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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행24:25)

1. 성경 (행24:24 ~ 27)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4)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5)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6)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2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4절 (칼빈, 25절) 벨락스가 .. … •• 드루실라와·" ; 나는 이미 벨릭스의 악의와 타락에 대해서는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그의 아내 드루실라로 말하면 누가가 처참하계 죽은 것으로 12장에서 묘사하는 아그립바 1세의 딸이었다· 그녀는 본래 안디옥 왕의 아들 에피파네스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남자측에서 유대 의식에 따를 것을 약속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자 다음 장에 나오는 그녀의 형제 아그립바 2세가 그녀를 자기들의 부친 사망 후에 에메센의 왕. 아지주스(Azizus)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벨릭스의 아첨에 끌려 그녀의 남편과의 생활을 청산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그녀의 절세 미모에 사로잡힌 벨릭스가 구부로 출신인 시몬이라는 유대인을 선동해서 그녀너에게 새로 결혼하도록 유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지를 말하자면, 이 방탕한 여자는 그녀의 결혼 서약을 파기하고 율법에 어긋나게 할례받지 않은 남자와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부정한 결혼으로 자신을 더럽혔지만 이 귀절에서 볼 때 그녀가 유년시절부터 받아 온 종교심이 그너의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말하자면 벨릭스가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고 그와 말 상대가 되는 척한 것은 모두 그의 아내를 기 쁘게 하기 위한 짓 이었다. 물론 누가는 이 점을 그렇계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지만 드루실라를 지목함으로써 그는 바울이 그너를 위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버림받은 자들은 진지하게 배우려는 마음이 아니라 단지 호기심 때문에 안달을 부릴 뿐이다.

 

"도를 듣거늘," ; 바울의 고백은 그가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이유는 그가 그의 목숨이 무서웠거나 십자가의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을 했을 때 들어 줄 기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증거해 주고 있다.   죄수의 입장에서 심판대 앞에 소환을 받은· 그로서는 자기에 대한 고소 사실에 대해서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무 제 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차후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제 말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하자 그는 총독을 두려워 하거나 위험에 겁을 집어 먹은 나머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울 교묘하게 위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한결같은 인내뿐 아니라 분별력과 판단력을 부여받은 사람이었으며 고의적으로 복음의 빛을 갑춘 것이 아니라 시간을 선택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섭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종 종 버림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하시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 혜택을 받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욱 더 핑계가 없게 하려는 뜻에서일 뿐이다.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경우 차라리 그리스도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듣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나을 뻔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재시된 구원의 은혜를 배척하고 멸시하며 소홀히 한 죄에 대해서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심겨진 경건의 씨앗 때문에 복음을 갈망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듣는 순간 그것을 혐오하거나 견달 수 없어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는 점을 여기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동시에, 복음 전파의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이 인간을 죽이건 살리건 간에,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름다운 향기이다(고후 2 : 15)..

 

"25 절 (칼빈, 26 절) 바울이 ••••.• 강론하니 •• …" ;·벨릭스는 바울과의 대화를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담으루 귀를 즐기려는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에게 아무런 누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아내의 욕구도 채워주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하나님 말씀의 효력을 억지로나마 깨닫고 있는데 그 효력이란 전에 생각지 못했던것이며 자신의 모든 즐거움을 앗아가는 그러한 것이었다. 바울을 쇠고랑을 찬 입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권율 쥐고 있는 장본인은 후들후들 떨고 있었는데 그 꼴이란 마치 재판관 앞에서 떠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유일한 대비책은 그를 자기 눈 앞에서 제거하는 것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바울의 마음 뿐 아니라 그의 혀에까지 얼마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셨는가 하는 점을 깨달아야겠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굴종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처럼 자기에게 위임된 사명을 장엄하게 수행할 뿐 아니라 착고에 매인 최수라는 점을 망각하고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의 심판을 행사하고 있다.

 벨릭스의 마음이 구금된 자의 말을 듣고 그처럼 당황하고 있다는사실에서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요 16 : 8) 하는 말로써 그리스도께서 극찬하신 성령의 위엄이 드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바울이 고전 14장 24절에서 칭송하는 예언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에게 얽매인 일이 없다는 (딤후 2 : 9)말에 대한 성취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그는 그것을 거침없이 담대하게 선포했을.뿐 아니라 그것이, 마치 하늘에서 번적이는 번갯불처럼, 자신들의 위대성으로 교만한 자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십판이 버림 받은 자들을 치지만 그들은 그 심판에 대한 공포심(terror)만 가지고는 회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벨릭스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유일한 재판관이라는 말을 듣고서 당황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그가 두려워하는 심판대를 회피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거짓 술품이다. 그러므로 회심에 공포가 필요한 것은 자발적인 죄의 증오심을 불러 일으킬 뿐 아니라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의 말씀의 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죄인이 상처를 입은 장소에서 약을 구할 때 거기에는 참된 성과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철저히 심문한다는 것은 그가 괴로와하고 있는 잘못을 공개하게 할 뿐 아니라 다가 올 심판을 그의 양심에 직접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바울은 의와 절제에 대해서 논의함으로써 벨릭스의 허(虛)를 찌른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철두철미한 방탕생활을 하는 호색적(好色的)인 인물이며 불의에 빠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26절 (칼빈, 27절) 돈을 받을까 ......" ; 비록 바울의 정직성이 벨리스에게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돈받고 그를 정죄하는 것을 수치로 여길 정도였을지라도 그러나 그는 타락한 습관에 빠진 탐욕꾸러기였으므로 그를 거저 방면해 주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는 바울을 자꾸 불러들여 알랑거리는 말을 하며 그에게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돈만 아는 재판관들은 타락한 방법을 꾀하고자 할때마다 그처럼 살살거리기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토론을 들을 때 벨릭스률 사로 잡았던 공포심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무서워서 자기 곁을 떠나도록 했던 사람이 이득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사람을 다시 불러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벨릭스는 무일푼의 가난뱅이에게서 돈을 기대할 수 있었는가?   한 종의 노략물 정도로는 그의 밑빠진 독이 허기를 채울 수 없을 터인데 말이다. 정의를 팔아 먹는 사람들은 예리하고 수완이 좋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그처럼 강력하게 바울을 죽이라는 압력을 가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존경 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어령풋이 가졌음에 틀림 없다. 따라서 그는 그의 많은 천구들이 기꺼이 그를 구출하는 대금을 치를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27 절. (칼빈, 28 절) 이태를 지내서……" ; 바울은 돈만 아는 재판관이 돈을 받고서야 자기를 놓아 줄 것이라는 점과 그가 그것을 모으는데 재미를 본 사람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추측컨대 그는 형제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시 공무원 세계의 청결성을 오염시키는 부정 거래를 보고 아주 겁을 먹은 나머지 뒤로 물러서 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그런데 총독들은 자기 관찰 구역에서 떠날 때 아무런 죄가 없는 줄 아는 죄수들은 풀어 주는 습관이 있었지만 벨릭스는 비위를 맞추려고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유대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의 수치스런 돈벌이, 약탈 행위, 잔인성, 그리고 해이한 통치를 들고 탄원을 했었다. 그러자 글라우디우스 황제는 그 숱한 탄원에 지친 나머지 그를 유대로부터 철수시켜 버렸다. 그는 그래도 유대인들의 적대감을 줄여 보자는 속샘에서 바울을 구류해 둔 채 떠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의 죄 없는 종을 마치 속죄제물처럼(注 13) 자신의 죄악 대신 대치시켜 놓음으로써 제사장들의 비위를 맞추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