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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누가복음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0)

1. 성경 (눅15:11 ~ 32)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1)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2)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3)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4)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6)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7)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8)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9)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0)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1)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2)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3)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5)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6)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 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7)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8)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9)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0)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1)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2)

 

2. 묵상 (Calvin주석)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앞에서 가르치신 것을 확중해 주는 역할을 하는 데,첫 번째 부분은하나님이 우리의 죄들을 얼마나 기꺼이 용서해 주고자하시는 지를 보여주고, 두 번째 부분 (이 부분은 나중에 적당한 곳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불평하는 자들이 얼마나 옹졸하고 뒤틀린 악성(惡性)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허랑방탕한 삶으로 말미암아 극한 빈곤에 빠지게 된 후에야, 전에 불순종하고 반역하였던 자기 아버지 께 용서를 빌고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을 통해서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어리석고 미친 삶에 지치고 질려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돌아오는 모든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로서의 넘치는 사랑으로 멀리까지 나가셔서 그들을 맞아주시는 하나님을, 자기 아들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집 밖으로 나가서 반갑게 맞아주는 이 인자한 아버지에 비유하신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를 자세하게 살펴보기로하자.

 

"12. 그둘째가아버지에게 말하되";  먼저,그리스도께서는 한 청년의 모습 울 통해서 악하고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시는데, 이 청년은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야만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살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를 떠나고자 한댜 이 청년이 이렇게 아버지를 떠나고자 숭눈 것은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해야 할 책임을 내팽개치고자 하는 것일 뿐만 아 니라, 아버지의 재산을 쪼개어서 줄어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아버지에 대한배은망덕한짓이기도하였다 결국 이 청년은사치스럽고허랑방탕하며 악한 삶을 사느라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만다. 많은 죄를 지은 후에야, 이 청년은 자기가 도저히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디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bonitas)과 이 루 헤아릴 수 없이 크신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어리석고 뻔뻔스러운 청년의 모습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들을 차고 넘치게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도, 마치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돌보심과 다스리심 아래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서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며사는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도 된다는듯이 생각하여, 어떻게든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자 하는 맹목적이고 미친 야심을 품고 움직이는 자들의 모습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 비유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결코 근거 없는 유추(類推)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유추를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할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염려 때문에, 나는 이 비유의 문자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댜 그러니까,니는그리스도께시 이 비유를 통해서,자기 것을 가지고서 천부(天父)를 떠나서 살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깃이라고 상상하는 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망상(amentia)을 꾸짖고 계시는 것이라는 견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석가로서의 한계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청년들이 그들의 자연적인 본능이나 성품(ingenium)에 따라서 행하게 될 때에 흔히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주신다. 청년들은 사리(事理)를 분별하는 힘이 약하고 감정에 심하게 휘둘려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이유로 해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 된 성향의 충동에 자기 자신을 내어맡기고, 참담하기 짝이 없는 곤고한 상태가 될 때까지 더럽고 추한 길을 돌진해 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후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해서 방탕한 삶을 산 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임하는 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 즉, 탕자들은 자신의 재산울 허랑방탕한 삶으로 악하게 허비한 후에 굶주림으로 인하여 파리하게 말라가는 신세가 되고, 그들에게 차고 넘치게 주어졌던 가장 좋은 양식들을 절제해서 먹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나중에는 "쥐엄 열매를 먹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들 자신이 돼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자들이 되어서,사람이 먹는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자들이 되고 만 것을느낀다. 왜냐하면,정상적인 삶을 살도록하기 위해 주어진 것들을 악한 욕망을 따라 허랑방탕하게 허비해 버리는 것은 돼지같이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먹어 버 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독창적으로 해설하여, 천부(天父)의 집에 있는 맛있는 양식을 거부한 자들이 굶주려서 ‘‘쥐엄 열매"를 먹울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교만과 멸시에 대한 의로운 벌이라고 설명한다.  그러한 설명은 옳고 유익한 가르침이고, 우리가 이 비유로부터 그러한 신앙적인 가르침을 유추해내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레고리(allegoria)와  본문의 자연스럽고 진정한 의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16. 그가~~~ 채우고자 하되~~" ;  이것은 이 탕자가 자신의 이전의 사치스럽고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기억울 다 잊어버리고서, "쥐엄열매를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쥐엄열매" 를 돼지에게 주는 일을 하게 되어서 , 그런 것을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사 제국의 창건자였던 고레스 왕이 도망다니느라고 오랫동안 굶주렸다가 거친 보리떡을 먹고 나서 조금 기운을 차렸을 때에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떡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는 유 명한 고사(故事)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 탕자도 오랫동안 굶주리다 보니 그의 입에는 "쥐엄 열매“ 조차 달고 맛있는 음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덧붙여져 있는데 그것은 "주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나는 여기에서 계사(繁辭)로 사용된 ‘카이'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임에 틀림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사람들이 탕자에게 ‘쥐엄열매”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빈곤을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전 재산을 마구 써버린 탕자들을 구제해야 할 자들로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들은 모든 것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하는 것이 몸에 밴 자들인 까닭에,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7. 이에 스스로돌이켜~~~~" ;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만약 사람들이 스스로 잘 알아서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좀 더 부드럽고 온유하게 이 끄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회초리로 맞아서 유순해질 때까지는 결코 자신을 굽혀서 순종하고자 하지 않는 경우에는, 하나님은 그들을 심하게 징계하신다. 따라서 이 탕자는 풍요로울 때에 더욱사납고 패역한자가 되었던 까닭에, 그에게는 굶주림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본보기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어느 때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한 환난을 주실지라도,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가혹하게 다루신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완악하여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지들에게 순종(obedientia)을 가르치시기 위해서는 그런 식으로 하실 수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겪는 모든 불행이나 환난은 회개로의 초청장(invitatio ad poenitentiam)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에, 극심한 환난에 내몰려서 어쩔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환난들로 인하여 사방으로 짓눌려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되어 절망하게 될 때까지는, 우리의 육신은 늘 쾌락을 찾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쾌락으로 되돌아가고자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완악함을부수시기 위하여 흔히 맹렬한 타격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가하시고, 단단한 매듭을 풀려면 단단한 쐐기를 써야 한다는 속담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댜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자기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이 이 탕자에게 회개할 용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가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 어떠한 혹독한 벌도 우리의 완악함을 부드럽게 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탕자가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에 이끌려서 화해를구하고자하는마음이 생겼듯이,우리의 회개도우리가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속에 긍정적인 소망이 생기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 . 이 구절은이 비유의 핵심이 되는구절이다. 사람이리는 존재는 본성적으로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고,자신의 권리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존재인데도,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서, 자녀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이 저지른 죄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던 자녀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 조건없이 다시 받아 주는 법인데,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선하심(immensa bonitas)을 지니신 하나님 이 그에게로 돌아가는 우리를 가혹하게 대하시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분명히 여기에서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들 중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사 65:24)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라는 다윗의 고백도 아주 유명하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가 그의 아들의 간청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다 풀린 것은 물론이고, 아들이 오기도 전에 먼저 그 아들을 맞으러 나가며, 아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더럽고 추한 몰골을 하고 있는 아들을 껴안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죄인인 우리가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기를 시작하자마자, 서둘러 우리를 맞으러 나오신다.  어떤 자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서, 죄인들이 회개하며 구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는 탕자를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그것은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기 시작한 후의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구하고 찾기 시작하는 자들외에는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그 누구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죄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을 슬퍼해야 한디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지만, 그런 사실을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의 선물인 회개가 마치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좌지우지되는 것 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이 점과 관련해서 유한한 인간을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은 무지(無知)의 소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의 은밀한 역사(役 事)를 통해서 사람들의 돌같이 단단한 마음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으시지만, 육신의 아버지에게는 자기 아들의 완악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새롭게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비유는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탕자의 아버지라는 인물을 빌려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는것이다. 

 

"21.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이 구절은 회개의 또 다른 측면, 즉 죄에 대한 자각(自覺)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수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자기가 죄를 범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똑똑히 바라보지 않는 자는 선한 길로 돌아오려고 하다가도 곧 포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앞서 먼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이 구절에서는신의 잘못된 욕망들에 휘둘려서 헤매느라고 정신이 나갔던 탕자가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대단히 강조되고 있다. 육신의 충동들은사람을 한참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가버리기 때문에, 자신을 육신의 소욕들에 내어준 자는 정신이 나가고 지각(知梵)을 상실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은 패역하여 행악하는 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명하신다(사 46:8), 죄를 자각한 후에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데, 여기에 나오는 고백은 교황이 고안해 낸 그런 고백이 아니라 탕자가 아버지의 상한 마움을 풀어 주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상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는 표현은 탕자가 자기의 잘못으로 인하여 나의 육신의 아버지가 상처를 입으셨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상처를 입으셨다"고 한것이나 다름없다. 분명한 것은 육신의 아버지를 거슬러 배역(背逆)하는 자는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자녀 된 자들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을 거슬러 악하게 대적하는자라는 것을 우리의 본성이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22.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  비유들을 세부적인 부분까지 자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는 것은 쓸데없고 무익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종종 말한 바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천부(天父)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에 갖고 있다가 빼앗겼던 선물들을 다 회복시켜 주시기까지 하신다고 말하여도, 그것은 이 비유의 문자적인 의미를 왜곡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배은망덕 함을 징계하실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던 선물들을 다 빼앗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게 하신다는 것도 우리가 명심하여야 한다.

 

[이 비유의 후반부는 불쌍한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시기하여, 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고자 하는 자들을 엄하게 책망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책망이 서기관들의 교만을 겨냥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세리들을 비롯한 무리들에게 영원한 유업(遺業)에 대한 소망을 허락하셨을 때, 서 기관들은 자기들은 공로를 많이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그 공로에 합당한 상(質)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한 반면에,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은 도리어 상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의 교만이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요지 는우리가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받고자한다면,하나님이 아버지의 인자하심으 로 용서하신 저 형제들의 잘못을 우리도 그들의 형제 된 자격으로 용서하여야 한 다는것이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 ; 여기에서 "맏아들"은 유대민족을 가리키는 모형(typus)이라고 보는 자들은 실제로 그들 나름대로 어느 정도 논거를가지고 있긴 하지만, 나는 그들이 이 비유의 맥락 전체를 충분히 꼼꼼하게 살펴보고 나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내하면, 그리스도께서 악한 삶을 삼가 볼쌍한 자들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보고서, 서기관들이 화가 나서 불평하였을 때에, 이 비유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주제넘은 교만으로 부풀어 오른 서기관들을 늘 건전하고 고상한 삶을 살며 자기 집안을 잘 돌보아 온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들, 심지어 일생 동안 인내로써 아버지를 받들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온 효자들에 비유하신다. 사실 그들은 이런 칭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의 거짓된 거룩함이 참된 미덕(美德)이라도 된다는 듯이 가정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희는 너희가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해 온 효자들이라고 거짓된 자랑을 하는데, 내가 백번 양보해서, 너희의 그런 자랑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너희의 형제들이 악한 삶을 회개하였다면, 너희는 그 형제들을 그렇게 오만하고 잔인하게 대하고 배척해서는 안 된댜"

 

"28. 아버지가 나와서~~" ;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교만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교만은 아버지 하나님이 그들의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제발 시기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부탁하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아주 심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 비유 속에 나오는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말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형제들의 잘못을 함께 짊어지고 감당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신다. 형제들을 악하고 심하게 대하는 것은 결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이 하는 말들이 온통 거짓된 자랑이라는 것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온갖 경건의 의무들을 완벽하게 다 행하였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의 형제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죄 사함받는 것을 그가 보고서 불평하였다면,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악한 짓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말 씀하신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자들은 언제든지 순수하고 정결해서, 이러한 악의적인 짓을 하지 않는디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의도는 설령 어떤 사람의 거룩함이 천사들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의 형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서 그가 못마땅해하며 불평한다면, 그것은 불의한 짓이 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31 예 너는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 . 아버지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풀어서 다시 받아들여 주었다고 해도, 그것은 ‘맏아들’에게 전혀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맏아들이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맏 아들은 자기 동생의 안위(安危)에 대해서는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그 동생이 돌아 온 것을 온 집안이 기뻐하는것을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내가 이제까지 내 집에서 가져다가 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지라도, 이 집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은 고스란히 너의 것이기 때문에, 너는 잃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우리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도리어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화를 내는 것이냐?  우리는 네 동생이 죽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무사히 집에 돌아왔으니, 우리가 함께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가 제시한 두가지 이유를 주목할요가 있다. 즉,하나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진 자들을 하나님이 거저 은혜를 베푸셔서 받아주신다고 해도,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형제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을 우리가 보고서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악하고 완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