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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누가복음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1. 성경 (눅23:46 ~ 49)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6)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7)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8)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49)

 

2. 받은은혜

이사야서 6장 13절의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의 "그루터기"는 오늘의 본문 48절의 가슴을 치며 돌아갔던 이들이 나중에 오순절 베드로의 강론을 듣고 회개하는 무리들인듯 하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백부장은 이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오늘의 본문은 보여준다. 오늘을 사는 신자는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은총에 감격하며 주님이 성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듯이 청종해야 한다.

 

3. 묵상(박윤선박사 주석)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큰 소리"는 근심과 걱정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폭발도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정신이 분명하신 가운데서 필요 있게 소리를 높여신 것이다. 


이 "큰 소리"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곧, (1)그는 영혼의 무한하신 고통을 큰 소리로 발표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라 하신 것처럼 이제 몸과 영혼의 분리 곧, 몸의 사망에 대하여서도 큰 소리로 선포하신다.  그 이유는, 이 일들은 그의 고난의 절정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2)이 큰 소리는 그 영혼이 떠남을 원치 않는 마음으로 내신 것이 아니고, 그의 원하시는 순종으로 그렇게 하심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귀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에게 대한 예수님의 순종의 태도를 발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큰 소리가 근심으로 난 것이 아닌 사실은 이 귀절에 있는 대로 그가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시는 쾌한 태도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는 이 큰 소리로써 땅과 지옥과 하늘과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사실을 선포하신 것이다. 

 

곧, 그가 그의 분명한 정신과 감심으로 그의 목숨을 사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귀절이 말한 그의 행동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그의 순종의 태도를 보인다"(.....Maar het was de betooning voor aarde, hel, en hemel, menschen, duivelen, en engelen, dat Hij met volle bewustheid Zich overgaf in den dood zijn leven aflegde vrijwillig niet onteweder standelijk genoodzaakt, Joh. 10:18, alsdaad van gehoorzaamheid.....Lucas II. p. 1151)라고 하셨다.  


  "아버지여"란 말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의 부자 관계의 느낌이 여기서부터 다시 회복된 것을 표시한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버림 당하신 그 무서운 지옥 같은 고통 자리에서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하실 뿐이었다.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여기 이방인 한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신 광경을 보고서 예수님을 깊이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막에서 진주를 줍는 것과 같다.

 

[이하 호크마주석]

"48. 구경하러 모인...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  - 백부장의 증언을 소개한데 이어 누가는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있다. '구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리아'(* )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며 일반적으로 극장의 쇼(show)를 구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무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몰려들었지만, 너무도 참혹한 예수의 모습과 형 집행 과정에서 되어진 여러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저마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돌아갔던 것이다. 과연 아들이 예수께 대항하며 소리쳤던 전날의 과오(過誤)를 뉘추치며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아팠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 장면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당시의 상황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행 2:22-24).'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행 2:23)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며 회개의 길로 돌아섰던 것이다.

"49.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  - 누가는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의 측근자와 고향 사람들을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아는 자들'은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 특히 예수의 제자들까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에 관해서는 마태와 마가는 몇몇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나 (마 27:55,56; 막 15:40,41) 누가는 여기서 어떤 여인들인지 신분을 밝히지않고 있는데 이미 8:2,3에서 여자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이상 밝히지 않은 듯하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망의 의미로 해석되거나 두려워하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무서워하며 멀직이 따라갔다는 말처럼 그들도 예수의 일당이라고 붙잡힐까 하는 두려움으로 예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 보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추측은 다소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떠나갔지만 이들만큼은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흠모했던 분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의 처형대(處刑臺)로 쫓아가고 싶었으나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어 또 주위의 일정한 공간을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Calvin선생주석]

"마 27:54. 백부장." ;  누가가 무리들이 탄식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백부장"과 그의 군병들만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그리
스도를 둘러싼 이러한 상황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고, 참된 신앙에 대해

서 무지한 신앙 없는 자가 그가 본 표적들을 통해서 이렇게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랍고 기이한 일이기 때문
이다. 이러한 서로 대조되는 모습은 에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의 우매함을 강력하게 단죄하는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세상

의 틈을 이루고 있는 하늘과 땅이 충격을 받아 두려워 떠는데도, 오직 하찮은 자들 외에는 유대인들 중에서 뭔가를 느끼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충격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만 유대인들이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이듬에 관한 그의 중언들이 그대로 침묵 속

에 묻히 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그들이 가진 참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눈을 열어서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높이시는 것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심지어 로

마 군빙듭까지도 그들이 지닌 본성적인 지각(naturae sensus)을 통해서 율법이나 선생으로부터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

던 것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는' 것을 보고서 "백부장"이 그
렇게 말한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일부 주석가들은 백부장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까지도 그 엄청난 힘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피가 거의 다 빠져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옆구리와 폐가 그토목 큰 소리를 낸 수 있을

만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백부장이 그리스도께서 불굴의 신앙으
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신 것을 칭송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부장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큰 소리

를 지르시는 것을 듣고서 그를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보이신 엄청난 힘과 하
늘의 이적들이 서로 들어맞는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는 어구는 마치 그가 온전히 회개하였다는 듯한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그

의 경천동지()할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면, 세상에 물들어서 별 생각 없이 살아가던 자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충동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뿌리가 없기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무관심한 상태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감정도 사라지게 된다. 이 "백부장"도 그의 남은 일생

동안 하나님께 헌신하는 그런 변화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리는 전령() 역할을 한 것일 뿐

이었다.


누가가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하지만, 그것은 백부장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고 보도한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다른 두 복음서 기
자가 보도한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

은 누구나 다 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칭송하고, 그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실
제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백부장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

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어떤 신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

고, 여러 가지 중거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키심읍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는 것을 고백한 것이었다.


"무리들이 가슴을 친" 것은 불의하고 충격적인 살인으로 말미암아 유대민족 전
체가 죄를 지었음을 느끼고서, 민족적인 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 두렵다는 것읍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

에, 그들의 탄식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참된 회개의 시작 또는 준비 과정이 되

었읍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광읍 위하여 그들로부터 탄식을 이끌어 내신 것 외에는 그들에 대하여 그 이

상의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읍 자신의 눈앞에서 보

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할지라도, 그 두려움이 사라진 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 27:55.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  나는 복읍서 기자들이 이 기사()를 덧붙인 것은 제자들은 도망쳐서 뿔뿔이 흩어지긴

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 무리 중의 일부를 여전히 중인들로 남겨 두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

한다. 사도 요한도 십자가로부터 떠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여자들만이 칭찬을 받는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두려워 떨며 도망쳤을 때, 여자들이 주님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그 곁을

지킨 것이 한층 더 빛을 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여자들은 특별히 주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주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셔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실 때조차도, 주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주님

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가 본문을 통해서 모든 남자들이 다 도망을 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누가는 "예수를 아는 자들이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고 보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나았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이 이 여자들을 주로 칭찬한 것은 일리가 없지 않다. 내 생

각에는, 복음서 기자들이 제자들과 여자들을 이렇게 암묵적으로 대비시킨 것 속에는 사도들을 따끔하게 책망하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내가 "사도들"이라고 할 때에는 사도들을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 복

읍서 기자들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사도들 중 한 사람은 유일하게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
다. 세상의 구원이 달린 그 현장을 지키지 않고 도망친 것은 주님이 택하신 중인들에게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따라

서 그들은 나중에 복음율 선포할 때에, 이 역사()의 중요한 부분읍 여자들의 입에서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큰 재앙이

될 뻔했던 일에 대한 치료책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더라면, 사도들은 물론이고 우리까지도

구속()에 관한 지식을 빼앗겨 버리고 만았을 것이다.


얼핏 보면, 우리는 여자들의 중언이 사도들의 증언과 동등한 권위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고 힘을 내어서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을 제대로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여자들의 중언이

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게 만든 저 대속()에 대하여 말하는 복음이 우리

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선하심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앞서 달려가

야 마땅하였던 자들이 다 도망치고 없는 동안에, 하나님은 무리들 중의 몇 사람에게 힘을 주셔서, 놀람과 두려움에서 깨어

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과 구원에 필수적인 저 역사()를 우리에게 중언해 줄 중인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여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말하게 될 기회를 곧 갖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여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열심 하나로 자신의 고향 땅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의

입술로부터 끊임없이 진리를 배웠다는 것, 그리고 이 여자들은 주님의 구원의 가르침을 배울 수만 있다면 수고나 돈을 아끼

지 않았다는 것만을 말해 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