (엡 4 : 23)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이 절(節)과 다음 절,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타는 말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 이 에베소서 2장 10절(~9)에서 상세하계 설명하고 있는 갱신은 여러가지 다른 표현법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죄사함이 언급되 고 있는데 이것을 동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에게 화해시키며 그 결 과 우리 는 그가 우리 에 계 화해 로우시 며 (plactum) 인자하실 것 이 타는 점 을 확실히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의 완성, 곧 영원한 생명의 상속으로 꿀을 맺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 가 운데서, (社IO)로 읽음으로써 믿음을 여기에만 국한시키는데 그것이 잘못인 것은 그것은 이 귀철의 모든 절(complexum)을 다 수식하는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제공된 모든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일이타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한 것은 그분 안에 우리의 구원의 모든 국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복음온 우리가 그분을 떠난 다른 곳에서 이것들을 구하는 것을 금하 고 있기 때문이다. 

 

"19,20절" ; 여기서 그는 자신의 회심 사건을 이야기하는 목져올 간략히 알하고 있다. 곧 그는 아그립바와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과 배도로 정죄하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겁울증 거하고 있다. 그가 아그립바의 이름을 지속하며 연설하는 것은 베스도와 로 마인들은 하늘의 환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한 것은 그의 가르침의 본질은 실제로 율법과 선지자들과 불일치하거 냐 동떨어전 것이 아니라는 점이요, 그 결과 바울에게 성경과 일치하는 것만 가르치도록 명령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신임하게 되고 있다는 점이 다• ‘회개'라는 말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덧붙여지고 있는데 이것은서 로 다몬 무엇이 아니라 우리에게 회개([tll)의 의미와 타락이란 하나님으로 부터의 소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주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회개는 내면져인 것이요 마음의 성향에 의존하는 것인만큼-바움은 다음으로 그것을 입증하는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마 3 : 8)는 세례 요한의 권면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복음 모두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모두가 본성져으로 악 하고 타락해 있으며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귀절은 또한 그리스도의 은해를 회개와 구별시키는 자들은 우매하게 복음을 곡해하는 자 들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21 유대인들아 .------나를 잡아축이고자 하였으나." ; 여기서 그는 자기 원 수들의 불공평 을 불평 함으로써 그들이 못된 양심 으로 못된 소송을 제 기 하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에 바울이 무슨실수를처 질렀다면 그들에게는 더 큰 영향력과 권위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얼마든지 그에게 불리한 법적 철차를 밟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더 유리한 입장을 군힐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그들이 타고날아덤벼드 는(駐12) 분노를 그들에게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점을 입증하는 셈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도우십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바울의 말은 그의 가르침 을 효과적으로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킬을 뻗치사 그에게 도움 을 베푸신 것은 그가 그의 일꾼을 인정하고 그가 인준하는 것의 명분을 변 호하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뿐만 아니타그는하나님의 도 웅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머욱 더 한결같이 계속하는데 큰 격려를 받 았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시는 분으로부 터 움츠려 든다면 그것은 배은망덕한 사람의 표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위험에서 낚아채질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대만한 가운데 우리의 생명 을 야금야금 갑아 먹으라고 그것을 연장해 주시는 것이 아니타 자신을 위 하여 우리를 보존지켜 주시는 분의 영광을 위해서 기민하게 우리의 임무 를 수행하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렇다는 점을 우리는 이 분을 동해서 배우 고 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총독에게 신세지고 있던 점을 망각한 것은 아니 었다. 그가 여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내세우는 것은 비목 자신의 구충 이 인간의 대리 행위와 일을 통해서 실제로 이루어졌지만, 그를 구출해 주 신 분에게 자신의 나머지 생애를 바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뜻 에서이다.  

 

"22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중거하는 것은" ;. 우리는 ‘중거한다’는 말에. 가르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다른 곳에서 지져한 바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위엄을 확립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엄숙한 논 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높고 낮은 사람’에게 증인이타는 점을 말하고 있는 데 이것은 아그립바에게 이 이야기가 그에게도 해당한다는 점과 비록 구원의 가르침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시되고 있지만그렇다고해서 그 것이 왕에게까지 울타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점을깨닫게 하려는뜻에서이 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동일한 말로 이꿀어 자기 품에 모으십으로써 과 거에 전펄 속에 누워있었으나 이제 큰 영예를 누리도록 일으켜진 자들은 그 의 은혜로운 선하심을 자랑케하고, 실제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자들은 자발적으로 겸손한 자세륜 취하는 가운데 비천한 오합지졸에서 형제들이 모 아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보고 당황해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마 찬가지로로마서 1장14절에서 그는자신이 ‘‘지해있는자나어리석온자에 게 다 빛전 자타"는 정을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지해에 대한 자만심 때문 에 로마인들이 그의 가르침 에 굴복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고 있다. 우리 는 교사에게는 자신의 청중을 선덱할 권위가전혀 없으며 교사들이 하나님께 서 낮은 사람들과 하나로 보시는 높은 사람들에게만 자신들의 수고를 제한 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사취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 독하는 처사타는 점을 여기서 배워야겠다. 이것을 사람의 연령에 따라서 국 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자와 무지한 자 의 구별이 이제 완전히 제거된 셈이다. 왜냐하면 바울은건자의 우위성을존 중하지도 않고 후자의 무가치성을 멸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쌍방에게 구 별없이 신실한 교사라는 점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말한 것밖에 없으니" ;. 먼처 주목할 정은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재 일가는 마땅한 증인을 사람들에게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룰림 없는 권위를 허용한 모세와 선지자들을 예로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의 입에서 직접 나온 것만을 언급하는 것이 건전한 가르침의 제 1원리이다. 다음으로 누가는 여기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변론의 핵심은, 자신의 죽 음을 봉해서 세상 죄를 속죄하고 자신의 부활을 동해서 인간들을 위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별한 역할이타는 겁을 지져하는 것이었 지만 그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는 유대인과 이방인 쌍방에 공동적이다. 그려 나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율법에 명백한, 아니 그들 이야기대로, 굳 자그대로의 중거가 없으므로 그들은 이것에 대해서는 조상에게서 물려 받았 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비유를 배웠음에 룰림없다. 그리스도에 한 예언에 있어서 보다 더 명백한 선지자들로 말하면 그들은 바로 이 율범 의 원천에서 물을 길을 뿐이었으므로 그들의 가르치는 바가 모세와 전혀 다 르지 않다는 점을 자기 세대 사람들에게 확신지켰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의 변명을 종결짓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자신의 근 원(autores)이타는 점을 인정한 바 있는 이 모든 사실을 보다 며 명백하게 증거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23 먼저 다시 살아나사·" ;…·복음서 기자들(마 27:52철에서만)이 언급 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보다 먼처 무덤에서 나왔으며, 이것이 에녹과 엘리 야의 승천(창 5 : 24, 왕하 2 : 11)에 일치한 것으로 본다면 이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시간상으로 선행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를 가리 켜 ‘처음'부활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그를 가리켜 부 활한 자들 가운데 첫 열매로(고전 15 : 23) 말하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시간상의 순서보다 원인을 묘사하는 것임을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일 어나심으로씨 사망의 정복자와 생명의 주인으로 동장하셔서 영원히 통치하시 고 자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의 복된 불멸에 참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빛’이타는 단어에는 완전한 행복을 이루는 모든 것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어둠'이타는 단어가 성경 모든곳에서 모든 종류의 죽음과 비참을 묘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다음과 같은 선지자들의 말을 두고 한 것임에 틀림없다. "혹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사9 : 2) ‘‘보타, 어두움이 땅을덮을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 와께서 너1 위에 임하실 것이며"(사 60 : 2), 업두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사 4:!: 16),다룬 세워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6;49:6). 그리고 이 밖에 많은 예언을 참고해 볼 때 생명의 빛이 유대지역을 벗어나 이방인들에게 멀리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