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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누가복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5:8)

1. 성경 (눅 5:1 ~ 1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1)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2)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3)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6)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7)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8) 이는 자기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9)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0)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1) 
 
2. 받은은혜
누가는 5장 1절에서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사야서 6장 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의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남기신 그루터기일까?   폐역한 유대인들이 허다한 중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음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 서서 무리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게 하셔서 무리를 가르치셨음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얼마동안 말씀을 가르치셨는지 알 수 없으나 성경은 말씀을 가르치신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주님이 주님의 구원 사역을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심을 많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셨음이고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 점에 대하여 칼빈 선생은 침묵한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특별한 직임을 위하여 부르시지 않는다. 사도들과 같이 자기의 생업도 포기하게 하시고 사도로 부르시기도 하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교회 속에 속해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하시는 부르심도 있다. 아마도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를 많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신적인 권능을 드러내시며 그들을 부르셨고 이들은 십자가의 죽으심의 구원의 은총을 목격한 후 오순절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주님의 보내심을 입은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무리들에게 알게 하기 위함은 아닐까~~~.   오늘의 본문은 만유의 주되심을 아는 순간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말씀에 순종하므로 제자의 삶을 살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나는 제자인가를 생각해보는 우리 가족이 되었으면 한다. 샬롬!
 
3.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예수는...호숫가에 서서." ;  마태와마가는그들의통상적인언어습관을 唄서이호수를‘‘갈릴리호수'타부른다. 옛 히브리인들가운데서 이 호수의 원래 이름은 '킨네레트'("긴내랫,"수 19:35)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변하여 이 단어는 ‘게네사랫”으로 바뀌었다. 세속의 저술가들은 이 호수를 "겐내사르" 라 부르고, 이 호수 가운데서 갈릴리에 가까운 지역은  "갈릴리 호수, ”디베랴에 인접해 있던 지역은 그 성읍의 이름을 따서,디베랴호수라 불렀다. 이 호수가 있던 곳과 그 면적에 대해서는 적당한 때에 다른 곳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 기사들 속에 나오는 내용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을 들으러 여러 지역들에서 몰려온 무리들에게 좀 더 편리하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후에,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셨고,” 가르침을 다 베푸신 후에는 이적을 통해서 자신의 신적 인 능력을 나타내시고 증명하셨다고 말한다. 사실, 어부들이 그물을 수없이 던지고도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나중에 한 번 던진 그물에 많은 물고기들이 겉려 니외서 지금까지의 그들의 헛된 수고를 보상받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밤새도록  (밤시간은 물고기를 잡기에 더 적합한 때였다) 아무것도 잡지 못 했다가, 갑자기 이주 많은 물고기들이 그들의 그물에 걸려 나와서 그들의 배들을 가독 채우고도 남았다고 히는 이 정황은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이적이라는 것을 중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배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그들이 통상적으로 집을 수 있는 분량을 훨씬 뛰어넘이서 물고기가 잡힌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이무어진 일이었디는 것을 쉽게 수긍할수 있었다.

"5.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온 것이 없지마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선생으로서의 직임을 수행히곤 히셨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의 마음이 감동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배드로는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라 할 정도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에 의거한 순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가 존경하는 감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께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드로에게 복음의 가치에 대한 어떤 인식이 있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단지 희미한 인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존중히는 베드로의 마음은, 그가 녹초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지금까지 밤새도록 수고했어도 헛된 것임이 밝혀진 그 일을 그리스도의 말씀 한 마디를 의지해서 다시 시작하였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띠라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무척 존경하였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극히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배드로가 이 최초의 순복(順服)의 한 행위 (obsequii initlo)로부터 온전한 순종(plena obedientin)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단지 그리스도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준 것만으로는,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배드로가 아직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한 상테에서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이렇게 순순히 순복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시자 "재판장"이시자 "왕"이시라고 부르는(사 33:22) 우리가 그리스도깨로부터 무수히 명령을 받아 왔는데도, 그 명령을 행하기 위하여 움직이기는키녕 손가락 하나 끼딱하지 않는다민, 우리에개는 우리의 그러한 수치 스럽고 뻔뻔한 태도에 대해시 변명할 말이 있을 수가 없을 깃이다. 

"6.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 이 이적 목적이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알게 하여, 그들로그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임은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적으로부터,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와 인도 하심을 따라시 수고를 한다민,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과 바람직한 성공이 반드시 수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수고가 헛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할 핀요가 없다는 인반직인 교훈윤 얻을 수 있다. "고기를 잡온 것이 심히 많아 두 배가 잠기게 된" 것을 보고서, 무리들은  경외심을 느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권위윤 온전히 인정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이 이 이적을 통해서 드러난 결과였윤 것임이 분명하기 때 문이다. 

"8. 주여 나를 떠나소서." ;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던 사람들도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즉시 공포에 질려서, 하나님이 위로를  베푸실 때까지는 대경실색하여 거의 죽은 자 같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떠나 계시는 동안에는,그들은그들의 참상을느끼지 않을수 없기 때문에,하나님을 간절히 부르고 찾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지극히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그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그들이 엄청난 악(惡)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이 이적으로 말미암아 경외심을 갖고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위엄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단지 베드로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우리는 거기에 베드로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든사람이 두려워 떠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두려움을 달래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즉시 뒤따라오기만 한다면, 이 두려움온 우리 속에 있을 수 있는 어리석은 자만이나 오만을 낮추는 유익을 우리에게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온유하고 다정한 말씀으로 배드로의 마음을 달래 주신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운 무덤 속에 가라앉히시는 것은 그런 후에 다시 그들을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10.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  마테와 마가 본문온, 내가 너회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로 되어 있다. 복음서 기지들은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등장히는 배드로를 비롯한 네 사람을 단지 그의 제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도들로 삼으셨거나, 적이도 장차 그의 사도들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택하셨디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 준다. 그러므로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것온 단지 믿음으로의 일반적인 부르심이 아니라, 특정한 직임으로의 특별한 부르심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가르침의 책무가 부과되고 있지는 않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의 권속으로 받이들이신 것은그들을 가르치는지들로 준비시키 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 깊게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들의 부모와 직업을 떠나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좇으라고 명령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의 양 무리와 교회 속에 속해 있는 것 으로 만족하시고,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회 속에서 특정한 직분을 맡기신다.

주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은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도 더 큰 책임이 부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평범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시지만, 이 네 명의 제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수고를 더 고상한 직임에 시용하시기 위해서,지금까지 그들이 생계를 위해 해왔던 직업을그만두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기계 치고는 별 쓸모없는 기계들, 그러니까 배움도 없고 능력도 별로 없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훈련시켜, 아니 새롭게 하여, 세상의 모든 지혜로운 자들보다 뛰어나게 하고자 하셨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해서, 그들을 통하여 영적 은혜의 현저한 예를 보여주심으로써,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의 빛(fideilumen e coelo)을 간구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배우지 못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택하시긴 하였지만, 그들을 그런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람들을 훈련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마치 우리가 아무 사람이든 목회자 후보생으로 택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직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면 된다는 식으로 제멋대로 생각하여,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보여주신 것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목회자를 선별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원칙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가르치기를 잘하지 (딤전 3:2)" 못하는 자는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배드로 등과  같은 이린 부류의 사람들을 택하신 것온 어떤 광신자들처럼 신앙에 있어시는 무지한 것이 배운 깃보다 더 낫다고 보셨기 때문이 아니었 다. 이런 광신자들은그들의 무지를 자랑하면시, 그들이 배움을 미워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사도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는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는 하늘이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교만을 낮추시기 위하여 멸시 받을 만한 자들을 택하시기로 결심하셨지만, 나중에는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아왔던 바울을 사도로 부르셔서, 이 어부들과 함께일하게하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은유의 의미에 대해서 세밀한 검토가필요 없다. 어쨌든,그리스도께서 복음 전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비유를 가져오셔서 , 그것을 물고기를 낚는(또는, 잡는) 것에 비유하신 것은 적절한 것이었 다. 왜냐하면,사람들은 복음의그물에 걸려 잡혀 올라올 때까지는파도가 흉흉한 저 망망한 대해 같은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들려주는 이야기(1:37-42)는 여기에 나오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거기에 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가 먼저 자기 스승의 권유로 그리스도의 재자가 되었고,나중에 자기 형제를 대리고 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선생으로 모셨지만. 나중에는 높아쳐서 더 높은 직분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