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11:38)

1. 성경 (요 11:28 ~ 3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8)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29)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0)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1)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2)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3)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4)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5)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6)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7)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8)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 그리스도께서 동네 밖에 계시며 동네 안, 사람이 많이 모인 곳으로 오시지 않은 것은 마르다의 간청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선생님이란 단어는 마르다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단어다. 지금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땅히 받을 수 있는 분복 이하의 복을 누렸지만 하여간 주님에 대한 신뢰감은 상당했고 충실한 제자중 하나였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간 것을 보면 그녀가 주님을 경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을~~~~~” ; 마르다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마리아를 불러오게 한 주님은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지시고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이 그가 행할 이적의 목격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도를 알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흔하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그녀는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 여기에서도 마리아는 경배하듯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리아는 자기 말로 주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은 하늘과 땅에 가득한데 이를 육체를 가진 예수의 몸에 국한시킨 것이다.

 

”예수께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동정심을 보이셨고 민망히 여기셔서 눈물까지 흘리셨다.예수께서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외에도 인간의 공통적인 운명인 가련한 인간의 삶을 보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주님은 그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곧 인생들의 병고의 슬픔에서 해방시키려 오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셨고 열심과 긍휼로 행하시는 것을 보이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먼저 심령으로 민망히 여기시고 슬픔을 나타내시며 눈물까지 흘리시므로 우리 인간들의 질병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시기를 자신이 고통당하시는 것처럼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 죄인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세상에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보며 이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는 요소가 아니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유순하였고 순종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감정이 없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이 점에서 주님은 우리의 형제임을 입증하여 주며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의 대변인이 되고 인간이 경험하는 동일한 내용을 경험하여 우리를 변호하시며 우리의 약점을 옹호하는 일을 기꺼이 담당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판단을 우리에게 기술해 보이고 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말한 첫째 사람들은 인간적인 면만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별로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구하지 않았다고 악의에 차서 그리스도를 비난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칭찬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즉시 불평을 토로한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우리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것을 요구하고 하나님께 우리 육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채워주도록 강요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답을 강요하며 우리의 참지 못하는 조바심이 지나치게 우리를 서두르게 만든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구경꾼으로서 무덤에 접근한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비통히 여기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비통히 여기신것은 그리스도께서 정복해야하는 사망이 그의 눈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이들은 이 비통하심이 그들의 불신앙을 분개하셔서 생긴것으로 설명하지만 그것보다 더 적절한 이유는 그들보다는 죽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